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제? 내 이 집 구한다고 두 달 넘게 알아봤거든. 회사 때문에 주말밖에 시간이 안 난 다이가. 편하게 있어라. 진혁아. 니도 여기 있으면서 집 구할거 다이가. 니 잘 알아봐리. 대출이랑 뭐 보증보험 되는지랑 하고. 뭔지 알제? 그거 등기부등본을 니가 뗄 수 있거든. 그거 떼 가지고 주변에 좀 볼 줄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뭐 근저당이니 이런 거 다 확인해 보고 계약해야 된다.”
“이 집은 그럼 그거 다 알아보고 구한 거가? 여긴 얼만데?”
“전세로 2억 3천. 미쳤제. 그냥 구축 빌라 투룸인데 말이 되나 이게. 여기 인테리어도 싹 돼 있긴 했는데 가구랑 이런거는 아예 없어서 다 사야 됐었거든. 니도 웬만한거는 다 중고로 그냥 사뿌면 되고.”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생 미술 시간에 흰 종이 위에 여러 색 크레파스를 칠해 놓은 뒤 그 위를 검은 크레파스로 전부 덮어 이쑤시개로 긁어내기 직전에 누군가와 내 종이가 바뀌어서 색의 대중을 전혀 모른 채로 일단 이쑤시개로 뭔가를 긁고는 있지만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당장 검은 크레파스를 긁어낸 뒤 알게 되는 눈앞의 색에 놀라기만 하는 것이었다. 난 이쑤시개를 든 채 친구의 이야기만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친구의 집에 머무는 일이 친구에게 기분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대한 칭찬을 해주고 싶었지만 딱히 포인트를 찾아내진 못했다. 그리고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자 친구는 이번에 진급하여 나왔다며 과장의 직함이 찍힌 새 명함을 내밀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대표이사의 부정부터 회장의 청탁 등 내부 정치에 관한 회사 이야기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이 회사 답도 없다. 회장 아들한테 경영권 준다고 거기 밀어주는데 그 라인 실적 다 말아먹고 지금 회사 휘청휘청한다. 좀 있으면 대표가 뇌물수수로 잡혀갈 건데 회사 내부적으로는 다 알고 있거든. 조만간 뉴스에도 나올 기라.”
나는 모르는 회사의 내부 이야기에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아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친구는 전에 줬던 명함은 버리라고 했다. 명함이 새로 나오면 이전 명함은 무가치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자 조금 서글퍼졌다. 나는 친구에게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거나 이직을 생각해 본 적 있냐고 물으며 친구의 오른쪽 눈을 흘깃 쳐다보았다. 내 대답이 친구의 예상을 넘었던지 친구는 이 집을 구함에 있어 회사가 무이자로 대출해 준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는 부럽다고 말하며 물을 마셔도 되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런 건 안 물어봐도 좋다고 했다. 나는 그러면 물어봐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물어보려다 말았다. 문득 어느 영화감독이 등장인물의 성격을 묘사할 때 ‘화장을 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센 여자’라고 쓴 글이 생각났다. 짙은 화장일수록 지우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혼자 꽤 괜찮은 구절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