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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06. 2023

프롤로그

「야월의 한라산」 전문을 찬찬히 읽어본 사람은 제주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에 꼽힐 것이다. 아마도 신축민란이 무어란 말이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러할진대 육지 사람들은 오죽하랴. 「야월의 한라산」은 신축민란의 지도자 이재수의 누이동생 이순옥이 오라버니의 한을 풀기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일본에서 간행한 책이다.


순옥은 오라버니의 의거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재수의 실기>의 간행을 준비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책을 출간할 방법이 없자 그녀는 오사카로 건너가 바느질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돈을 모은 후 제주도 한경면 훈장 출신의 조무빈(趙武彬) 선생을 찾아갔다. 그녀의 구술원고를 다듬은 조무빈 선생은 1931년 오사카에 있는 중도문화당(中島文華堂)에서 <야월의 한라산-이재수의 실기>를 출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야월의 한라산」을 들고 고향에 돌아온 순옥은 사람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며 오빠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려 뛰어다녔다. 이후 평리원 재판을 받고 처형된 오라버니의 유골을 찾으려고 청파동 죄수 묘지를 헤맸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해방 후 순옥은 각고의 노력 끝에, 1961년 대정 홍살문 거리에 이재수를 비롯한 세 장두를 기리는 ’제주대정군삼의사비‘를 세웠다. 그러나 그 비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적이 드문 동네 우물가 '드랫물'에 버려졌다. 천주교 측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7년 마을 청년회가 새로운 삼의사비를 세우면서 그녀가 세웠던 삼의사비는 그 아래 땅속에 묻혔다.


신축제주항쟁의 이름들은 신축민란, 이재수의 난, 신축년 난리, 제주민란, 신축교난 등 제각각이다. 이처럼 정명(正名)이 없이 어지러운 까닭은 제주4·3항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날의 진실은 하나인데 각기 저가 처한 입장에 따라 아전인수로 불러왔기 때문이다.


조무빈 선생에게 전했던 순옥의 메모와 구술은 분명 제주 사투리도 섞였을 것이다. 한경면 낙천리 서당의 훈장이었던 조무빈 선생은 이 들은 바를 조선시대 문체로 옮겼는데, 조선식 문장과 1930년대 개화기 문장을 섞어 쓰고 있다.


"유명무실한 제주목사의 비석은 곳곳마다 세워져 있건만 어찌하여 도탄에 빠진 일반 백성의 원한을 풀고 인정을 펴준 나의 아들의 비석은 없느냐." 이재수 실기에 쓰여 있는 어미의 외침이다. 모슬봉 기슭 공동묘지, 이재수의 어머니 봉분 앞에는 모서리가 둥근 조그만 묘비가 서 있다. 비석 앞면에 ’제주영웅 이재수 모 송씨묘’라 새겼고, 대정골의 안성리·인성리·보성리 세 마을 주민 일동이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하였다.


고향에서는 제주영웅이라 불렸지만 민란의 수괴로 처형된 오빠의 신원을 한평생의 소원으로 삼았던 순옥은 열한 살 조카를 양자로 들여 오라버니의 대를 잇게 했다. 그녀는 새벽에 목욕 재개하여 정화수를 떠놓고 오빠의 넋을 평생 위로했다고 한다.


10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순옥이 바라던 것들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 등 뜻 있는 사람들이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나섰다. 그런 뜻에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야월의 한라산」에 주(註)를 달고 이 귀한 책을 소개하는 것이다.


한편, 허경진 교수는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 재직시절 그가 펴낸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의 한국고서들』에서 「야월의 한라산-이재수 실기」에 관한 평가와 함께 책의 내용을 요약해 설명하고 있다. <이재수 실기>는 1901년 제주도에서 봉세관의 마름 역할을 하며 횡포를 부리던 천주교도에 대항해 일어난 이재수 난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도민항쟁을 이끌었던 주동자 이재수의 한 평생을 기록한 글로, 이재수의 누이동생 이순옥이 오라버니의 한을 풀기 위해 일본에서 간행한 책이다. 이 사건을 교난이나 민란으로 규정하던 종교계나 지배층의 논리가 아니라, 민중의 입장에서 당시의 민중항쟁을 기록해 역사의 이면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글을 발췌하여 아래 싣는다.    


