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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Nov 09. 2023

28. 미국인들이여, 그대들의 목숨은 몇 개인가

델타 일식 여행 ④ 피넛 버터 버거와 리틀 사하라

일식 여행의 메인 이벤트인 일식 관람을 무사히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솔뫼가 델타의 몇 안 되는 맛집으로 꼽은 애쉬톤 버거Ashton Burger Barn. 여기서는 피넛 버터 버거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피넛…… 버터…… 버거? 


어째 조화로운 듯하면서도 부조화스러웠다. 한국 음식으로 치면 참기름 삼겹살 볶음밥, 고추장아찌만 넣은 고추장 비빔밥 같은 느낌이랄까? 솔뫼는 자기도 처음에는 잉? 했는데 먹어 보니 너무 맛있었단다. 내가 맛있다고 하면 맛없는 음식일 수 있지만 솔뫼가 맛있다고 하는 건 무조건 맛있다. 하긴. 맛있는 거(피넛 버터)에 맛있는 거(햄버거)를 더했으니 맛이 없는 게 이상하겠지? 물론 예외는 언제나 있는 거지만은. 


여행 전부터 피넛 버터 버거 노래를 불렀던(거의 피넛 버터 버거 타령 수준) 솔뫼는 당연히 피넛 버터 버거를, 나는 솔뫼가 하도 맛있다고 하니 얼마나 맛있는데 그러나 싶어 피넛 버터 버거를 주문했다. 피넛 버터 버거 두 개에 어니언링, 제로 콜라. 아주 기본적이고 간단한 주문이었다. 


문제는 우리처럼 일식을 보고 점심을 먹으러 온 사람들이 몹시 많았고 가게는 이렇게 많은 손님들을 받아본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카운터 너머로 부지런히 햄버거를 만드는 점원들이 보였지만 밀려드는 주문량을 감당하기엔 버거워보였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몰려왔고 주문 받는 점원, 번호를 부르는 점원의 외침이 끊임없이 들렸다. 다행히 창가 테이블을 차지해 앉아서 기다릴 수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짜잔, 이것이 미국의 맛! 피넛-버러-버거 :D


한잠 달게 자고 나서야 우리 몫의 버거가 나왔다. 처음 먹어보는 피넛 버터 버거이자 가장 오래 기다려 받은 버거는 예상대로 맛있었다. 기름진 햄버거에 기름진 피넛 버터를 넣다니 과연 미국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하며 먹었다. 육즙이 배어나오는 패티에 꾸덕한 피넛 버터는 조화로운 듯 아닌 듯 어울렸고, 처음 받았을 때는 피넛 버터가 부족하려나 했는데 마지막 한 입까지도 피넛 버터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또 먹고 싶으냐 하면 글쎄, 반반? 먹을 수 있음 먹고 아님 말고 정도? 먹을 때는 맛있었지만 다 먹을 때쯤에는 너무 기름기름한 느낌에 조금 질리기도 했다. 


짧게나마 미국 식문화를 경험해 보고 있는 소견으로는(소견인데 바 소所 아니고 작을 소小다! 나의 작고 하찮은 의견!) 미국은 음식을 만들 때 어떻게 하면 더 기름지게 만들까에 목숨을 거는 것 같다. 햄버거에 패티 한 장? 부족해! 한 장 더 넣어, 두 장 넣어, 세 장 넣어! 야채? 빼고 치즈 넣어, 두 개 넣어, 세 개 넣어! 사이드? 튀김 먹어! 감자, 양파, 콜리플라워, 뭐든 일단 튀겨 튀겨! 칼로리 업 업, 콜레스테롤 수치 올려 올려! 이런 느낌……. 신선 식품이 비싸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육가공품이나 치즈 같은 재료를 더 많이 활용하게 되는 측면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기름지고 느끼한 맛을 추구하는 듯하다. 한국인들이 맵고 짠 걸 좋아해서 모든 음식을 맵고 짜게 만들어보는 것과 비슷한 걸까. 


한국에서도 이걸 먹나 검색해보니 과거 한 버거 프랜차이즈에서 시즌 한정으로 피넛 버터 버거를 출시했던 모양이다. 평은 하나같이 별로였다. 사진을 보니 피넛 버터 소스가 묽고 야채는 없이 흐물흐물한 피클과 패티만 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느끼했고 실제 후기들도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피넛 버터 버거는 시즌이 끝난 후로는 판매되지 않은 듯하고 몇몇 수제 버거집에서 피넛 버터 버거를 팔고 있다. 미국식 기름진 맛을 원하십니까? 한번쯤 드셔보세요. Just Try!      


