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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병 일기

여든다섯 살의 아이

추석연휴가 끝난 지 8일째였다. 아버지가 몸져누웠다는 연락을 동생으로부터 전해 듣고 달려갔다. 동생은 큰 병은 아니고 연세가 높다 보니 기력이 없어 누워 있다는 말과 함께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가보니 끼니도 거른 채 누워 있었고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아픈 곳은 없다고 하시면서도 나의 부축 없이는 자리에서  일어지를 못하셨다.


겨우 일으켜 냉장고에 누군가 사둔 죽을 데워 드렸다.  엄마가 하늘로 떠난 4년 전쯤 시작된 방광염으로 인해 배뇨 조절이 안 되는 탓에 처음에는 속옷만 적시던 증상이 점점 심해져  이부자리는 물론이고  온 집안 곳곳에 소변을 흘리고 다닌 탓에 거실 방 화장실 할 것 없이 바닥이란 바닥은 아버지가 흘린 소변으로 미끈거리고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대청소를 하고 집으로 가려고 가방을 챙겨드는데 "갈 거냐?" 하는 힘없는 소리지만 간절한 눈빛이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나 두고 가지 마?" 라며 간절하게 애원하는 소리 같아 심장이 쿵 하며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 혼자 몸이라면 며칠 더 머물며 아버지를 보살펴 드리고 싶었지만 딸린 식구가 있고 더더구나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과 아픈 아이들이 둘이나 있어 가야 했다. 누워 계시다 기운이 조금 나면 끼니는 챙겨 드시라며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집으로 가는 중에도 집에서도 마음은 아버지한테 가 있었고 자식들 키워봐야 소용없고, 부모가 아플 때 곁에서 살뜰히 보살피는 자식 하나가 없다는 현실이 서글펐다. 부정할 수 없는 미래의 내 자화상임에도,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 속에서 금방 닥칠 운명임에도, 뉘 집 자식할 것 없이 지척에 부모를 두고도 1년 내내  전화 한 통도 얼굴 한번 비추기도 힘든 각박한 현실을 갉아먹고 있다.


 아버지를 뵙고 온 후 내내 불편하던 내게 신은 정신 차리라는 심한 질책을 가했다. 매일 아버지를 보살피는 요양사가 오빠를 통해 다급한 연락을 취해온 모양이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식사도 못하신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현재 위 용종 제거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이라 했다.  나는 곧장 달려갔다.


 힘없이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이틀 전에는 힘이 없을 뿐 아픈 데는 없다시던 아버지가 허리도 아프도 온몸이 아파서 움직일 수 없다고 하셨다. 자식들한테 민폐 끼치기 싫어 좀체 아픈 내색을 안 하시는 아버지가 온몸이 아프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진짜 많이 아픈 거였다.


단순한 몸살이라  약만 드시면 나을 거라 가볍게 생각했는데 땅거미가 내려앉고 지척에 어둠이 깔린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로니아 농장에서 괭이로 필요 없는 아로니아를 솎아내는 작업을 며칠 한 이후에 꼼짝을 할 수 없었다는 고백을 해왔다.  나도 오빠도 이제 밭일은 그만하시고 식사 후 걷기 운동이나 하시고 가끔 경로당에 나가 친구분들이나 만나 담소나 나누며 편하게 지내라 해도 귓등으로 들으시길래, 일을 하시는 게 오히려 건강에 좋을듯해 그냥 취미 삼아 힘에 부치지 않을 정도만 하시라고 다짐을 받은 터여서 크게 걱정을 안 했다.


뼈가 약한 노인이라 단단한 흙을 파는 과정에서 아마도 허리가 골절되었거나 금이 간 게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119를 불렀다.  10분 만에 도착한 구급대원 두 명은 처음엔 위급한 환자도 아닌데 굳이 구급차를 불렀냐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며 언짢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택시를 탄다 해도 혼자힘으로 일으켜 옮길 수도 없고 척추나 허리의 골절환자를 비전문가가 함부로 다루었다가는 치명적일 수 있기에 염치 불고하고 119를 부를 수밖에 없었노라 했고 바쁜 대원들을 불러 죄송하다고 사과드렸지만, 퉁명스러운 말투로 남자 형제들은 없냐고 물었다.


 오빠는 병원에 입원 중이고 남동생은 타지의 소방서에서 근무한다고 했더니 뚱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하필이면 이틀 전부터 한 달간이나 아파트 전체의 대대적인 엘리베이터 교체공사가 있어, 들것에 태워 옥상을 통해 옆라인으로 진입해 엘리베이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아야 아아 아야"  연신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고통스러워하시는 아버지를 들것에 겨우 실었을 때에야 심각한 상태라는 걸 직감하고 대원들의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고 친절모드로 돌아섰다.


그나마 다행히도 고층아파트라 두 계단만 오르면 되는데도  들것을 들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그분들이 땀을 비 오듯 쏟았다. 그분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고, 처음 방문 때  보인 싸늘하고 떠름한 그들의 반응에 내심 기분도 상해 있던 터라 제가 이웃사람이라도 불러  내일 택시로 병원에 갈 테니 그냥 철수하고 돌아가 시라 했더니 그때는 진심으로 걱정하시며  택시로 어떻게 옮길 거냐며 우리가 옮길 테니 걱정 말라고 해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우여곡절 끝에 지역에선 나름 유명한 병원에 도착했고 이것저것 몇 개의 검사를 거치고 나온 결과는 허리뼈가 골절되 폐렴끼도 겹쳐있었다.  면역이 약한 노인들은 약한 폐렴 증상에도 합병증으로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아찔했고 독거노인들은 이렇게 고독사 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에서는 고요한 적막감이 감도는 시간이겠지만 환자로 넘쳐나는 응급실은 대낮보다 더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입원실에 입실했을 땐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제대로 돌아 눕지도 못하시는 아버지의 앓는 소리에 대신 아파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지켜보는 사이 창밖으로 휘뿌연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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