제주도민 항쟁의 전말 기록한 <이재수 실기>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고서들-10

·글-허경진 교수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배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같은 경우는 당대 집권세력에서 지난날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화나 당쟁에서 승리한 쪽이 기록했고, 그래서 뒷날 그 자료들을 인용하거나 평가할 때도 진실을 제대로 찾아내기 위해서는 조심스럽게 행간을 읽어내야만 했다. 민란의 경우는 더욱 그러해서, 홍경래나 진주민란의 경우에도 대부분 승리자의 기록만 빛을 봤다.


이재수(李在守, 1877~1901)는 제주도에서 태어난 하층민이다. 기록에 따라서는 관노(官奴)라고도 했고, 마부나 목자라고도 했다. 그런 신분에서 뛰쳐나와 도민항쟁을 주동하다가 승리하고도 처형당했던 이재수의 한 평생을 기록한 글이 바로 <이재수 실기>다. 실기(實記)라고 이름 붙은 이 책은 물론 정부나 지배층에서 간행한 것이 아니라, 이재수의 누이동생 이순옥이 오라버니의 한을 풀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친 끝에 일본에서 간행한 책이다.


천주교의 횡포에 저항해 항쟁 일으켜

제주도는 예로부터 삼다(三多)와 삼무(三無)의 섬으로 잘 알려졌지만, 삼재(三災)의 섬이기도 했다. 수재(水災)·(한재(旱災)·풍재(風災)가 겹치면 흉년이 이어진다. 논이 없는 제주도에서 흉년에다 관가의 착취까지 겹치면 결국 민란이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어느 한 지역에서 민중의 지도자가 일어나 이의 시정을 관에 요구했다. 이런 궐기는 주로 대정읍에서 많이 일어났는데, 곧이어 장두를 중심으로 한 민중들이 관과 치열한 항쟁에 들어갔으며, 중앙에서 군사를 이끈 관리가 제주도에 들어와 민심을 수습했다. 항쟁 끝에 어느 정도 민중들의 요구가 시행되면 장두가 자수했는데, 장두는 결국 처형됐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다시 민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또 다른 장두가 죽을 각오하고 민중의 지도자로 나서는 것이다.


1901년 이재수가 이끌었던 민란은 예전의 민란과는 성격이 달랐다. 흉년과 무리한 세금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긴 했지만, 안하무인격인 천주교의 횡포가 불을 당겼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시 천주교 신분들은 “여아대”(與我待)라고 쓰고 고종 임금의 옥새까지 찍힌 여권을 갖고 다녔다. ‘나와 같이 대접하라“는 뜻이었으니, 지방 수령들도 꼼짝못했다. 제주도에 들어온 프랑스인 신부들은 제주도민들을 야만인같이 여겼으며, 무기를 지니고 다니다가 제주도민을 협박하거나 사형(私刑)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끝에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항거하던 선비 오신락이 정의교당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민병들이 봉기했으며, 대정군수와 함께 시체 검안에 참여했던 통인 이재수가 ”토멸양인(討滅洋人) 회복주성(恢復州城)“을 내세우고 장두로 나섰던 것이다. 수백 명의 천주교도들은 프랑스인 신부들과 함께 제주성 안으로 들어가 무기고에서 총기들을 탈취해 무장하고 농성했으며, 서진(西陣) 장구 이재수는 대정읍 중심의 민병을 이끌고, 동진(東陣) 장두 오대현과 강우백은 정의읍 중심의 민병을 이끌고 제주성을 에워쌌다. 한 달 남짓 성 안팎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성안 백성들의 궐기로 결국 성문은 열렸으며, 이재수의 지휘에 라 천주교인 수백 명이 처형됐다.


