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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Feb 12. 2024

교민화의약정(敎民和議約定)

[신축항쟁 뒷이야기-4]

교민화의약정은 신축년 제주민중항쟁이
진압된 후인 1901년 7월 2일 제주파견
찰리사와 제주목사, 3읍의 현감과 제주
담당 프랑스 선교사가 맺은 약정서이다.

대한국 정부가 우방의 정의를 생각하여 서교(西敎)의 금령을 풀고 외국인을 보호하는데, 섬의 풍속이 어리석고 굼떠, 입교한 자는 분(分) 능히 편안히 하고 교(敎)를 지키지 못하여 자세(藉勢)¹하여 억지를 부리고, 입교치 않은 자는 조정에서 외국인을 보호하는 뜻을 생각지 않고 교당을 질시하여, 서로 원수가 되어 이번의 재화(災禍)를 키웠다. 생각건대, 평민과 교민이 다 같이 대한의 백성(赤子)이니 동포의 정의를 보존함이 마땅하거늘, 한집안 안에서 서로 싸워 언덕에 붙는 불과 같이 가히 끄지 못하겠으니, 어찌 상심치 아니하랴. 이에 대한국 찰리사(察理使)와 제주목사(濟州牧使), 그리고 삼읍(三邑)의 장관이 대법국(大法國)² 선교사와 회동하여 약정을 맺어 백성들로 하여금 미혹치 않게 하여 뒤 폐단을 막으니, 맺은바 조목을 아래에 죽 적는다.    

  

1. 서교는 조정(朝廷)에서 금치 않는 바이니, 백성 된 자는 마땅히 조정의 본의를 삼가 따라 가히 망령되게 헐뜯지 못할지니, 만일 서교를 헐뜯거나 입교한 사람을 능멸하는 자가 있으면 이는 결단코 백성에게 폐해가 되니, 지방관이 규정에 따라 엄금할 일.      


2. 입교 여부는 해당 백성의 자원(自願)을 따를 것이니, 강제로 입교시킴이 불가한지라, 종전에 교도가 세세히 서교 책을 억지로 주는 폐단이 있었으니, 마땅히 교당에서 규정에 따라 엄금하고, 만일 억지로 주는 것을 내친(放) 백성이 관에 고발하는 경우에는 억지로 준 교민을 관에서 거리낌 없이 징치(懲治)하고, 교도로 입교하기를 원한 자도 마땅히 그 인품과 행위를 살펴 입교를 허락할 것이요, 잡된 무리를 함부로 받아 뒤 폐단을 낳게 함이 불가할 일.      


3. 평민과 교민은 똑같이 대한의 인민이요, 민사와 형사는 지방관의 권한에 관계되니, 교당에서 침해함이 없을 일.    

  

4. 교민과 평민이 서로 소송하여 교인이 억울하게 패소함을 선교사가 분명히 안 경우에는 마땅히 지방관에게 설명하여 각별히 사실을 조사하여 공론에 따라(從公) 결정하여 조처할 일.    

 

5. 종전에 교민이 교당에 한 번 들어가면 관장(官長)과 서로 겨루고 엄연히 법사(法司)³로 자처하여 평민을 수색하여 붙잡아 형벌하고 가둠을 임의로 하니, 공정하지 않고 법에 어긋남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니, 이후로 만일 이러한 악습이 있거든 지방관이 붙잡아 와 엄히 다스리고, 교당에서도 해당 교민을 교회에서 내쫓아 비호치 못할 일.      


6. 종전에 교민이 남의 전토를 빼앗고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남의 처첩을 빼앗으며 허채(虛債)⁴를 억지로 바치고, 잡세(雜稅)를 함부로 거두는 허다한 폐단을 가히 말로 다 하지 못하여, 평민의 절골지원(折骨之怨)⁵이 되었으니, 이후로 만일 이런 폐풍(弊風)이 다시 있거든 지방관이 붙잡아 와 엄히 다스리고, 교당에서도 해당 교민을 교회에서 쫓아내 비호치 못할 일.  

    

7. 교민이나 평민이나 죄가 있는 자가 교당에 도피하거든 해당 지방관이 한편으로 선교사에게 설명하고, 한편으로 차사(差使)⁶를 보내 수색하여 붙잡되, 교당이 해당 범인을 비호치 못할 일.  

    

8. 지방관이 교민을 조사하여 캐물을 일이 있어 전령으로 수색하여 붙잡거나 혹 불러 대기하라 하는데, 해당 백성이 교(敎)에 들어감을 믿고 즉시 대령치 않거든 원래 죄 외에 배(倍)를 더하여 엄중하게 처단할 일.

    

9. 약정을 맺은 뒤에 평민과 교민이 묵은 불화를 버리고 서로서로 친애하고 화목함을 보존할지니, 만일 혹 다른 무리로 지목하여 서로 관계하지 않거나 혹 이전 일로 원망하는 감정을 품어 능멸하거든 지방관이 문초한 대로(隨問) 엄금하여 각각 그 분(分)을 지키고 생(生)을 편안하게 할 일.   

