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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Feb 19. 2024

W. F. 샌즈의 '조선 비망록'

[신축항쟁 뒷이야기-5]

조선 말기 때 제주민란 수습에 나섰던 
미국 외교관 W. F. 샌즈(Sands),
그의 제주에 대한 인식은 어땠을까?
그의 <조선 비망록>에서 살펴본다.  

[해제] 일반적으로 한국사에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을 개항기(開港期), 혹은 한말(韓末)이라 일컫는다. 이때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즉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와 일본이 경쟁적으로 조선과 중국대륙으로 진출해 식민지화를 도모하던 시대였다. 이러다 보니 많은 외국인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조선에서 겪고 보고 들은 일을 글로 남겼는데, 그것이 190여 종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한말(韓末) 외국인 중에는 선교사가 가장 많았다. 그다음이 의사, 직업외교관, 탐험가 등이었다. 이들의 글에는 국운이 기울고 있는 조선을 두고서 이권 쟁탈의 우선권을 확보코자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러시아와 미국 및 일본 등의 외교활동에 관한 사실 및 격동의 한국 근대사 현장이 생생하게 묘사된 한편, 당시 풍물에 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이들 저서의 예로는 H. B.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와 F. A 맥켄지의 <대한제국의 비극> 및 W. R. 칼스의 <조선풍물지> 등과 같은 것이다. 또 W. F. 샌즈의 <조선비망록>도 그러하다. 이들 4권의 저서 가운데 제주 여성과 관련된 기록이 나오는 것은 W. F. 샌즈의 <조선 비망록>이 유일하다.     


샌즈(W. F. Sands)는 1874년에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났고, 1898년 조선주차 미국 공사관 1등 서기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1900년에는 공사직을 그만두고 고종 황제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러․일전쟁을 보고 조선의 몰락을 예언해 조선의 중립화를 고종에게 제안한 적도 있었다. 또 1901년 제주도에서 신축민란(辛丑民亂), 즉‘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고종의 부탁을 받고 제주도에 내려 와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샌즈는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과 함께, 미국 공사관이 철수하자 귀국했다. 1910년 이후에는 외교관을 그만두었으나, 국제문제 해결에 계속 관여하는 한편, 1927년부터는 조지타운대학교 외교대학에서 외교학 관련 강의를 맡아 1946년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출강했다. 이러던 중 외교관으로서 조선에서 겪고, 보고 들었던 일을 글로 써 1930년에 <조선 비망록>을 발행했다.  

   

<조선 비망록>은 일본과 조선의 관계, 서울의 외교사절, 영사재판, 황제의 고문관, 대궐 생활과 민속놀이, 조선인의 신뢰성, 여인의 나라 제주도-‘이재수의 난’ 등을 예리하게 관찰했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여인의 나라 제주도-이재수의 난’이라는 항목에 제주 여성에 관한 기록이 상당량 나온다. 이는 샌즈가 1901년에‘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중재해 달라는 고종의 부탁을 받고 제주도에 와서 겪고, 보고 들었던 내용 등이다. 이때 그는 프랑스 선교사를 보호해 준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웅 되뇌르 훈장(Legion of Honor)을 받았듯이,‘이재수의 난’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조선 비망록>의 원본은 국회도서관에도 없으며, 서울대 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 상태로만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희귀본이다. 이 책은 신복룡의 번역으로 집문당에서 1999년에 출간되었다. 제주 역사와 풍물 및 제주 여성 관련 내용은 제11장 여인의 나라 제주도 : 이재수(李在守)의 난에 들어 있다. -제주발전연구원刊 <濟州女性史料集Ⅱ>中

10명의 제주 해녀

<조선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제11장 여인의 나라 제주도 : 이재수의 난¹⁷    

 

이 무렵에 중국에서는 의화단의 난(Boxer Accident)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연합국들은 천진(天津)에서 멀리 떨어져 느긋하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북경에서 의화단에 포위된 공사관 직원들과 선교사들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조선뿐만 아니라 유럽과 서구 국가들에 대한 황제의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기 위한 몸짓으로서 나는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쌀과 담배를 배에 싣고 이들을 연합국 군대에 보낼 수 있는 기선의 사용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반외세의 불똥이 우리 측에 대한 갑작스러운 분노를 부채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혀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예의 주시했다.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지방에서 돌아온 나는 제주도에 무서운 반란의 조짐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톨릭 선교단이 반란군에 의해 억류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고, 기독교인이 학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두 척의 소형 프랑스 군함인 랄투에트호(L'Alouette)와 서프라이스호(La Surprise)가 제물포항에 도착했지만, 중국 측 작전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늦어 즉시 제주도로 출항했다.     