천주교에서는 이 사건을 ’교난‘이라고 불렀으며, 지배층에서는 ’민란‘이라고 불렀다. 이 난이 평정된 뒤, 여러 사람들이 이 난을 자신의 입장에서 기록했다. 우선 지배층의 기록 가운데는 김윤식(1835~1922)이 기록한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가 널리 알려졌다. 그는 1898년에 을미사변¹에 연루돼 제주도에 종신유배 됐다가, 제주도민들의 항쟁을 직접 목격하고 비교적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기록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 만약 김윤식이 그곳에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더더욱 지배층의 논리로만 기록됐을 것이다.


제주도민들은 이재수가 살았던 대정읍 인성리 추사적거지 입구에 삼의사비(三義士碑)를 세워 민중의 지도자 오대현·강우백·이재수의 죽음을 기렸다. 특히 오대현이나 강우백 같은 선비들과 달리 관노 출신이었던 이재수는 지금가지도 제주도 심방의 무가와 민담 속에 살아 있는 민중의 장두로 전승되고 있다.


일본에서 실기(實記)로 간행돼


도민항쟁을 주동하다가 승리하고도 처형당했던 이재수의 한평생을 기록한 글이 바로 <이재수의 실기>. 실기(實記)라고 이름 붙은 이 책은 물론 정부나 지배층에서 간행한 것이 아니라, 이재수의 누이동생 이순옥이 오라버니의 한을 풀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친 끝에 일본에서 간행한 책이다.“


제주도민들의 항쟁은 국제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켜, 프랑스와 일본의 군함까지 제주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간섭했다. 결국 고종이 찰리사 황기연을 보내 윤음을 반포하면서 도민들의 호소를 들어주기로 하자, 이재수를 비롯한 주동인물들이 관덕정에 모여 자수했으며, 만여 명의 민병들도 무기를 내놓고 자수했다. 평리원¹에서 이재수를 민란의 주모자로 몰아 재판한 뒤, 곧이어 교수형이 집행됐다.


제주도민의 한을 풀어준 이재수가 억울하게 죽자, 그의 누이 순옥(順玉)은 오라버니의 억울한 누명을 풀기 위해서 뛰어다녔다. 그러나 곧이어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 당하자, 조선에서는 더 이상 그 억울함을 풀어줄 방법이 없었다. 당시에 제주도를 관할하던 전라남도 도청이나 조선총독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그래서 순옥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남의 집 바느질이라도 해서 자금을 마련해, 오라버니의 실기를 간행하기 위해서였다. 이순옥은 오사카에 살던 제주도 출신의 조무빈(趙武彬)²을 찾아가 우선 조선말로 오라버니의 실기를 지어 달라고 청했다. 조선 사람에게라도 오라버니 죽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심청전> 같은 소설을 즐겨 읽었기에 소설의 영향력을 잘 알았던 것이다.


조무빈은 직업적인 소설가나 문인이 아니었지만, 이순옥에게 설득당해 이재수의 실기를 짓기로 했다. 이 책은 일본 오사카에서 한글 세로쓰기로 조판했으며, 한자를 함께 썼다. <긔자의말(記者之言)>로 머리말을 대신했는데, 조무빈은 자신이 이 책을 짓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쳔주교가 죠선에 들어와 근백년 동안 암암리에서 포교에 진력하야 그 세력은 장차 우리 삼천리강산 구석구석에 까지 미치게 되엿다 이 만일 리의사가 업섯더라면 불국(佛國)의 세력과 교도들의 횡포가 전 죠선에 파급되엿슬 것이다