고지방 고열량 버거로 든든히 배를 채운 우리는 리틀 사하라로 달렸다. ‘리틀 사하라’라는 명칭을 찾아보니 여러 곳이 뜬다. 미국 오클라호마주에도, 오스트레일리아에도, 호주에도 있다(마지막 말은 넝담, 아니, 농담). 우리가 간 곳의 정확한 명칭은 리틀 사하라 국립 휴양지Little Sahara National Recreation Area. 리틀 사하라 샌드 듄Sand Dune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미국 아니랄까봐 여기도 넓었다. 무려 6만 에이커, 총 7천 3백여 평의 모래사막! 리틀이라고 하지만 사하라 사막보다 작아서 리틀이지, 내 눈엔 결코 리틀하지 않았고, 우리는 이중에 화이트 샌드 듄과 샌드마운틴만 둘러보기로 했다. 점심이 생각보다 늦어졌고 아침 일찍 서둘러 나서느라 고단하기도 하니 정말 간단히, 둘러만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모래 언덕을 보는 순간 식곤증도, 피곤한 기운도 싹 달아났다. 그도 그럴 것이 황무지 평원을 달리다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모래 언덕이 뚜둔, 하고 등장한다. 와, 이게 뭐야! 차를 세우고 후다닥 달려 올라가니 온통, 전부, 눈에 보이는 게 다 모래다. 사막이니까 지극히 당연……한 것이겠지만 당연한 걸 처음 보는 나로선 입이 딱 벌어졌다. 방금 전까진 아무것도 없이 황량한 허허벌판이었거든. 그런데 써든리, 언익스펙티들리, 내 눈 앞에 키 세네 배쯤은 되는 모래 언덕이 나타난 거야. 얼마나 신기하겠냐고. 이세계異世界로 떨어지면 이런 기분이려나. 나는 홀린 듯 모래 언덕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원래 고대 보너빌 호수로 흘러들던 시비어강Sevier River이 흐르던 곳인데 호수가 사라지면서 강도 말라버리고 강바닥의 모래들만 남게 되었단다. 시비어 사막Sevier Desert을 가로지르는 남서풍이 이 모래들을 쓸어 모아 모래 산과 언덕들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바람에 따라 천천히 지형이 바뀌고 있다고.


1만 5천 년 전 강물 아래 있었다는 모래는 희고 보드라웠다. 크록스를 벗고 양말도 벗었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들이 곰질곰질 파고들었다. 해 있는 곳을 디디면 따뜻하고 그늘진 곳을 디디면 차가웠다. 이거 완전 천연 모래찜질? 맨발에 와 닿는 모래의 촉감과 온도차가 재미났다. 나는 아무데고 발자국을 내며 걸었다. 바람이 만들어낸 언덕의 굴곡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예술품 같았다. 버기카를 탄 사람들이 자연이 만들어준 굴곡을 따라 부아아앙,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솔뫼는 버기카에 시선이 빼앗겼고 나는 모래 장난에 재미가 들렸다. 손으로 만지작, 발을 꼼지락하다 보니 문득 뒹굴어보고 싶었다. 이 보드라운 모래 언덕에서 데굴데굴 데구루루 굴러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굴러보고 싶지 않은가!


나 여기 굴러볼래! 솔뫼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런 나를 한두 해 본 게 아닌지라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려무나, 하였다. 


처음에는 조금 어설펐다. 겁이 많아서 어설프게 뚱땅뚱땅 굴렀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굴러서 휴대폰 케이스와 화면이 모래투성이가 되었다. 솔뫼가 영상을 찍어줬는데 뚱땅뚱땅 구르고는 신난다고 웃다가 뒤늦게 모래투성이가 된 휴대폰을 발견하고 당황하는 모습이 찍혔다. 오, 마이 폰! 내 억양이 너무 웃겨서 둘이 깔깔대며 웃었다.  


또! 또! 또 구를래! 이번에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굴렀다. 모래투성이가 되어 한바탕 웃고 나니 휴대폰이 없었다. 이번엔 진짜 오, 마이 폰이었다! 휴대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모래고. 당황해 여기저기 더듬거리다 겨우 휴대폰을 발견했다. 휴대폰은 내가 구른 데서 좀 떨어진 쪽 모래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다. 찾은 게 기적이었다. 솔뫼가 휴대폰을 자기에게 맡기라고 했다. 진작에 그럴 걸.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생각을 못 했다. 나도 참 나야. 혀를 끌끌 차며 휴대폰을 솔뫼에게 건네고는 조금 더 경사진 곳으로 향했다. 


이번엔 저기서 굴러볼래! 했더니 솔뫼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안 그래도 왔다 갔다 하는 버기카들이 나를 못 보고 달릴까봐 걱정인데 내가 가리킨 곳은 경사가 좀 더 높고 길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모래 언덕 구르기로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말려봤자 소용없다는 걸 아는 솔뫼는 조심하라고 거듭 부탁했다. 괜찮아, 여기 다 모랜데 뭘. 아까보다 자신 있게 굴렀다. 좀 더 높고 긴 경사를 구르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솔뫼가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몰랐는데 쿵 소리가 났다고 했다. 쿵 소리는 내 귀엔 들리지 않았고 떨어질 때 충격은 좀 있었지만 그래서 더 재밌었다. 여기 완전 짱이야! 



