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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Oct 25. 2023

18. 병을 버리러 리버티 파크로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해 솔뫼의 집에 와 보니 싱크대 위에 맥주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니, 웬 술병들이야!


놀랄 수밖에. 나도 그렇고 솔뫼도 그렇고 술을 못 마신다. 둘 다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머리가 아프고 탈이 나는 체질이라 술은 입에도 안 댄다. 그간 알아온 솔뫼는 그랬다. 그랬던 솔뫼가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술을 즐기게 되었단다. 정확히 말하면 논알콜 맥주. 알콜 함유량이 1%도 안 되는, 보통 음료에도 그 정도는 들어있을 수 있다는 미미한 수치지만, 그래서 술 마시는 사람들은 술로도 안 쳐준다지만 그래도 맥주는 맥주, 알콜은 알콜.  


그 맛도 없는 거를 왜 마시는 거야, 세상에 맛있는 게 쌔고 쌨는데!


라고 하면 인제 전국의 술꾼들에게 사회적 지탄을 받고 에버노트에 자필 사과문을 올려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은 술에 대한 나의 솔찍헌 감상은 이러하다.

건강에 안 좋고 어쩌고를 떠나, 맛이 없다. 맥주는 비리고 소주는 쓰고 막걸리는 쿰쿰하다.


신선한, 깔끔한, 시원한, 가벼운, 우렁이쌀 햅쌀 빨간쌀 알밤 땅콩 고구마 단호박 옥수수 꿀 감귤 한라봉 딸기 블루베리 오미자…… 내가 좋아하는 단어를 아무리 갖다 붙여도 소용없다. 술이 되는 순간 관심도 0, 흥미가 사라진다. 아주 가끔 바에 가서, 아주 아주 가끔 레몬차나 허브차 말고 다른 걸 시켜보고 싶을 때 무알콜에 큰 따옴표 몇 번 쳐서 피나콜라다 겨우 주문하는, 무지한 자의 졸견이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무지한 자도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어 열변을 토했고…….


내 열변의 끝에 솔뫼는 먹다 보면 나름의 맛이 있어, 라고 여유 있게 대꾸했다. 아니, 솔뫼 당신 그새 어른이 되었습니까?


솔뫼의 소중한 무알콜 맥주들 :)


한국에선 법적 기준으로 만 19세 이상, 미국에선 주마다 법이 다르지만 대개 만 18세 이상이면 성인으로 분류된다. 나는 운전을 하고 요리를 잘하며 술을 마시면 어른이라고 본다. 누군가는 어른 되기 참 쉽네, 라고 하겠지만 나는 세 가지 모두 해당 사항 없음, 내 기준에 따르면 나는 미성년, 꼬꼬마 중의 꼬꼬마다. 운전은 차가 무서워 면허도 못 땄고(여기에는 또 A4 한 바닥 정도의 슬픈 사연이 있어) 요리는 잘했음 싶은데 좀체로 늘지가 않고 술은 주당인 엄마 대신 술 한 잔만 마셔도 취해버리는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이다.


내가 못해서 그런지 이걸 잘하는(그냥 어찌어찌 하기만 해도) 사람을 보면 오오, 어른인데! 감탄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어른스러움, 한 사람의 성인됨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으나 내 주관적, 감정적 기준은 그렇다는 거다.


그런 관점에서 솔뫼는 2/3 어른이었다. 0.6666……, 반올림해서 퍼센테이지로 따지면 70% 정도의 어른. 그런데 솔뫼가 나머지 한 가지마저 충족시켜버린 것이다. 3/3=1, 100%. 오오, 어른이다, 어른이야! 솔뫼가 어른이 되고 말았어!


0%의 어른인 나는 조금 충격을 받고 말았고 그 병의 개수에 또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어른이래도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고 가끔 먹는데 버리질 못해 병이 쌓인 것이라 했다.


재활용 봉투에 내놓으면 되지 않애? 우리 동네에서는 금요일 토요일을 제외한 날 일몰 후에 내놓으면 된다. 오래 전에 미국에서는 재활용 하나도 안 하고 음식물 쓰레기고 뭐고 다 섞어 버린다고 들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고 플라스틱, 캔, 종이 정도는 재활용을 한다고 했다(여전히 음식물 쓰레기는 섞어서 버리고 재활용을 안 하는 지역도 있다고).


이 아파트에서도 주말 제외한 저녁 6시 이후 봉투를 묶어 내놓으면 재활용 수거업체에서 가져간다고. 그런데 유리병은 제외란다. 그래서 일반 쓰레기로 내놓아야 하는데 세계 2위 재활용률(수치상으로만 세계 2위다만, 쩝)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온 솔뫼는 차마 병을 내놓지 못하고 쌓아둔 것이었다. 맥주병 말고도 피클병, 올리브병 등이 창고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거 당장 버리자, 라고 말은 했지만 나 또한 세계 2위 재활용률 나라 사람이라 유리병을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으려니 영 껄쩍찌근했다.


