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과 입학식
어느 2월 엑스에게 연락이 왔다.
"공주 어린이집 옮겼어. 입학식 올 수 있어?"
휴가를 내면 갈 수는 있겠지만, 새로 옮기는 어린이집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지만 반은 일부러, 반은 휴가 내기 애매한 마음에 이야기한다.
"아니 못 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공주의 입학식에 가지 못했다.
아니 사실 가지 않았다.
이혼은 했지만, 그래도 가장 사랑하는 하나뿐인 공주의 입학식에 나는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을까?
나는 나쁜 아빠일까?
쓸데없는 곳에서 이혼한 티를 내려했던 것일까?
아니면 전 사람에게 적당한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이혼남의 의무감이 만들어 낸 멘트일까?
셋 다 맞을 수도, 셋 다 틀릴 수도 있다.
사실 난 나쁜 아빠가 맞을지도 모른다.
착한 아빠였다면 이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주만 생각해서 착하게 그리고 또 착하게 아무리 전 사람과 맞지 않는다고 해도 참아내고 해결했겠지. 하지만 결국 참아내지 못했고,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이혼남이 되었고, 엑스는 이혼녀가 되었으며, 공주는 한부모가정의 자녀가 되었다.
나의 감정은 선과 악, 좋음과 나쁨으로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함 속에서 힘들게 내린 결정이었지만, 공주의 입장에서 좋은 아빠는 아니다. 그러니 결국 나쁜 아빠다. 아무리 보통 아빠가 되려고 해도 소용없다.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만 있는 세상이고, '보통'이라는 것은 그냥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억지로 생각하는 것일 테니까.
다른 아빠들처럼 매일 퇴근하고 재미있게 놀아주지도 못하고, 매 주말마다 좋은 곳에 데리고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체험하도록 하지도 못하니까.
참 나쁘다. 공주가 애기였을 때는 이 죄책감이 덜했다. 하지만 공주가 걷게 되고, 말을 알아듣고, '인간'으로서 대화가 되기 시작하니 이 죄책감이 커진다. 그래서 나쁜 아빠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쓸데없는데서 이혼한 티를 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아이 때문이라도 전 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편하지 않다. 함께 보내는 순간, 공주가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다고 좋아하는 순간엔 머리가 복잡해진다.
공주를 생각하면 이혼을 했다는 게 후회스럽고,
나를 생각하면 이혼을 하는 게 잘했을 테니까.
공주는 엄마 아빠의 이 은밀한(?) 사실을 모르기에, 더더욱 이런 감정이 든다. '게다가' 어쩌면 정상적인 가정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전 사람의 욕심이 굳이 나를 부른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더욱 이혼한 티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 보면 치졸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사람에게 구속되지 않으려는 발악이기도 하다.
굳이 어린이집 입학식까지 부모가 모두 갈 필요는 없기도 하기에. 나도 엑스도 이혼이라는 현실을 체감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혼남의 이상한 의무감이 나도 모르게 그런 멘트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이혼남의 의무감'이라고 하니 참 이상하지만, 이혼해 보니 그런 게 있다.
너무 정상적인 가정처럼 보이는 것이 이상하고,
엑스의 요구사항을 모두 다 들어주는 것은 그 시절의 무모한 희생이 생각나서 싫다.
이혼이 만들어낸 '아집'이라는 것이 생겨버렸다.
앞으로도 공주의 입학식, 졸업식은 몇 번 있을 것이다. 어린이집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는 무시할 수 없겠지.
그때는 아마도 이번 어린이집처럼 나쁜 아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생이 인정하는 선에서 최대한 참석해야겠지. 다른 부모들 앞에서는 이혼 안 한 것처럼 정상적으로 사진을 찍으며 그날을 보낼지도 모른다.
'남들을 의식한 쓸데없는 연기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한 현실에서 그런 의식을 굳이 가지고 살 필요가 있을까?
없다.
물론 나의 초, 중, 고등학교 입학식과 졸업식에 아버지가 오셨던 적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 시절과 앞으로는 더더욱 다를 터. 아빠가 오지 않는 것이 과거엔 정상이었지만 미래에는 비정상적이고 무언가 의문점을 자아내는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공주의 새로운 시작, 그리고 공주의 그간의 마무리를 기념하고 축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공주가 4년 후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 그리고 6년 후, 3년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는 지금보다 더더욱 아빠들이 많이 참석할 것이다.
그래서, 아니 그래도 열심히 가야겠다.
평소에 함께하지는 못하더라도 특별한 날에 함께하는 아빠는 기억에 오래 남기 마련이니까. 다른 아빠들이 내 시선에 보일 때, 내 아빠가 없는 느낌은 생각보다 섭섭하니까.
그 시절 내가 섭섭했으니까. 당연히 날 닮은 공주도 섭섭함을 느낄 것이기에.
원망받는 아빠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앞으로의 입학식과 졸업식은 모두 참석해야겠다. 가서 공주의 시작을 응원하고 마무리를 축하하면서 추억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나쁜 아빠는 아니겠지.
이혼한 티를 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초보 이혼러는 아니겠지.
이혼남의 의무감 따위는 벗어버린 자유로운 내가 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