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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Jun 09. 2018

흔한 백수의 일기

백수가 과로로 쓰러지기 쉬워

우스갯소리로 건넨 지인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체력관리가 안되는 저질체력이었는데, 회사를 다니지 않으니 체력관리를 해야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퇴사하고 처음 몇 주는 하루에 두 탕씩 연예인급 스케줄을 보냈다. 퇴사했다는 해방감에 힘든 줄도 모르고 대학 다닐 때나 타던 막차를 놓칠 때까지 놀았다.  하지만 나를 몇 번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도 안다. 내 몸은 말 그대로 저.질.체.력. 그렇게 열심히 놀아제끼다가 그 무섭다는 환절기 감기 몸살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그 흔한 감기 몸살로 시작했는데 서서히 몸에 염증 덩어리들이 나도 여기 있다고 소리지르는 것도 아니고 갑작 결막염이 찾아오고, 더 나아가서는 부드러운 치즈를 먹다가 갑자기 치아 유지 장치까지 떨어졌다. 안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요새 뭐하고 지내?

그저 누구나 물어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안부인데도 나는 요새 이 말이 제일 무섭다. 말 그대로 백수라이프를 너무 철저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전형적인 표본=나 라고 얘기할 정도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았던 나였다. 나이 서른 먹도록 적어도 부모님께 밥 벌이는 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퇴사와 동시에 백수라는 것이 벼슬이 아니라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사표를 쓰고 나온 자의적 백수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손이 근질거리고,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퇴사 후 방청소를 하질 않나, 괜히 눈치보다가 설거지 한 번씩 하고 청소기를 돌리질 않나. 그 때 깨달았다. 누구에게 조언할 필요도 없이 나 역시 쉬는 법을 모르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표본이라는 걸. 그리고 아마 이번 휴식 기간에도 배우지 못하고 안달나서 결국 새로운 직장을 잡으려고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걸.


퇴사하고 많은 지인들이 내가 한 달 살기 또는 여행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걸 제일 만이 고민하다가 퇴사하고 나니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더라. 그러다보니 모든 계획이 흐지부지. 그냥 그렇게 가고 싶다, 라는 말만 남기고 모든 계획은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비행기표 끊고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는 몸이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왜일까. 사실 아무 생각 없을 때 그냥 끊고 떠났어야 하는데! 여행 거하게 하고 탕진잼!!! 외치며 돌아와서 열심히 이력서를 작성했어야 하는데 아쉬운 게 사실이다. 남들은 아직 아쉬운 시간인데 나는 이제 놀만큼 놀았나보다. 조금만 더 밍기적거리고 다시 일터로 나갈 준비를 하고 싶은 거 같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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