자연 농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가 자연 농원이었다. 바람과 강과 모래가 만들어 준 꿈의 나라 신비의 세계, 꿈의 나라 모험의 세계 리틀 사하라! 나는 진흙탕에서 구르는 강아지들의 심정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번 구른 것뿐인데도 너무 신나, 너무 재밌어! 진탕 놀고 나면 반려 인간들이 알아서 씻겨 주고 말려도 준다. 나는 내가 알아서 씻고 말려야 하기 때문에 그쯤 했다. 솔뫼에게도 굴러보라 했지만 모래투성이가 된 내 몰골을 보아선지 괜찮다며 웃었다.      

 

모래 언덕을 구른 나도, 구르지 않은 솔뫼도 모래 범벅이 되긴 마찬가지여서 샌드마운틴은 진짜 진짜 간단히, 둘러만 보기로 했다. 샌드마운틴에선 내리지도 않았다. 아, 사진 찍느라 잠깐 내렸나? 거기서는 또 다른 이유로 입이 딱 벌어졌는데 깎아지른 모래 절벽에서 버기카와 오토바이, 산악자전거가 번갈아가며 내려오고 있어서였다. 


음…… 아까부터 계속 드는 생각인데 말이야…… 오늘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게 아냐, 미국에 와서 언젠가부터 꾸준히 지속적으로 들었던 생각인데……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미국인들, 혹시 목숨이 한 개가 아니야? 패티 세네 개씩 넣은 햄버거 막 먹고, 느끼한 피자 감자튀김 아침저녁으로 먹고, 런치팩이라고 파는 것도 너무 부실하잖아. 크래커 몇 개, 햄쪼가리 몇 개 넣어놓고 점심이라니. 그게 간식이지, 어떻게 밥이 돼? 


그런 거 먹고선 저기서 저런 거 막 타잖아. 내가 아치스도 가보고 캐년랜즈도 가봤잖아. 막 위험한 길도 막 성큼성큼 가고, 높은 데도 뛰어 올라가고 뛰어 내려가고 그러잖아. 목숨 아홉 개쯤 돼? 구미호야? 아님 미국인들한테만 비밀리에 공급하는 특수 포션 같은 게 있어서 한 번 정도는 죽어도 살려주고 그러는 거 아냐? CIA나 FBI 같은 데서, 아니다, 그런 거는 나사NASA나 미국과학자연맹 같은 데서 하겠구나……. 다른 나라한텐 공개 안 하고 딱 자기네들끼리만 막 살려주는 거지……. 그런 게 아니면, 이거는, 이런 거는…… 설명이 안 돼……. 


헛소리인 줄 알지만, 나도 내가 이상한 소리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경사 좀 봐봐, 70도? 80도? 거의 수직이야! 그것도 흘러내리는 모래 절벽에서 저걸 타고 있다고! 나로서는 여분의 목숨이 주어지지 않는 한(주어진대도 싫다고!) 엄두도 안 날 광경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버기카와 오토바이, 산악자전거가 끊임없이 올라가고 내려왔다. 


미국인들이여...!


위험천만한 행렬을 보며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나와 달리 솔뫼의 눈망울은 초롱초롱 그 자체였다. 저런 것도 해보고 싶니? 응! 안 겁나? 재밌을 거 같아! 그리고 봐봐, 엄청 천천히들 내려오잖아. 솔뫼의 말대로 서로 간격을 유지하며 천천히, 그러니까 정말 안전하지 않은 장소와 조건에서 최대한 안전하도록 애쓰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애라도 안 쓰면 어쩔 건데. 그렇게 안 하면 어쩔 거냐고. 저기서 조금만 삐끗해도 이승과는 바로 안녕, 사요나라, 굿바이겠는데. 


팸플릿에도 실제로 사고로 많이 다치고 죽으니 조심하라고 적혀 있었다. 미국인들 목숨 한 개 아냐, 절대 아냐. 내가 도리질을 치거나 말거나 솔뫼는 다음에 오면 버기카를 빌려서 타보자고 했다. 놉, 다음은 없어. 다음이고 뭐고 절대 못 해. 죽는 건 상관없어. 상관없는데 여기 너무 멀고 시신 인도하려면 복잡해. 돈도 엄청 들 테고, 남은 사람들 고생이야. 우리 엄마 아빠 영어도 못 하는데. 


게다가 바로 안 죽으면 더 큰일이야. 나 이번에 여행자 보험 못 들고 왔잖아. 여기 앰뷸런스만 잘못 타도 수천만 원씩 내야 한다며. 으아, 상상만으로도 무서워. 다치거나 죽는 것보다 더 무서워. 안 돼, 안 돼, 절대 안 될 일이야. 


쓸데없이 상세하게 온갖 상황을 가정하며 나는 목숨 포션이 주어지지 않는 제3세계 국민으로서 이곳에서 버기카는 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내가 이런 결론을 열심히 도출해내는 동안 솔뫼는 무사고 10+@년의 안전 운전으로 나를 무사히 숙소까지 데리고 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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