La Suprise 호

조선의 최남단 항구인 부산을 거쳐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다 보면 제주도는 기선 항로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파란색의 거대한 원뿔꼴 화산의 모습을 어렴풋이 드러낸다. (중략) 나는 그러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를 둘러보고 탐험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 기뻤다. 현지어로 제주라고 부르던 이름이 어떻게 퀄파트(Quelpaert)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 중국과 일본의 지도상에는 제주도가 여인의 섬(Island of women)으로 나타나 있다.     


제주도의 고립성 때문에 조정(朝廷)은 제주도를 유배자들의 귀양지로써 이용했다. 제주도는 조정이 다스리지만, 그것은 단지 명목상일 뿐이다. 독립의 전통뿐만 아니라 그곳의 여러 이상한 관습들은 제주도를 다스리기가 어려운 곳으로 만들었다. 세상에서 잊힌 이 외딴곳에서 남자는 열등하게 취급받았고 여인들이 모든 것을 차지했다. 여인들이 실질적인 가장이었고, 모든 재산을 소유했다. 여인의 아이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으며 여인은 결코 한 명의 남편만을 갖지 않았다. 남자들은 1년에 한 번 내륙에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만 오랫동안 머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갈 때는 13세에 이른 모든 소년과 함께 나간다. 단지 소수의 남자만이 중국의 개항장에 사는 외국인들처럼 세 곳의 도시에 살고 있다. 이들과 유배자들이 제주도 전체의 남자 인구의 전부이다.     

여인들은 공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 이것은 모계사회를 능가하는 것이다. 제주도는 실질적으로 여인의 나라인 아마존 사회(Amazon community)이다. 왜냐하면, 여인들은 항상 그들의 권력을 주장할 준비가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힘으로 그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전통이 너무나 강해서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는 그의 아내를 데려오는 것이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남성들이 으레 주장하는 권리로써 관리가 공관인 현지 왕들의 궁전에서 아들을 낳아 제주도 왕조의 왕위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다. 현지인들은 조선의 왕도 원치 않았고 또 조선인들도 제주도의 왕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관습은 조선인들과 제주인 모두를 만족하게 했다.     


유배자들이 제주도를 떠날 수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아마존 사회(Amazon communuty)라 함은 남미의 아마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여인국을 의미한다.     


유배자들은 자유롭고 감시도 받지 않았다. 유배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장소에 살 수 있었고 그들이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제주도 남자들은 사냥꾼이고 어부이며 해안 무역업자들이고 밀수업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바다나 산림지대와 같이 가능한 한 여인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인들에게 토지의 모든 일을 맡겼다. 바위가 많은 화산토는 겨우 기장을 재배하는 정도였으며 평지에 세워진 돌담의 흙은 바구니로 퍼다가 채운 것이었다. 거의 모든 곡식류는 60마일 떨어진 내륙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가져왔고 종종 해안 항구를 따라 막연히 뒤얽힌 해류와 거친 바다 때문에 여행이 1주일이 걸리기도 했다.     

작살을 든 해녀

여인들은 수영과 잠수에 능숙했다.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가끔 암초 때문에 해수면에 떠 있는 박 가까이에 바구니를 띄워 놓은 채 수영을 멈추기도 하며 전복이나 식용 해초 다발을 찾기 위해 다시 깊이 잠수한다. 그들은 그것들을 따기 위해 빈 바구니에 부착해 놓은 작은 낫을 사용한다. 이 낫은 남자들이 괴롭힐 때 무기로도 사용된다. 바구니가 가득 차면 바구니가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매달아 놓았던 돌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바구니를 건져 올려 수면에 떠다닌다. 여인들은 한 시간가량 수영하거나 떠다닐 수 있고 오리처럼 손쉽게 잠수할 수도 있으며 바닷새만큼이나 오랫동안 손쉽게 바닷속에서 이곳저곳으로 일하면서 돌아다닐 수도 있다. 수면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여인들은 고기잡이배에 있는 뜻밖의 남자에게 거리를 유지하도록 경고하기 위해 서로 다른 높낮이의 단조로운 휘파람 소리를 계속해서 불곤 한다.     


