하이데거의 철학과, 초끈 이론이 만나는 지점
주말에 #트레바리 철학 독서모임 [진진]에 참석했다. 이 모임은 내 철학 코치인 B군이 파트너로 리드하는 모임인데, 이번 구간에 이 모임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강독하고 있다. 나도 올해 하이데거를 넘는 중이라 이 모임에 두 번 참석했다. (마나님께 겨울 코트를 상납하기로 약속하고...)
나는 B군만큼 깊이 철학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희한하게 어려운 철학의 언어를,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는 재주를 가졌다. 그래서 이 모임에서 B군의 설명 몇 개를 조금 쉽게 풀어 해설해 주었다. 그 포인트들이 재미있었는지, 뒤풀이로 이어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몇몇 멤버가 내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하이데거의 핵심 아이디어는 인식에 앞서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어려운 말이다. 인식에 앞서 존재가 있다니. 그런데 내가 어제 우리 테이블에 모인 분들이 우연히도 모두 공대 출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초끈 이론의 우주론에 빗대 인식과 존재에 대한 설명을 했다. 테이블에 있었던 멤버들의 반응이 좋았어서, 오늘은 이 이야기를 조금 써보려 한다.
여기에서 인식이란 칸트적 인식을 말한다. (칸트의 인식에 대해 썼다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다른 글을 아래에 링크하겠다) 칸트적 인식을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용암의 색채는 경험할 수 있지만, 용암의 온도는 경험할 수 없다. 용암의 온도를 경험하면 손이 녹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 안에 용암이라는 존재의 모든 존재 특성이 다 들어와 있지는 않은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인식으로는 결코 존재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존재는 은폐되어 있고, 인식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매우 납작하긴 하지만) 인식에 앞서 존재가 있다는 말의 의미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자연에는 네 가지 힘이 존재한다. 그것은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 그리고 중력이다.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 이론은 늘 상대방을 포섭하려 드는데, 이 중 양자역학의 중력은 아인슈타인 본인에 의해 일반상대성 이론으로 해석되었다.
현대 양자역학에서, 약한 핵력과 강한 핵력은 강력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양자장 이론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중력은 그렇지 않았다. 중력을 통합한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을 양자이론에 도입하려고 할 때마다, 그 계산은 수학적으로 반드시 실패하는 것이다. 어떤 물리적 과정이 발생할 확률(예를 들어 전기적으로는 서로 밀고, 중력으로는 서로 당기는 두 개의 전자가 서로 스쳐 지나갈 확률)을 계산해 보면 늘 '무한대'라는 답이 주어진다.
공간의 부피나 물질의 양은 경우에 따라 무한대가 될 수 있지만 확률은 0과 1 사이의 값만 가질 수 있다. 확률이 무한대라는 것은 어떤 사건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무한대의 확률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두 방정식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1980년대에 중력을 양자역학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이론을 받아들이려면 두 가지 받아들여야 하는, 그리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계관이 발생한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니라는 것(다중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우주가 시간-공간 4차원이 아니라 10차원 혹은 11차원이라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현시점, 우주의 진리에 가장 가까운 후보 중 하나라고 하는 끈 이론이다. (다른 후보로는 양자중력이론과 고리(ring) 이론이 있다)
우주가 10차원, 혹은 11차원이라는 말은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3차원 공간에서 시간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5차원이나 6차원을 상상해 낼 수 없다. 평면 만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개미가 공중에 뜬 상황을 상상해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인식'이다. 우주라는 존재자의 존재 특성은 실은 10차원, 11차원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현-존재인 우리는 시공간 4차원만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우주 바깥에 우리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우주가 존재자로서 존재하지만, 우리는 오직 우리의 우주만을 인식하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리면 우리는 시공간 4차원과, 우리의 우주만을 경험할 수 있는 현사실성 속으로 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10차원, 혹은 11차원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나 불완전함, 유한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우리 인간, 현-존재의 존재 방식인 것이다. 우리는 11차원과 다중우주를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4차원과 우리 우주만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과 과학을 같이 읽거나, 철학과 예술을 함께 접할 때 시너지가 날 때가 많다. 사실 당연하다. 과학은 생각을 수렴하는 학문이고, 예술은 생각을 발산하는 학문인데, 철학은 '생각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 접점들에서 나는 많은 놀라운 지점들을 발견한다. 우리 독서모임 [보탬]이 철학과 과학, 그리고 문학을 같이 읽는 까닭이기도 하다.
글을 어떻게 마쳐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이 설명을 테이블에 있었던 멤버들은 좋아했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B군이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다) 긴 글을 마친다.
https://brunch.co.kr/@iyooha/160
https://brunch.co.kr/@iyooha/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