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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헌 Nov 11. 2023

29. 늦되고 늦된 당신에게

델타 일식 여행 ⑤ 그레이트 베이신 국립 공원


나는 한 나무 앞에 서 있다. 브리슬콘 소나무Bristlecone Pine. Pinus Longaeva라고도 하고 우리말로는 강털 소나무라고 부르는 이 나무는 4천 살쯤 되었다. 


나무는 다른 나무들은, 나무뿐만 아니라 웬만한 풀, 꽃, 동물들조차, 살기 힘든 곳에서 자란다. 고도가 높아 춥고 뜨거운, 10월에도 눈이 내리고 저 앞으로 얼어붙은 골짜기가 보이는 건조하고 척박한 경사로 같은 데서. 나무는 자라는 중에도 많은 물과 양분을 필요로 하지 않아 이런 곳에서 자랄 수 있다. 


나무의 생애는 대략 이러하다. 가을에 작은 씨앗 하나가 떨어진다. 봄이 와 따뜻해지면 발아가 시작된다. 작고 노란 줄기가 거친 땅으로 뿌리를 뻗어내고, 씨앗 껍질을 깨뜨리고 싹이 튼다. 뿌리와 싹을 틔우면 몇 년간은 거의 자라지 않는다. 


어린 나무는 해를 받기 위해 위로 위로 자란다. 이때 나무의 가지는 아주 가늘고 부드럽다. 그래서 바람이 세게 불어도, 눈이 많이 와도 부러지지 않는다. 인과는 역순일 수도 있다. 강풍과 폭설에 상하지 않기 위해 나무는 아주 가늘고 부드러운 가지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과와 무관하게 나무는 계속 계속 자란다. 새로운 가지가 뻗어나고 몸통이 커지고 껍질이 두터워진다. 하지만 그 속도는 여전히 느리다. 100년에 겨우 1인치 남짓. 1인치면 2.5cm, 손가락 한 마디쯤 된다.


수백 년이 되어서야 나무는 완전히 다 자란다. 나뭇가지마다 뾰족한 바늘잎이 다닥다닥 돋았고, 솔방울이 주렁주렁 열린다. 솔방울은 두 가지 모양이다. 원뿔 모양의 솔방울과 작은 바나나 혹은 맛동산 과자 모양으로 뻗어난 솔방울. 원뿔 솔방울은 종자 역할을, 작은 바나나 혹은 맛동산 모양의 솔방울은 꽃가루 역할을 한다. 두 솔방울이 한 나무에 있어 번식이 쉽다. 주변에 다른 나무가 없어도 씨앗을 맺을 수 있다. 



솔잎과 솔방울이 빼곡하게 달린 나뭇가지는 무거워 자꾸만 아래로 휘어진다. 다른 나무들의 가지가 공중에서 뻗어나가는 반면 나무의 가지는 땅 바로 위서부터 자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몸통이라 할 만한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고, 간혹 보이는 몸통은 수천 년 거센 바람의 채찍질로 온통 뒤틀려있다. 


그렇게 나무는 수천 년을 산다. 여름이면 태워버릴 듯한 열기를, 겨울이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를 견디며. 온몸이 뒤틀리도록 맵디매운 바람을, 사지를 냉혹하게 짓누르는 눈더미를 버텨내며. 돌밭이나 다름없는 땅에서 물과 양분을 기어코 빨아들여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다. 열매를 맺고 씨를 뿌린다. 


나무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죽는다. 수피가 상하고 가지와 뿌리가 말라버린다. 하지만 쉬 죽진 않는다. 나무의 뿌리가 한두 개라도 살았으면, 나무를 지탱하는 줄기가 산 가지로 이어져 있기만 하면 나무는 죽지 않는다. 뿌리 하나, 줄기 하나만 살아있어도 살 수 있다. 나무의 일부가 죽어버려도 일부는 살아남을 수 있다. 하여 나무는 살아있다. 절반이 죽어버렸지만 나머지 절반이 수백 년을 더 살아낸 경우도 있었다. 악착같이 살고자 한 절반이 있어 나무는 죽지 않고 살았다. 


