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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26. 2023

19. 스몰톡의 나라에 온 내향인의 기쁨과 슬픔

나는 수줍음 많고 낯을 가리는 내향인이다. 사람들과 있을 때보다는 혼자 있을 때 충전이 되는 성향인데다 싫은 거 많고 가리는 것 많은 까탈스런 성정 탓에 사교 활동을 그닥 즐기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거나 여러 사람과 친해지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소수의 사람들과 깊이 사귀는 걸 좋아하고 깊이 없고 밀도 없는 관계에는 흥미가 안 생긴다. 낯선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는 경우가 드물고 누군가와 친해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안 하던 짓 해보는 시기’를 맞아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내 생각에 이런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고 기본 모드는 바뀌지 않는 듯하다. 사람 잘 안 바뀌니까. 천성 거스르기 쉽잖고. 


당연히 낯선 사람과 스몰톡하는 것도 안 좋아한다. 모르는 사람과 신상 정보 나누는 것도 달갑잖고 뻔한 주제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힘들다. 말 그대로 힘이 든다. 그냥 잡담하는 건데 뭐가 힘든가? 묻는다면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대화들. 날씨.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죠. 워터 이즈 웻, 지구는 둥글고요. 


직업. 백수입니다. 오, 백수! 부럽다, 좋겠어. 나도 일 좀 쉬고 싶다. 일 관두기 전엔 뭐 했어요? 회사? 무슨 회사? 아니, 회사원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거든요. 생각보단 오래 일했네요? 돈 많이 줬나 봐?


취미는 뭐예요? 춤추는 거 좋아해요. 오, 춤? 무슨 춤? 그거 개그맨이 추던 거? 얼마나 췄어요? 오래 췄네? 의외다. 아, 이미지랑 달라서. 그런 건 어디서 배워요? 동호회, 학원? 근데 춤 동호회 같은 건 좀 그렇더라. 안 좋은 말들도 많고.


여행은 좀 다녀요? 좋아합니다. 어디가 좋았어요? 아, 거긴 별로던데. 거기 갈 바엔 저기 가지. 저기가 훨씬 나아. 가깝고 물가도 싸고. 에이, 거긴 너무 멀어. 내가 바빠서 시간을 길게 못 빼거든.


좋아하는 음식, 떡볶이 쫄면 김말이. 떼잉, 그런 거 말고 밥을 먹어야지. 


싫어하는 음식, 아직은 없습니다. 홍어 같은 것도 먹어요? 에이, 그럼 없는 거 아니네. 먹어볼 기회가 없었을 뿐인데……라고 말해도 상대한텐 안 들림.


드라마 그거 봤어요? 못 봤어요? 안 봐요? 왜? 그거 되게 재밌는데. 테레비를 잘 안 봐? 특이하네, 젊은 사람이. 테레비도 안 보고 무슨 낙으로 살아요? 


책을 보지만…… 인제 그렇게 답을 하면 무슨 책 읽냐, 작가 누구 좋아하냐, 나도 예전엔 책 좋아하고 많이 읽었는데 요샌 눈 아프고 힘들어서 유튜브, 넷플릭스나 본다, 추천해 줄 만한 책 있냐? 로 대화가 이어지고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은 당연히 있고! 많고! 넘쳐나고! 책 추천도 좋아하지만! 나는 이왕이면 그냥 추천해주는 거 말고 그 사람의 취향과 관심사에 맞는 걸 추천해주고 싶단 말이다.


그러자면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이런저런 대화를 또 해야 하는데 생각만으로도 벌써 기력이 딸리고 그럼 무난한 책 두어 권 말해주면 될 일인데 또 그렇게 성의 없고 싶진 않아서(스몰톡이라고요, 스몰톡! 이 답답한 사람아!) 책 좋아한단 말은 꺼내지도 않게 되는 결말. 무엇보다 추천해도…… 안 보실 거잖아요.


결혼은 했어? 아니오. 주의: 아직도 이런 질문하는 사람이 있음. 


연애는? 안 해요. 주의: 이런 질문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음.  


왜 연애를 안 해요? 주의: 아직도 이런 질문하는 사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아니, 연애를 안 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안 하니까 안 하는 거고 그냥 안 하는 거겠죠. 설사 이유가 있더라도 이유를 붙이지 않는 게 좋다. 말 길어지고 길어진 말은 듣기 싫은 말, 들어봤자 짜증나는 말일 가능성이 다분해서. 경험상 수줍은 듯 웃으며 어물쩍 넘기는 게 최고. 


한창 좋을 땐데 연애하고 시집가야지. 요즘 여자들은 시집 안 가고 애도 안 낳을래서 큰일이야. 왜…… 큰일이죠? 는 무난한 사회생활을 위해(나도 이런 거 할 수는 있단 말이지!) 묵음 처리.


힘들고 고생하는 거 싫다고 그럼 안 되지. 왜…… 안 돼요?도 당연히 묵음 처리해야 함. 


이기적이잖아. 나라가 망해간다는데. 그럼…… 안 되나요?는 대꾸할 에너지가 바닥나 하고 싶어도 못함. 


