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추억은 방울방울
이혼하고 나서 가끔 고통이 찾아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 내가 꿈꿔왔던 가정생활을 이뤄내지 못해서
2. 자녀에게 평범한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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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결혼생활동안 아름다운 추억이 살아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연애를 했기에, 신혼이라는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기에, 많이 싸우고 고통스러웠어도 그래도 결혼생활을 잘해보려고 발버둥 치며 좋은 추억을 만들려고 노력했었기에.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 그리고 삶의 과정 소에서 생기는 좋은 추억들이 아직 기억 속에 살아있기에.
사람은 싫어도 추억을 미워할 수는 없다. 아무리 지금 그 사람이 변했다고 해도 변하지 않던 시절의 그 사람과의 좋은 추억은 무시할 수 없다.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고 한 켠에 저장되어 있는 추억. 괜히 꺼내 들면 마음만 아플 뿐인지라 고이고이 묻어두고 있다. 일부러 먼지가 쌓이도록, 그래서 잘 보이지 않도록.
그런데 가끔 마음속에 바람이 부는 날에는 그 위에 있는 먼지들이 날려서 그 추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후회도 미련도 아닌 그 무언가의 감정이 마음속에 드는 날이 있다. 처음 그 감정이 찾아왔을 때는 힘들었다. 이혼을 괜히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지만 이는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무의식이 만들어낸 착각이라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고, 저 뒤에 고이고이 다시 묻어둔다. 아주 저만치 뒤에.
5월에 한강에서 돗자리를 피고 마시는 맥주는 참 좋은 추억이다. 모기가 없지만 저녁에 술을 먹을 수 있는 적당한 날씨는 아마 5월일 테니까.
한 여름에는 속초해수욕장보다 고성에 있는 해수욕장이 더 좋다. 물은 더 깨끗하고 사람은 없으니까.
막걸리는 느린 마을 양조장에서 마시는 막걸리가 참 맛있다.
이태리에 가면 피렌체에 가서 보는 노을이 그 어느 노을보다도 아름답다.
나이키 아울렛은 이천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득템확률이 제일 좋다.
더 많을 수도, 더 적을 수도 있지만 대략 이런 추억들이 아직 살아있다. 이렇게 적어두고 가만 살펴보니 가만히 집에서 있었던 것은 없고, 어딘가 나가서 무언가 행동을 하면서 생긴 추억들이 살아있다. 뭐 집에서든 밖에서든 이렇게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같이 하며 쌓인 추억들은 아직 살아있다.
이 중에 몇은 꽤나 오래도록 남고, 또 몇은 먼지에 쌓여서 사라지고 말겠지.
일부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 살아있는 추억들. 그냥 고이고이 간직해 두어야지. 그래도 나중에 공주가 물어보면 한때는 엄마와 아빠가 사랑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줘야 하니까. 그래야 공주도 엄마와 아빠가 그래도 사랑으로 본인을 낳았다는 것을 이해할 테니까.
어딘가를 가서 특별한 일을 하면서 만드는 추억 말고, 집에서 소소한 추억을 만드는 결혼생활은 어떨까? 소소하게 보내는 순간들이 옅게 새겨지다가 자국이 되고, 그 자국이 오래도록 남아서 그 추억이 일상의 정이 되어서 그 힘으로 함께 나아가는 삶.
내 추억을 돌아보니 다 어디 나가서 관계 외적으로 환경을 통해서 얻은 추억들이 많다. 일상적인 추억도 물론 있었겠지만 빈도수가 적다 보니 잊혔거나 후반부의 안 좋은 추억들이 잡아먹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고, 안 잡아먹히려고 노력해 봤자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혼자 있는 이 시간, 그리고 가끔 보는 공주와의 시간 앞으로는 어떤 추억을 만들고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야 할까? 꼭 어딘가를 가지 않아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노력의 순간들. 나와 공주가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대화와 교감이 그 추억의 기반이 되겠지.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해 창조하는 평일을 살아내고,
공주와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추억을 창조하는 주말을 만들어내야겠지.
공주가 커가면서, 기억력이 좋아진다. 다이나믹한 활동을 좋아하는 공주는 아빠가 태워주는 인간 바이킹을 제일 좋아하고, 아빠가 안아주는 게 아직은 좋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공주와 열심히 놀아야겠다.
추억은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는 것을 알았고, 생각보다 추억의 힘은 강력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알기에. 나도 우리 부모님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이 나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셨던 노력들이 결국 추억이라는 것을 만들고, 아직 존경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