느리게 자란 나무는 죽는 것도 느리다. 느리게 자라 느리게 죽을 수 있다. 100년 동안 1인치씩만 크느라 나무는 조밀하고 단단하며 풍부한 송진을 가졌다. 그래서 잘 썩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도, 극심한 가뭄과 한파에도, 병충해에도 대체로 덤덤하다. 


개중에 일찍 죽어버린, 일찍 죽었대도 2천 년은 살았지만 브리슬콘 소나무에게는 요절이라 해도 좋을,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나무는 비교적 수월한 곳에서 싹을 틔웠다. 나무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자랐고, 빠르게 자란 나무는 목질이 부드러워 쉽게 물러버렸다. 


모든 뿌리와 모든 가지가 모조리 말라버린 후에야 나무는 비로소 죽음을 맞이한다. 죽은 후에도 곧바로 쓰러지지 않는다. 울퉁불퉁하고 비틀린, 옹이가 많은 두꺼운 껍질로 뒤덮인 몸통은 쉽사리 썩지 않는다. 죽은 몸을 지탱해낸다. 해서 나무는 죽어서도 수백 년을 서 있는다. 모두 그가 느리게 자란 때문이다.      



이곳, 네바다주의 유일한 국립 공원이라는 그레이트 베이신 국립 공원Great Basin National Park의 나무들은 대부분 3천 년 이상을 살았다고 했다. 5천 살을 바라보는 나무들도 많다고 했다. 아무리 장수해도 한 세기도 넘기기 힘든 인간으로선 헤아리지 못할 시간이다. 그저 그려볼 뿐이다. 그가 지나왔을 혹독한 시간들을. 그럼에도 생의 한 점이 다할 때까지 살아있고자 하는 투지를. 나라면 애진작에 내던지고 꺾어버렸을 어떤 마음들을. 


그려보면. 


그리다 보면.  


나에게도 폭서와 혹한의 계절이 있었다는 것을, 사막과 극지를 지나온 시간이 있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심중 깊은 곳에서 비롯된 열증이 온몸을 붉게 태우고, 된서리가 된 기억들이 첩첩이 쌓여 가장 여린 데서부터 얼어버렸던. 망연하여 어디로도 발을 뗄 수 없던 사막과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한 극지를. 


그때의 나는 마르고 상해 떨어져나가던 나의 부분들을 무심스레 보고 있었다. 보고만 있을 밖에. 달리 무얼 하겠는가. 무얼 해도 소용없고 무얼 더 할 수 있는지도,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속절없이 나는 조금씩 조금씩 죽었다. 느적느적, 매일 죽어나갔다. 


모든 게 느린 나는 상심하는 데도, 아무는 데도 더디기만 했다. 죽는 것도 살아나는 것도 느렸다. 여전히 나의 일부는 죽어 있고 일부는 살아 있다. 일부는 죽고 일부는 살았다면 그것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이제는 살았다 하겠다. 이 나무들을 보고서는 다른 답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때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었던 그 계절과 시간들이 나를 살게 했다는 것을,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한결같이 범약하고 우매하나 그래도 어떤 부분들은 살아 있고 단단하다고. 살아 있고 단단한 부분만큼이나 죽었고 곪아버린 부분도 나라고. 그 모든 총합이 나라는 것을. 곪고 무르고 썩어버린 부분이 있어 마침내 나일 수 있다는 것을. 마침내. 


앞으로도 나는 마르고 상해 떨어져나갈 것이다. 예기치 않게 폭서와 혹한을, 사막과 극지를 맞닥뜨릴 테다. 하릴없이 좌절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환멸스럽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막막할 때에 나는 이 나무들을 떠올릴 것이다. 늦되었기에 더 단단히 뿌리박고 옹근 가지를 뻗어낼 수 있었던, 더 오래 버티고 살아낸 이들을. 끝까지, 완전히 끝장이 나버릴 때까지 끝나지 않고 끝내지 않았던 이들을. 다음에 올 것을 다 알면서도 나아가기를, 살아내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을. 


늦되고 늦된 당신에게, 라는 제목을 썼지만 실은 늦되고 늦된 나에게 하는 말이다. 늦되고 늦된 나와 당신에게, 우리에게. 내가 이들을 잊지 않기로 한 것처럼 부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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