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호수의 도시에서, 한 달 소회
시간이 정말 살처럼 간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나 하던 시절도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돌아서면 한 달, 돌아서면 반년이 지나있고 올해는 석 달도 채 안 남았다.
벌써 이곳에 온 지도 한 달. 표를 최대 체류 기한인 90일 일정으로 끊긴 했지만 안 맞다 싶으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니은님이 너무 아쉬워해서 나 한 달 만에 올 수도 있는데 이렇게 아쉬워하시면 민망해서 못 와요, 웃기도 했었다.
그래서 한 달을 지내본 소감은 어떠한가 하면, 좋다. 아주 좋다. 돌아가고 싶은 생각 전혀 없음. As good as it gets.
그건 아무래도 내가 여행하듯 살고 살면서 여행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솔뫼와 오사카에서 지낼 때도 이런 얘길 많이 했는데, 내가 여기서 일을 하거나 학교를 다니는 거였으면 이렇게 좋지만은 않았을 거다.
주언어가 아닌 언어를 써야 하는 게 고단했을 테고, 낯선 문화, 관습, 언어, 사고방식의 차이가 비단 흥미롭게만 느껴졌을 리 없다. 줄창 여행만 했어도 금세 지쳤으리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건 저체력 저효율 집순이에겐 무리이고 좋은 풍경도 연달아 보면 무감해지게 마련이니까.
솔뫼가 출근하는 평일에 글 쓰고 주말에 함께 여행하는 지금의 패턴은, 여기선 가까운 마트만 가도 나한텐 여행이니까,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집순이인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맞춤하다.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게 재미있고 생경한 풍경들을 보며 환기도 충전도 된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미처 몰랐던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쑥 돋아난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새로운 나’의 아름다움과 추함, 옳고 그름을 떠나 그걸 발견하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의미가 있다. 나 자신과 조금 더 가깝고 친밀해지고, 그래서 내가 나를 미워할 수도 진절머리 낼 수도 있겠지만은, 그리하여 나는 조금 더 내가 될 것이므로.
그래서일까.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느낌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엔 조금도 관심이 없던 내가, 이렇게 먼 데까지 올 일은 없을 줄 알았던 내가 어찌 보면 갑작스럽게 뜬금없이 날아온 것인데도. 틀리지 않았다고, 인생에서 옳고 그름 따위는 없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나는 여기 있어야 했다고. 이런 확신이 드는 이유를 늦된 나는 또 나중에서야 깨닫겠지만. 순행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짧지 않은 습작기를 보내는 동안 나는 생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연습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익히게 된 것이 있다면 삶에 순응하며 흘러가는 법이다. 몸과 마음에 힘을 빼고 흘러가지는 대로 흘러가 닿는 것. 의지를 과하게 발휘하지 않고 고집부리지도 않고 최선을 다하되 안 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하려 하지 않는 것. 되어질 것이 되어질 것이니, 바라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것.
완전히 다 익히진 못했지만 순행할 때의 감각은 조금 깨쳤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저 막막하지만,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 있다. 따뜻한 무언가가 나를 감싸고 있고 나는 그 빛을 향해 흘러가는 중이고,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조용히 흘러가는 것뿐임을 나는 이제 조금은 안다.
꼭 한 달을 기념해서는 아니지만, 바질을 들였다. 바질, 고수 같은 향채를 좋아해서 곧잘 먹는데 마트에서 바질 화분 파는 걸 본 거다. 이걸 들이면 매번 살 필요 없이 신선한 바질을 먹을 수 있어! 둘 다 좋다 했지만 바로 사진 못하고 고민을 좀 했다.
식물 잘 키우는 사람을 녹색손이라고들 하던데 나와 솔뫼는 정확히 그 반대 부류이기 때문이다(적색손이라고 해야 하려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동네에서 알아주는 녹색손의 딸로 태어나 집안이든 집밖이든 나만의 정원을 꾸미고 싶은 꿈을 꾸며 자랐으나 공들여 키운 화초들을 줄줄이 떠나보내고 다시는 식물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친 바질은 아주 작았고 어쩌면 그래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요 작은 거 하나 못 살릴까. 그런 호기로움이 있었고 찾아보니 바질은 키우는 난이도 하, 물과 햇볕만 잘 쬐어주면 된다고 해서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이름도 붙였다. 마질. 마이 바질이어서 마질.
크레파스와 스케치북도 새로 샀다. 장대한 풍경을 보고 와서인지 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래봐야 8절지 크기도 안 되지만. 처음 샀던 스케치북 종이가 너무 얇아서 좀 더 두꺼운 걸 사고 싶었는데 마트를 몇 군데 돌아봐도 얇은 종이뿐이다. 마음에 썩 차진 않지만 적당한 크기가 있어 그걸로 샀다. 크레파스는 무려 64색. 36색 색연필을 샀는데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 녹색 계열의 색연필이 몇 개나 되는데도 내가 바라는 연두색은 없다든지 하는. 통 크게 64색으로 골랐다. 차마 128색은 집어들지 못했지만. 이걸 얼마나 쓸까 하는 고민은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그림도 계속 꾸준히 그리고 있어서. 쓰는 일만큼이나 열심이다.
글은 생각보다 많이 쓰고 있다. 작업을 할 계획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은 아니었다. 놀멍쉬멍 쓸 작정이었는데, 여행 산문은 아예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나 쓸까 싶었고. 여기서는 조금씩 끄적이는 정도? 시간 나면 발레 수업 듣고 랭귀지 익스체인지 같은 걸 하려고 발레복에 슈즈에 타이즈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왔더랬다. 하지만 쓰는 것만큼이나 쓰지 않기도 쉽지 않고 쓰고 안 쓰고가 내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어서 쓴다. 쓰고 있다. 있어야 할 곳에 있듯이 해야 할 것을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이렇게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