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나의 눈물을 보고서야 피한다고 입꼬리를 씰룩이던 할머니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눈 깜짝할 새에 퍼붓는 소나기세례의 기습공격을 무방비로 당한 사람 마냥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당황하면서도 미안한 기색을 얼굴에 역력히 드러내며 "아들이 잘생겼더라. 나는 잘생기지 않은 애를 잘생겼다고 없는 말 하는 사람 아니다."라고 뜬금없는 말씀을 하시니 옆에 다른 할머니가 그 기세를 몰아 "새댁아 애가 아프다고 기죽을 필요 없다. 이 동네에 아무도 남의 소리 할 사람도 없다. 내가 일흔일곱인데 이 동네에서 제일 젊다. 앞으로는 이모나 엄마라 생각하고 피하지 말고 편하게 살아라."라는 말로 위로하셨지만 나는 속으로 진정 나를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모른척해주고 마주칠 때는 서로 인사 정도 하고 지내게 배려해 주는 게 더 나을 텐데.. 편하게 지내라는 소리가 더 야속하게 들렸다.
평소 왼쪽길은 우리 가족 외에는 거의 왕래를 안 하기에 서로 부딪힐 일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날이라도 잡은 듯 두 할머니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이웃이 비록 세상물정 어두운 노인들이라 해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사는 지라 이 동네에서 얼마나 거주할는지는 모르지만 사는 동안 서로 이방인처럼 살고 싶었다.
아는 척하는 자체가 부담으로 작용했다. 지금 내 가정사도 버거운데 저 할머니들 눈치까지 봐야 하나 싶어 은근 울화가 치밀었다. 마트나 주민센터 편의점 어디를 가던지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저 정자를 지나가야 했다. 1분만 더 역으로 걸어가서 가로질러 가면 약 20미터 거리를 두고 평행선처럼 나란히 마주 보는 자전거 도로가 있는데 그 길로 다녔었다.
할머니들이 없었더라도 그 길이 오히려 지름길이라 그쪽으로 다녔을 수도 있다. 그쪽 길로 가면 굳이 할머니들한테 나의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 좋았고 평행선처럼 마주 보는 길에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만큼의 거리가 아니어서 설마 할머니들이 나를 알아볼까 싶었는데 그건 나의 기우였다.
내쪽에서는 그 할머니가 그 할머니 같았지만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새로 이사 온 자식 또래의 젊은 가족을 훤히 꿰뚫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네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 신경이 친구분들에게 쏠려 있을 텐데 20미터 거리의 나를 보는 게 신기했다. "새댁아 앞으로 저리 가지 말고 이리 다녀라." 하시는 거였다. '네'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론 '계속하던 대로 해야지.' 하는 생각뿐이다.
피해 다닌다고 입꼬리를 씰룩이던 할머니가 무슨 말이라도 해서 미안함을 모면하고 싶으셨던지 "내가 아래 새댁 대문 앞에서 도토리를 줍고 있었더니 새댁 신랑이 한 봉지나 주워 주더라." 하셨다. 그거 주워서 뭐 할 거냐고 물었다. 오다가다 할머니들이 주운 것 다 모아 도토리묵을 만들어 정자에서 나누어 먹는다고 했다.
우리 집 대문 옆은 작은 길이 이어져 있고 그 길은 산을 접하고 있었다. 대문 앞에서 바라보이는 약간 경사진 산에 큰 상수리나무가 있다. 가을이 되니 도토리가 하나씩 떨어져 우리 대문 근처로 쌓였다. 그걸 오가던 할머니들이 주워 모으고 있었다.
친정 엄마도 심심풀이로 산에 다니며 도토리를 주워 모아 묵을 만들어 내게도 갖다 주고 3개월 전쯤 방앗간에 가서 빻은 도토리 가루를 세 되는 족히 될 정도의 양을 갖다 주셨다.
그 도토리 가로로 내가 직접 만든 도토리묵을 몇 번 만들어 부모님과 나누어 먹고 남은 건 가끔 생각나면 만들어 먹으려고 냉동실에 고이 모셔둔 게 있었다. 이때다 싶어 냉동고에 넣어둔 두 되는 족히 넘을 정도의 도토리가루를 할머니께 갖다 드렸더니 이리 많이 주냐며 좋아하셨다. 그 뒤에 지나다 마주쳤을 때 시금치를 가득 넘치게 담은 봉지를 나의 손에 쥐어주셨다.