유리병만 따로 수거하는 곳이 있긴 하다고 했다. 거기가 어딘데? 리버티 파크. 얼른 병무더기를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주말마다 산 다니고 호수 다니느라 짬이 나질 않았다. 2박 3일의 국립 공원 투어로 9월을 신나게 마무리한 우리는 이번 주말은 좀 쉬기로 했다. 휴식 삼아 리버티 파크로 고고!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리버티 파크는 생각보다 컸다. 규모로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두 번째로 큰 공원이라고. 리버티 파크가 큰 것도 큰 거지만 여기는 뭐든 다 큰 것 같다. 도로도 크고 집도 크고 차도 크고 사람들도 크고 하다못해 마트에서 파는 빵, 과자,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도. 이전에 경험해보았던 외국이 일본이라 자연스럽게 일본과 견주어보게 되는데 일본은 뭐든 다 작은 느낌이었다. 오밀조밀 아기자기 섬세하고 귀여운 느낌.


일본에서는 식당 가면 1인분으로는 부족해서 솔뫼랑 가면 3인분을 시키거나 특대 사이즈로 시켜야 할 때가 많았다. 순전히 우리가 먹보들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어느 식당에 가든 우리가 제일 많이 시키는 손님이었다. 마트에서는 마늘 한 알이 개별 포장된 걸 보고 빵 터진 적도 있다(쏘 가와이데쓰네!). 그때 정말 신기했던 건 바구니 하나 가볍게 들고 사과 한두 알, 라면 한 봉지, 나또 한 팩, 도시락 하나 넣고 계산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외식을 많이 한대도 사과를 왜 저거밖에, 라면 두 봉지는 사야 하는 거 아냐? 도시락 저거 저녁일 텐데 저 쪼끄만 거 하나로 돼? 밥 안 먹으면 세상 끝나는 줄 아는, 너무나도 한국인 먹보스러운 걱정 아닌 걱정을 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나랑 솔뫼는 일단 카트 끌고 입구의 과일, 야채 코너부터 면, 반찬, 고기, 해산물, 견과류, 과자 돌아주고 마지막 튀김, 도시락 코너까지 오면 꼭 필요한 것만 담았는데도 카트 하나가 꽉 차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은 매일 장을 봐서 저렇게 간소한가 봐, 라고 말했는데 우리도 거의 매일 장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역시 우리가 먹보, 라는 결론에 이르른 바 있었다.


여기서도 먹보답게 카트를 가득 채우며 2, 3일에 한 번씩 장을 보고 있지만 일본에서만큼 유난한 느낌은 덜하다. 오히려 과자고 야채고 묶음 하나가 너무 커서 사기 망설여질 때가 많다. 냉장고에 크기별로 진열된 아이스크림이 점점 커지다가 어디 도매상에서나 팔 법한 크기로 놓여 있는 걸 보고 입을 떡 벌리기도 했다. 식당에 가면 1인분이 두 명은 먹을 분량으로 나와 매번 남은 걸 싸가지고 온다. 미니멀리스트의 나라에서 맥시멀리스트의 나라로 온 느낌이고 뭐든 뻥 튀겨놓은 것 같은 크기와 부피에는 여전히 적응 중이다. 그렇게 치면 한국은 딱 중간쯤 되려나.      


유리병 수거함은 북쪽 입구로 들어가면 나오는 트레이시 에이버리Tracy Aviary 서편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수거함을 찾느라 좀 헤맸어서 최대한 상세히 써 보았다. 새 동물원이다. 새 동물원을 찾으면 된다.


수거함은 커다란 컨테이너였는데 유타주의 상징인 델리키트 아치가 그려져 있었다. 유타 지역 예술가가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손그림도 있고 해서 멋진데 병을 넣는 입구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수거함을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모두 같은 높이.



저기에 넣으면 병이 깨지지 않을까? 병이 깨져도 재활용할 수 있나? 의문스러워 다른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하는지 보려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리 직전에 도착한 이가 있는데 주차를 하는 사이 가버려서 어떻게 버리는지 정확히 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병을 입구에 넣고 최대한 살살 떨어뜨렸다. 나는 수거함 내부에 병이 높이 쌓인 지점을 찾아 그나마 좀 나았는데 솔뫼 쪽에선 유리 깨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유리병은 뚜껑까지 곱게 닫아 내놓는 세계 2위 재활용률 나라 사람으로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병을 깨지지 않게 넣을 방법이 없었다.


