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 세상의 주인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삼 남매의 반찬거리를 항상 걱정하셨다. 내가 어릴 때는 도시락을 싸 다니던 시절이었고, 도시락 준비는 주로 누나의 몫이었다. 좋은 반찬을 먹고 싶어도 형편상 그러지 못한 날이 많았다. 그래도 가끔은 누나가 정성스레 싸준 먹음직스러운 반찬이 도시락에 담겨 있을 때도 있었다.
그 시절 인기 있는 도시락 반찬은 불고기,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햄, 맛살 같은 것이었다. 친구들이 도시락을 펼칠 때 이런 반찬들이 하나둘 보이면, 나도 모르게 그 반찬들이 먹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반찬을 도시락에 담아 갈 기회는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고, 대부분은 김치나 멸치 같은 소박한 반찬이 전부였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도시락을 다 비워낼 정도로 식성은 좋았지만,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만큼은 자신감이 없었다. 주변 친구들이 멋진 반찬을 자랑하며 도시락을 펼쳐 보일 때마다 괜히 위축되곤 했다. 소심한 성격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김치와 멸치를 싸 와도 당당하게 먹는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가끔 도시락에 햄이나 줄줄이 비엔나가 들어 있는 날은 나도 그날만큼은 도시락을 펼치는 일이 기다려졌다. 그런 날이면, 괜히 내가 더 커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재래시장을 다니던 기억도 있다. 누나는 내 앞을 걷고, 맨 앞에는 아버지가 계셨다. 나는 아버지와 나란히 걷기엔 아직 어려서인지 늘 조금 뒤에서 졸졸 따라갔다. 아버지는 늘 삼 남매의 반찬거리를 시장에서 마련하셨다. 가게를 하나씩 지나며 고르고 흥정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커다랗게 느껴졌다. 나는 그 넓은 시장에서 아버지의 발걸음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어쩌다 뒤처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종종 화를 내셨다. 좁은 시장 통로에서 고함을 치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왜 한눈을 팔았느냐"며 다그치실 때마다, 나는 누나와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저희 삼 남매의 어깨는 점점 더 처졌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시장 골목에 울려 퍼질 때면, 나는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 순간 너무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그때 우리 어깨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아버지는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왜 그렇게 화가 나셨을까? 당시 아버지의 삶과 우리 삼 남매를 위해 애쓰던 모습을 생각하면 짐작은 가지만, 그 화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지금 여쭤보면 아버지는 그때를 기억하실까? 그때 누나와 내 표정을 기억하시려나? 무섭고 속상했던 그 마음이 지금도 아련하게 남아 있다.
추신).
어린 시절의 기억은 우리 삶 속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때로는 무의식 속에 묻어두었다가, 어른이 되어 문득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고, 부모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며 부모가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인정하고, 아이와 진심으로 화해하는 일입니다. 저는 지금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의 어린 시절 기억을 꺼내 보면서, 그 시절의 저를 다독여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