  

10. 교민으로 해를 입은 자의 수가 매우 많은지라 그 식솔들이 뿔뿔이 흩어져 떠돌아다녀 오히려 돌아와 모이지 못하니, 실로 불쌍하고 가엾은 일이니, 마땅히 각각 그 동(洞)으로 하여금 불러다 타일러 편안히 살게 하여 처소(處所)를 잃지 말게 하고, 편의한 대로 구휼(救恤)하여 이웃 마을의 후의를 도탑게 할 일.  

    

11. 이번에 약정을 맺은 뒤에 각 촌(村)의 사리(事理)를 아는 백성은 스스로 약정을 따라 어김이 없으려니와, 무지한 상사람(小民)은 문자를 알지 못하여 혹 약정을 어기고 화목을 해칠 염려가 있으니, 약정문을 한문과 한글로 베껴 읍과 촌에 내걸고 각 해당 이강(里綱)⁷으로 하여금 일일이 알아듣도록 타일러 조약을 일부러 범하여 스스로 죄에 빠짐이 없게 할 일.    

  

12.이 약정문을 6건을 필사하여 각 관과 선교사가 서명하고 날인하여 1건은 외부(外部)⁸에 보내고, 4건은 1목(牧)과 3군(郡)에 비치하고, 1건은 교당에 비치하여 영구히 신빙함을 밝힐 일.  

   

*이 교민화의협정(敎民和議約定)의 한문 원문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 <뮈텔 문서>⁹로 보관되어 있다.   

1901년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드망즈(안세화) 주교 일행이 전도 여행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사
1950년대 서귀포성당 주변의 모습

<옮긴 이 註>

¹자세(藉勢)-어떤 권력이나 세력 또는 특수한 조건을 믿고 세도를 부림.

²대법국(大法國)-프랑스를 외교적으로 높여 부름.

³법사(法司)-법을 다스리는 형조 관리.

⁴허채(虛債)-가짜 빚.

⁵절골지원(折骨之怨)-뼈가 부서지는 듯한 원한.

⁶차사(差使)-원이 죄인(罪人)을 잡으러 보내는 하인(下人)

⁷이강(里綱)-현재 이장에 해당하는 직책.

⁸외부(外部)-외무아문(外務衙門)의 후신(後身)으로 고종(高宗) 32년(1895년)에 새로 만듦.

⁹뮈텔 문서(Mutel文書)

「뮈텔 문서」는 프랑스 랑그르(Langres) 주 출신인 뮈텔이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1877년부터 1933년 1월 선종한 때까지 모두 57년 동안에 모은 문서이지만, 그중에서도 신부로 조선에 입국한 1880년∼1885년과 주교로 재입국한 1891년∼1933년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이 문서들을 교회 내 • 외의 문서로 구분하여 연도별로 정리한 뒤 한지에 포장하여 100여 개의 종이상자에 보관하였다.  

「뮈텔 문서」는 원래 서울교구청 안의 주교집무실에 보관되어 있다가 그의 사후에 개인 유품들과 함께 명동대성당 지하실로 옮겨져 보관됨으로써 한국전쟁 때에도 손상을 면할 수 있었다. 1964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설립된 후 서울교구청에 있던 각종 문서와 자료들이 연구소로 이관되었다. 이관된 자료들은 이원순 교수가 1966년 여름부터 정리 작업을 맡았는데, 그 과정에서 ‘뮈텔 주교가 수집한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이원순 교수는 연구소의 최석우 소장 신부와 협의 끝에 이 자료를 「뮈텔 문서」라고 명명하고, 문서의 정리 작업과 활용방안을 논의하였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동양어(한글, 한문, 일본어)로 된 1,287건의 문서를 우선 분류한 후 1969년 이를 학계에 처음으로 보고하였으며, 서양어(프랑스어, 라틴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 된 12,164건의 문서들에 대해서도 1차 분류작업을 완료하였다. 동양어 문서 중에서는 한문 문서가 716건으로 가장 많은데, 대부분 구한말의 교안(敎案) 및 각종 사건들과 관련된 공한(公翰), 사한(私翰), 고목(告目), 공문서, 진정서, 호소문, 통문(通文) 등이다. 서양어 문서 중에는 프랑스어 문서가 9,518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주로 한국인 성직자들이 뮈텔 주교에게 써 보낸 라틴어로 된 연말보고서는 1890년대부터 나타나서 1910년 이후 그 숫자가 급격히 증가된다.     

「뮈텔 문서」 안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각 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보내온 서한 형식으로 된 각종 보고서이며, 그다음으로 1866년의 한불수호조약, 1905년의 '을사늑약' 등 외교문서와 구한말 각지 교안(敎案) 자료 및 교안의 해결과 종교자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1899년 교민조약(敎民條約), 1901년 교민화의약정(敎民和議約定), 1904년 선교조약(宣敎條約) 관련 문서 외에도,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 및 일제 총독부의 지령, 포고문 등이 실린 「독립신문」, 「황성신문」들도 다수 있다.

「뮈텔 문서」는 188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기초가 되는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에 걸치는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 외교, 사회, 문화 등과 관련된 원사료(原史料)로서의 가치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이 문서들은 주교 자신이 직접 쓴 「뮈텔 주교 일기」와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자 원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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