실제로 이 정도까지의 파국은 없었지만 이제껏 겪었던 괴로운 스몰톡들을 종합해보면 대략 이런 느낌이다. 


스몰톡이라 하면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 친해질 수 있는 가볍고 격식 없는 대화를 이를진대 이런 걸 대화라고 주고받고 있노라면 1차 이 사람은 이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가 의문스럽고, 2차 정말 궁금한 거면 대체 그게 왜 궁금한가, 안 궁금하면 안 궁금한데 왜 물어보는가 이해가 안 되고, 3차 어쨌거나 친교 활동이라는 건 이런 요소를 어느 정도 포함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더라도(처음 만난 사람과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 사회의 핵심 현안이나 대일 관계의 문제점을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가 누워있지 않고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회의감이 든다. 


그 결과 어색함은 짙어지고 상대와 절대 친해지고 싶지 않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는 마음만 강렬해지곤 한다. 누구나 언제나 그렇다는 건 아니고 사람 따라, 비율로 치면 열에 한두 번, 아니 서너 번, 아니 너댓 번, 여튼 대다수는 아닌,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탈탈 털어 쓴 거지만(물론 이걸 한 사람이 다 해낼 수도 있습니다) 열에 아홉 번 기분 좋은 대화를 했다가도 한 번 이런 대화를 하고 나면 예민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내상을 입고 스몰톡의 시옷 자만 들어도 지쳐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나라 눈만 마주쳐도 인사를 한다는, 처음 만난 상대에게도 안부를 묻는다는 스몰톡의 나라에 오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라는 걸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1세계 사람으로 살다보면 처음 만난 사람한테도 막 안녕, 반가워, 너 오늘 어땠어, 물어볼 수 있지. 그런 거지. 화내는 것보담은 낫잖아? 


그렇게 솔트레이크시티에 떨어진 나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환하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안녕, 반가워, 넌 오늘 어땠어? 물어보게 되는데…… 나도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자고 일어났더니 1세계 사람?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고(깨어나 보니 재벌 3세, 이런 것도 아니고) 내 성향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오는 동안 자외선에 과다 노출 혹은 처음 경험해보는 위도와 경도의 변화로 성격이 180도 바뀌어버린 것도 당연히 아니고 나는 여전히 난데, 너무 나라서 수줍음 많고 낯가리고 까탈스럽고 예민하고 편협하긴 마찬가진데 어째서, 1세계 사람들이나 할 안녕, 반가워, 너 오늘 어땠어?를 하고 있는 것인지. 당황스럽고. 


트레일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안녕, 하는 것까진 좋다 이거야. 그건 산 타는 사람들끼리 응원 겸 인사 주고받는 거고 한국에서도 많이들 하니까(난 안 하지만).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감자튀김 들고 탄 이웃에게 이제 저녁 먹어? 저녁이 늦네, 이런 소린 왜 하는지, 지쳐 보이는 이에게 오늘 힘들었는지는 왜 묻는지(보면 모르냐고), 아이들에겐 왜 꼬박꼬박 알은체를 하며 안녕 어린이들, 안녕 아가들, 안녕 꼬마 숙녀, 안녕 꼬마 신사, 하며 귀찮게 말을 걸어대는지. 



그래도 아이들한테 인사를 하는 건 명쾌한 이유를 댈 수 있다. 조카들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나를 몹시 사랑하는 조카들은 내 세계를 넓혀준 일등공신들인데 나는 이들로 인하여 아기라는 존재, 어린이라는 세상, 조건 없는 사랑, 인류의 미래, 지구의 나중 같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런 고민의 결과로 바뀐 것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이들에게 환대의 마음을 가능한 한 전해주려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를 보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도 새침하게 곁눈질이나 했는데 이제는 눈이 마주치면 웃고 장난도 치고 반갑다고 손도 살랑살랑 흔든다. 별 거 아니지만, 나도 이런 행위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너를 환영한다고, 나뿐만 아니라 세상이 너를 반기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그거 말고 나머지 경우는…… 모르겠다. 그냥 요새 내가 마음이 편해서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진 않았잖아. 안 해본 짓 하는 시기이기 때문인가? 한국 돌아가서도 계속 이렇게 할까?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얼레벌레 따라하게 되는 건가? 그런 성격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하기엔 적극적이잖아. 그러게, 참 이상해. 나도 신기하다니까. 나에게 이런 모습이? 어째서, 왜! 사람 참 모르는 거야, 그치. 


트레일을 걷는 동안 솔뫼와 고민해 보았지만 답은 안 나왔고 답은 모르겠지만 이런 내가 솔뫼는 웃겨죽겠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웃으세요, 너무 좋아요, 또 다른 포즈! 같은 멘트를 날리며 사진을 찍어드리고 오는 나를 솔뫼가 멀찍이 떨어져 앉아 낯설다는 듯 바라보았고 나도 내가 낯설긴 해서 뭐 어떡해, 사진은 찍어드려야지,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왜 이럴까?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며 걸었던 길은 윌로우 레이크 트레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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