이것이 최선인가? 의아해하며 병을 다 버리고 떠날 무렵 다른 사람이 왔고 그는 능숙하게 병을 우르르 쏟아버렸다. 와장창창창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고 그는 시원하게 자리를 떴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봐. 불편한 마음이 조금 덜어졌지만 이게 최선인가,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고 나와 솔뫼는 공원을 걸으며 수거함을 왜 저런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진지하게 논의해 보았다.


유리병을 못 꺼내가게 하려고 입구를 저렇게 높이 달았을까?

삐, 아님. 한국의 대형 음식물 쓰레기통 같은 모양의 수거함도 있다고 함.  

미국인들 평균 신장을 고려한 걸까?

삐, 아님. 신장이 커서 손을 뻗어 넣는다 해도 병은 깨질 수밖에 없음.

유리가 깨져도 상관없나? 깨진 유리도 재활용을 해? 한다면 어떻게 하는 거지?

흠, 그건 모르겠네.

아님 저 중에 살아남은 유리만 재활용하나? 우린 강한 자만 취급한다. 약해빠진 놈들은 취급하지 않아, 음핫핫핫!

흠, 그런 건가.



둘이 머리를 맞대봐야 답이 나올 리 없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주고받으며 우리는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작은 호수에는 오리들이 단체로 잠을 자고 있었다. 낮잠 시간인 모양이었다. 한 발로 서서 자는 오리가 있고 주저앉아 자는 오리도 있었다. 우리는 쭈그리고 앉아 왜 누구는 한 발로 서고 누구는 주저앉아 있는지, 왜 오리들은 서서 자는지 추측해보기 시작했다. 한낱 인간인 우리가 오리의 깊은 뜻을 알 리 없었고 자리를 옮기려 할 때쯤 갈매기 두 마리가 내려앉았다. 솔뫼가 유타주의 상징인 캘리포니아 갈매기라고 알려주었다. 여기는 유타주인데 웬 캘리포니아 갈매기? 약간 밀양시 주제가로 부산 갈매기 채택한 느낌이잖아. 정확한 이유까진 모르겠는데 쟤네 성질 되게 나빠. 솔뫼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갈매기들은 평화롭게 자고 있는 오리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꽥꽥 소리를 냈다. 동물들 성질이 암만 나빠도 인간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잠 방해하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갈매기들의 행태가 마뜩찮긴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후기 성도 교인들이 유타 지역 선주민들을 쫓아내고 정착하던 초기 메뚜기떼들 때문에 농사를 망치곤 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날아온 이 갈매기들이 메뚜기떼를 다 먹어치워줬고 그 공으로 유타주의 새가 되었다고. 이거 봐, 먹보들도 세상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고.      


평화로운 오리 호수에 등장한 깡패 갈매기 :)


공원은 도심에 있어서 그런지 여의도 공원 느낌도 나는 것이, 푸르르니 좋았다. 솔뫼는 팬데믹 기간 동안 종종 이곳에 나와 바람을 쐬었다고 했다. 미국에 오자마자 전염병 확산이 심해져 꼬박 2년을 집에서 근무하며 제대로 외출도 못 했던 솔뫼에게 숨구멍이 되어준 곳. 직장 동료도 거의 만나지 못하고 혼자 낯선 곳에서 전염병의 공포까지 겪으며 외로웠을 솔뫼, 호수를 보고 오리를 보고 잔디를 보고 나무를 보며 우울한 마음을 다독였을 솔뫼를 떠올리니 짠하고 안쓰러운 한편 대견하고 대단해 보였다. 솔뫼 너 진짜 어른이다, 멋져. 운전을 하고 요리를 잘하고 술을 마셔서 어른인 게 아니라 힘든 시간을 담담하게 잘 버텨내서, 자기 자신을 잘 보살피고 지켜줘서 어른인 어른. 그게 진짜 어른이지. 그렇게 잘 버틴 덕에 이렇게 이곳에서 만났네. 너도, 나도 정말 수고 많았어. 토닥토닥.


잡은 손을 도닥이며 산책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잔디밭 위에 앉아 책 읽는 사람(쯔쯔가무시!), 놀이터에서 뛰노는 어린애들, 장신구 파는 노점상, 개 훈련사(20분당 20달러!), 노숙인으로 보이는 이들의 텐트와 보금자리들……을 구경하며 한갓지게 걷고 있자니 조금 어색했다.


처음 온 곳이어서가 아니었다. 해 좋은 오후에 등산복 아닌 옷을 입고 경사진 트레일이 아닌 평지의 공원을 느릿느릿 걷고 있는 게 낯설었던 것이다. 그새 주말 트레킹에 익숙해져버리고 만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왠지 모르겠지만 일단 부정하고 싶었다. 솔뫼가 웃으며 너무 산으로만 끌고 다녔냐고 민망해했다. 아냐, 괜찮아. 나도 좋아. 솔뫼는 그럼 내일은 가벼운 코스로 가자고 했고 음…… 나는 방금 한 말을 무를까 잠깐 고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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