먼저번에 내가 드린 도토리 가루에 대한 보답인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그렇더라도 그걸 기억했다가 시금치로 보답하려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순박한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를 보니 내가 뭔가를 드리지 않았어도 챙겨 주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골의 정겹고 훈훈한 인심이 그대로 살아있는 동네여서 닫혔던 마음이 조금은 열리는듯했다. 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사신 터줏대감인 분들이라 천성이 순수하고 선하다는 느낌이 꽂혔다. 지금은 다들 연세가 들어서 고된 노동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목적이 돈이 아니라 본인들 먹고살고 자식들 조금씩 보태주는 정도이기에 텃밭규모의 농사만 짓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산책을 나가거나 마트를 갔다 오는 길에 정자에 놀던 할머니들을 맞닥뜨리면 "새댁 여기 좀 와서 놀다 가"라는 할머니들의 다정한 목소리가 정겹긴 하지만 여전히 불편하고 피하고 싶어지는 건 변함이 없었다. 비슷한 연배도 아닌 제일 젊은 분이어도 서른 살이 훨씬 넘는 나이 차이로 부모뻘이기에 더 그런 마음일 것이다.
어느 날 운동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정자에 눈길이 갔다.
정자에 할머니들이 열 분 남짓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돌아서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나의 그런 행동까지 다 들킨 터라 내키지 않았지만 가볍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니 할머니들이 일제히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중 한 할머니가 "새댁 쉬었다 가." 최대한 화사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 네 저는 가볼게요. 노세요." 그냥 인사치레려니 싶어 지나치려는데 한사코 놀다 가라고 다정한 말로써 발목을 잡는 바람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정자에 엉덩이만 슬쩍 걸치고 그녀들의 대화에 조금 끼었다. 그중 연세가 제일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새댁 우리가 보기 싫어서 피해 다닌 건 아니지? "아유 그럴 리가요. 그저 제가 자격지심 때문에 기가 죽어 그런 거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죄송해지네요." " 그렇담 고마운 일이고." 이미 내 처지와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으면서도 딱히 나눌 말도 없어 다시 확인차 하시는 말씀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드시던 뻥튀기와 비스킷, 빵 등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건넸다. 빵을 하나 베어무니 버석거려 목이 메었다. 눈치 빠른 한 할머니가 생수를 종이컵에 따라 주었다. 물 없이는 먹을 수 없는 퍽퍽한 빵을 꾸역꾸역 겨우 삼키고 나니 또 하나를 건네길래 도저히 더는 먹을 수 없어 배부르다는 핑계로 거절을 했다. 바쁘면 어서 가라는 할머니의 말씀이 구세주 같아 얼른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쉬었다 가라고 붙잡을 땐 할머니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공세가 쏟아질 것에 은근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 무색하게 10분도 채 안돼 이제 바쁜데 어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할머니들도 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 눈치인데 막상 붙잡고 보니 차마 아픈 곳을 찌를 용기가 없었나 보았다. 그것도 그녀들만의 배려법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부모에게든 귀하지 않은 자식이 있겠냐마는 스물여섯 청춘에 부부연을 맺은 동갑내기 우리 부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귀하디 귀한 외동아들이 있다. 이 세상에 온 환희의 순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16시간의 진통 끝에 얻은 기진맥진한 내 배 위에서 마주 본 얼굴이 시후였다. 우주의 시간이 멈추고 오직 나와 내 아들만 존재했다. 신생아 답지 않은 동그랗게 쌍꺼풀진 눈매에 홀딱 반해버렸다. 온 세상에다 대고 외치고 싶었다. 이렇게 예쁜 신생아를 본 적 있느냐고. 세상 사람들아 쌍꺼풀진채 태어난 신생아 본 적 있느냐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었다. 이튿날 간호사실에서 시후를 면회했을 때도 모든 산모와 가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고 제일 예쁜 아기라는 찬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신생아를 거쳐 포동포동 살이 오른 유아기 때도 시후의 인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했다. 다만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 탓에 잠을 깊이 못 잤다. 안고 어르다 겨우 잠이 들어 자리에 눕히는 즉시 깨어 우는 통에 나 또한 늘 부족한 잠으로 인해 피로에 절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안고 업고 살다 밤낮이 뒤바뀌어 새벽까지 보채는 시후를 업고 골목길이나 공원을 서성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공원 벤치에 앉아 깜빡 졸다 깨어나면 뿌옇게 여명이 밝아왔다. 신문배달 학생이나 우유배달 아주머니도 만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 시후의 하루는 먹고, 자고, 싸고, 울고,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기가 무한반복인데도 맑고 순수하기만 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면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종일 울고 괴롭히고 보채면 잠시 귀찮은 마음이 스며들다가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까만 눈동자에 빠지면 하루 종일 눈만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렇게 예쁘고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아기를 버리는 부모는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증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늘 팔을 이용해 시후를 들었다 놓았다 한 탓에 어느 날부터인가 허리가 시큰 거리다 통증이 밀려와 종합병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 적 있었다. 치료실은 지하에 있었고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아직 앉지도 못하는 시후를 맡길 곳이 없어 1층 원무과 직원한테 사정을 설명하니 흔쾌니 맡아주며 치료를 하고 오라고 했다. 찜질의료기 침대에 누운 지 10분도 채 안돼 시후를 안고 내려온 여직원이 치료사에게 "아기 엄마 어디 갔어요?" 하는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