일본을 통해 우리 측으로부터 새어 나온 반란에 관한 새로운 소식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제주도를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곳의 관리들과는 연락하지 않은 유형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반란 활동이 제주에서 추방되어 있던 기독교인들을 배척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고, 기독교인들은 두 명의 신부의 지휘 아래 그 도시를 방어하고 있었다. 신부들은 조정의 무기고에서 꺼낸 낡은 무기로 그들 자신과 몇몇의 시민들 그리고 목사의 포졸들을 무장시켰다. 그들은 섬 주민과 반란군 그리고 본토에서 온 산적들로 이루어진 1만여 명 정도의 성난 군중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출발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군함들은 나의 낡은 기선과의 경주에서 이겼지만, 그 차이가 너무나 좁아서 선교사들과 연락하여 몇몇 기독교인들을 배에 태운 것 이상으로 사태를 수습하지는 못했다. 나는 프랑스 해군 고위 사관에게 나의 신분을 밝히고 나의 부하들을 죽음의 도시를 둘러싼 성벽 아래에 있는 그 좁은 해안에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신부들의 연락원이 그 포위를 뚫고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전신소로 가기는 힘들었다. 그 무렵에 굶주림에 떨고 있는 그 도시의 여인들이 자정쯤에 반란군들에게 도시의 성문을 열어 방어자들에 대한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었다. 어떤 총소리나 생명의 신호도 그 성벽 안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도시의 성문은 활짝 열렸고 비좁은 길가에는 시체들로 가득 찼다. 나는 시장에 있는 목사 관저의 문 앞에서 지난 10일 동안 내내 햇볕과 비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참혹하게 잘린 남녀노소 무리가 90명에 이르렀다.     


나는 내가 제주도에 머문 여러 주 동안 너무나 일이 바빠서 제주도를 탐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을 항상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나의 제주도 방문은 아마도 여인의 나라(Amazon) 전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주둔군은 조선이 일본에 병합(倂合)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그 후 제주도는 일본 정부에 의해 요새화되었고 그들의 요새가 있는 곳은 절대 탐험하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만약 선교사들이 제주도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모아 놓지 않는다면 제주도는 여전히 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비스럽게 남아 있을 것이다.


註¹⁷ 이하의 기록은 천주교 역사에서는 신축년(辛丑年) 제주 교난(敎難)이라 하고 역사학에서는 이재수(李在守)의 난이라고 하는 사건이다.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1년 무렵 제주도에는 프랑스 신부 라크루(Larcrouts, 具) 신부와 무세(Mosser, 文) 신부가 포교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상 숭배라는 교리에 따라 마을의 신목(神木)을 베어 버리고 해안 무속이 심한 이 지역의 신당(神堂)을 헐어버리는 등의 작폐를 저질러 원성을 사고 있었다. 이 무렵에 정부로부터 강봉헌(姜鳳憲)이란 오리(汚吏)가 징세관(徵稅官)으로 제주도에 들어와 수탈이 심했는데 이때 천주교도들이 그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프랑스의 세력을 믿는 신부들도 일부 이를 방조함으로써 원성(民怨)을 샀다. 이에 대정(大靜) 군수 채구석(蔡龜錫 1850년-철종 1년~1920 제주인. 1879년에 식년 생원에 합격. 字는 大汝)과 유림의 좌수 오대현(吳大鉉), 강우백(姜遇伯), 그리고 제주 관노(官奴) 이재수 등이 상무사(商務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1901년 5월에 도민을 규합하여 제주읍을 습격하고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천주교도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정부에서는 강화도 수비대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채구석,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를 서울로 압송하여 이들 중 채구석을 징역에 처하고, 나머지 3인을 처형함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이 집단 학살은 그 후 제주도의 정치 문화에 커다란 앙금으로 남았다(高宗實錄 광무(光武) 5년(1901) 10월 9일 자 참조). 이때 필자인 샌즈는 프랑스 선교사를 보호해 준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웅 되뇌르 훈장(Legion of Honor)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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