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에피쿠로스

by episteme

오늘은 헬레니즘 시대의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소극적 쾌락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헬레니즘 시대는 대략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양 정복과, 사망 후 300년 간의 시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끊임없는 정복 전쟁과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멘탈이 바사삭, 탈탈 털렸던 때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마음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 사상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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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양반이 에피쿠로스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먼저, 쾌락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쾌락 개념과 좀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흔히 쾌락이라고 하면 뭔가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퇴폐적인 것들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일단, 쾌락의 범위가 보다 넓었습니다. 고통이 없는 상태 역시 쾌락이라고 보았는데요.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러한 고통이 없는 상태의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정적인 쾌락이라고도 합니다.

정적인 쾌락은 막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놀고 즐기면서 욕구를 충족할 때 생기는 육체적인 동적 쾌락과는 다릅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욕구만을 적절하게 추구하는,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정적인 쾌락을 최대로 느끼는 몸과 마음의 아무런 고통이 없는 상태의 최고 경지를 아타락시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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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가 이러한 소극적 쾌락, 정적인 쾌락을 추구한 이유는 육체적 쾌락을 너무 지나치게 추구할 경우 오히려 고통에 빠지게 된다는 '쾌락의 역설' 때문입니다. 쾌락은 즐거움인데, 오히려 고통이 온다니.. 역설적이죠?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이것을 많이 경험해 봤습니다.

배고플 때, 피자를 먹었다면? 처음 한 조각은 너무 천상의 맛이죠. 너무너무 맛있습니다. 하지만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계속 먹어서 서른 조각, 백 조각까지 먹는다면? 그땐 즐거운 미식이 아니라 푸드 파이터가 될 겁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날 수도 있고, 토할 수도 있습니다. 먹는 즐거움이라는 육체적 쾌락을 너무 지나치게 추구했더니 오히려 고통에 빠지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아타락시아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행복을 수학, 분수로 통해 표현한다면 욕구 분의 충족 (욕구/충족) 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행복을 키우기 위해서는? 분모인 욕구를 줄이거나, 분자인 충족을 키우면 되겠죠?

문제는 막말로, 우리의 욕심과 욕구는 끝이 없는데..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겁니다. 충족이 전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분모는 크고, 분자는 작아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에피쿠로스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은 바꾸기 어려우니까 충족을 키우기는 어렵고.... 그냥 아예 욕심(분모)을 줄여버리자!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바로 검소한 생활과 욕구 절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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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빵과 한잔의 물 정도의 식사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검소하제 욕심 줄이고 살자! 이거죠.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욕구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 - 수면욕, 식욕 같은 것들입니다.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지는 욕구면서, 안 하면 안 되는 것들이죠. 죽습니다.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 성욕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가지지만. 충족을 못해도 죽지는 않죠.

마지막으로 비자연적이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 명예욕, 재물욕 등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욕구가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며 모여 살면서 생기는 비자연적이고, 꼭 필요하지 않은 욕구입니다. 명예나 재물이 없다고 죽진 않잖아요.

에피쿠로스는 이 중에서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만, 아주 최소한으로 절제하며 추구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에피쿠로스 학파는 은둔 생활하며 친한 친구와의 우정을 즐기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사회생활을 반대하고 은둔 생활 하기를 권유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회생활을 할수록 욕심이 늘어나고, 다양한 사건 사고에 휘말려 고통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친한 친구와 은둔해서 조용히, 욕심 없이,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단, 사회생활을 안 하고 은둔 생활의 고통이 더 클 경우는 허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 원칙으로는 은둔 생활과 우정을 강조한다는 점!

기본적으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은 선, 고통은 악이라는 쾌락주의이기 때문에 이렇게 경우에 따라 예외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은 선, 고통은 악이라는 쾌락주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큰 고통이라 생각하고 무서워하는 죽음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란 “의식이 소멸되어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죽음이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고통이 아니다는 말인데, 이 생각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에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아프지도 않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또한 죽었을 때는, 에피쿠로스 학파는 원자론을 주장합니다. 현대 과학자들처럼 원자를 직접 관측한 건 아니지만 세상의 기본 구조가 원자로 되어있고, 원차들이 합쳐져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죽은 후에는 우리 인간은 원자로 해체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육체와 정신이 소멸하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사라지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가 된다는 거죠.

그래서? 생각도 못하고, 감각도 없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이런 논리를 펼칩니다.

결국, 죽은 후에는 감각이 없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이 아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이거죠.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감각도 없고, 생각도 못하게 되는 무의 상태가 되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감각이 없으므로 고통도 없다. 두려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살짝은 특이한 죽음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며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죽음에 대한 개념을 바꿔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행복은 불안이 없는 마음과 고통 없는 육체에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선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줄이는 법을 배우는 것,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까운 관계와 소박한 삶에서 온다는 통찰. 자본주의에 찌들어있는 우리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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