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이다. 이혼 전에는 적당한 주말에 시간을 내어 부모님을 찾아뵙고 양가에 동일한 예산으로 정해진 예산만큼 식사를 하거나 용돈을 드렸겠지만, 이혼 후의 어버이날의 모습은 조금, 아니 많이 달라진다. 동생네와 시간에 맞춰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부모님과 나, 그리고 동생네 5명이서 식사를 한다.
둘이 가지 못하고 혼자 가는 게 죄송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하나뿐인 손주를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 한창 조잘조잘 말을 잘하는 이쁜 손주를 데리고 가지 못하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공주가 어렸을 때에는 아빠랑 단 둘이 부모님 댁에도 갔었지만, 머리가 조금 크니 주관이 뚜렷해져서 이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5명만 모인다.
식당 다른 테이블에 있는 누군가가 보면 장가 안 간 첫째 아들과 장가 간 둘째 아들 내외가 식사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갔다 온 형과 장가 간 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딱히 불편함은 없다. 나는.
하지만 부모님의 말에서는 애잔함이 묻어져 나온다.
"오랜만에 왔네? 잘 지냈어?"라는 엄마의 말에서 혼자 사는 아들이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을까, 혼자서 힘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묻어져 나온다. 그리고 매번 이어지는 다음 대사.
"요새는 밥 어떻게 먹니?"
요리보다는 조리에 능숙한 내가 사실 혼자서 잘 챙겨 먹을 리 없다. 다행히 회사에서 점심과 저녁까지 먹고 오니까 그나마 편하게 살지 그도 아니었으면 '먹고사는' 문제가 꽤나 힘들게 했을 것이다.
걱정을 안 끼치려는 뒤늦은 효도를 하려는 아들은 "회사에서 밥 잘 나와서 잘 먹고살아"라고 이야기하지만, 회사 밥이 가끔은 물리기도 하고, 가끔은 귀찮아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한다. 그럴 땐 당연히 살이 빠지고 부모님은 그걸 보시고는 왜 이리 살이 빠졌냐고 걱정을 하시기도 한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도 아직도 먹는 걱정을 시키다니, 참 죄송스럽다.
남자는 결혼하고 나면 효자가 된다고 했던가. 남 말인 줄만 알았지만 나도 그런 편이었다. 총각 때는 나 먹고살기 바빴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장남 노릇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물론 장인, 장모님께도 잘하려고 했다. 부부간에 행복하고 동시에 양가 부모님과도 잘 지내는 이상적인 그림을 그렸었다.
그렇다고 나의 효도를 전 사람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장인, 장모님께 잘하면 그 사람도 따라서 잘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 1주일에 한 번쯤은 장모님께 전화도 먼저 드리고 이런저런 안부도 물었다. 그분들이 그녀를 키우면서 생각했을지 모르는 잘나고 훌륭한 사위는 못되더라도 착한 사위가 되고 싶었다. 해드릴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장인, 장모님께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려 했었다.
그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인자한 어머니와 깐깐한 며느리는 다른 집처럼 큰 고부갈등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더 큰 효도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냥 갈등이 없고, 가끔 보면서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 정도면 만족했다.
그렇게 결혼 중에 부모님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괜찮았다.
공주가 태어나고 나서 엄마가 집에 와서 아이를 같이 봐주셨다. 우리는 계속 주말부부였고, 나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있으니, 엄마가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집에 와서 같이 아이를 봐주셨다. 그동안 큰 문제가 없는 고부사이이기에 아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으로 나를 낳아준 여자와 나와 결혼한 여자, 그리고 나를 닮은 공주, 세 여자가 잘 지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이 거처를 옮겨서 새로운 사람과 함께 사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나도 회사 동료와 며칠 동안 같이 산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신경 쓰일 일이 너무 많았다. 이런 나도 그런데, 엄마와 그녀는 어떠했을까.
아무리 공주가 이쁘지만, 그건 공주를 바라볼 때이고, 공주를 제외한 다른 생활에서는 조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둘은 친구도 아니고, 고부관계이기에 어느 정도 존경과 배려가 필요한 관계였다.
전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건 '분업'이었다. 가정에서도 5:5로 정확하게 나누어 분업하는 걸 좋아했다.
그랬다. 엄마의 육아는 아들의 부재에 대한 분업을 대신하는 일이었다. 감사함보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그녀는 엄마와 살았다.
엄마는 전 사람과 있었던 일을 나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추운 겨울날 밤늦게 2시간씩 걸려서 서울에서 화성까지 내려가실 때에도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격주마다 주말에는 일도 하셨다. 그렇게 1년을 사셨다.
시어머니는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엄마가 느끼는 고생을 그녀는 느낄 수 없었다. 나 대신 고생을 하셔야 하는, 그녀가 훗날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아들을 잘 못 나은 죄'를 지고 계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아이를 보러 갈 때에는 아빠는 아빠대로 집에서 혼자 계시면서 그렇게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서 나는 돈을 벌고, 엄마는 공주를 보고, 아빠는 홀로 독수공방을 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존경과 감사보다는 '아들을 잘 못 나은 죄를 지은 부모'라는 가십거리뿐이었다.
할머니, 할어버지가 되어서도 이렇게 걱정을 시키고 있었다. 참 죄송스러웠다.
이렇게 사는 이유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지만, 사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그 사람과 내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마음이 달랐고, 효도에 대한 개념이 달랐으며, 분업에 대한 개념도 달랐다. 그러다 보니 서로 부모님에 대한 동상이몽이 생겼다. 그냥 부부간의 갈등이면 괜찮은데 여기에 혈육이 섞이면 더더욱 복잡해지기 마련. 그렇게 뒤늦게 효자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은 답답해지기만 했다.
그냥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효도인걸 알지만, 그 평범함이 너무나도 어려운 내 인생이다. 그래서 이혼 후에는 더 열심히 효도를 하며 산다. 여행도 보내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면서.
"나중에 커서 효도할게. 이것 좀 사주세요"라고 이야기하던 코찔찔이 소년은 결국 커서 효도를 못하고는 이렇게 죄송스러운 마음만 가지고 산다.
더 늙으시기 전에 맛있는 거 많이 사드리고 좋은 구경 많이 시켜드려야겠다. 더 이상 걱정 안 끼쳐드리도록, 그리고 못난 아들이지만 적어도 낳고 키우신 보람은 느끼시도록.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