리의사는 참말 조선사람이며 동양사람이다 종교혁명의 걸인이다 이 책은 긔자 처음 저술한 고로 사실이고 실사인 것은 보증하지요만은 슐자지능(述者之能)이 업기로 문구와 구절이 변변치 못하와 단지 리재수 실기라 명명만 하고 애독(愛讀) 저시(諸氏)의 압헤 올니개 되엿사오니 여러분이여 문구와 구절에 취미(趣味)를 구하시지 말고 이 책의 내용과 리의사의 거사에 취미(趣味)를 구하여 쥬시기를 바란다.“


이 책은 1931년 오사카 중도문화당(中島文華堂에서 <야월(夜月)의 한라산(漢拏山)-일명 리제수실긔(李在守實記))>라는 제목으로 간행됐는데, 1<리제수의 탄생>. 2리조말엽의 정치와 쳔쥬교도의 횡포>. 3<리제수의 거의(擧義)>와 쳔쥬교의 섬멸> 등의 내용으로 집필됐다.


이 책은 제주도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신자들을 ”권리를 조화하고 세력에 붓좃치난³ 향촌(鄕村) 불량(不良) 파락호(破落戶)⁴ 잡류배(雜流輩)“로 묘사했으며, ”국법에 범죄한 무리들도 야- 인제는 되엿다 하고 호상향응하야(互相響應)하야 날날이 교도가 느러갓다“고 했다. 이렇게 천주교도가 늘어가자 제주도는 ”완연한 불란서 제쥬도로 화하고 말엇다.“ 천주교도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결국 도민들과 마찰이 생겼다. ”교도들의 행동은 쳔주교 선교사 구마실 문제만을 빙자하고 량가의 부녀를 능욕하며 금전을 편취할 뿐안이라 교당과 밋 분교소에는 제쥬도 인민에 대하야 민형사(民刑事) 치리권 까지 가지고 사형(私刑)을 임의로 사용하며 교도와 일반민즁 사이에 애자지원(睚眦之怨)⁵이 잇을지라도 교도들은 위력을 확장코저 긔어이 보복수단을 취한 여후에야 말엇섯다 (줄임) 언쟁 끝에 사람을 총살(銃殺)하난등 별별 허다한 일은 일일이 긔록할 수 업다“.


실기(實記)는 조선시대의 문학장르인데, 이 책은 1930년대에 썼으면서도 조선식 문장과 개화기 문장을 아울러 쓰고 있다. ”천연적(天然的)으로 어엽분 꼿은 자연적(自然的) 피여 웃고 어유하(魚游河) 어유하(魚游河)⁶ 저- 맑은 물에 잠잠부부침(潛潛浮復沈)⁷ 금리어(金鯉魚)⁸난 제- 자의긋⁹ 자무락질¹⁰하것만은“ 같은 문장이 바로 그런 예다.


이재수와 1901년 제주도민항쟁은 그 뒤에 제주도 출신의 소설가 현기영이 <변방에 우는 새>(창작과 비평사)라는 제목으로 소설화했으며, 프랑스와 한국 합작으로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재수와 이순옥 남매의 한이, 아니 제주도민들의 한이 백년 뒤에야 풀리게 된 것이다. ▣출처: 허경진 著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의 한국고서들』 웅진북스, 2003


<옮긴이 註>

¹을미사변(乙未事變)-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²조무빈(趙武彬, 1886년∼1952년) 일제강점기 유학자·항일운동가.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제주도 한경면(翰京面) 낙천리(樂泉里)에서 출생하고 훈장을 하였다.

³붓좃치난-붙좇다(존경하거나 섬겨 따르다)의 19세기 표현. 븓좇다(16세기)>븟좇다(18세기)>붓좇다(18세기)>붓좃다(19세기)>붙좇다(20세기~현재)

⁴파락호(破落戶)-행세(行勢)하는 집의 자손(子孫)으로서 난봉이 나서 결딴난 사람

⁵애자지원(睚眦之怨)-눈을 흘겨보는 정도의 원망(怨望), 아주 작은 원망

⁶어유하(魚游河) 어유하(魚游河)-고기가 물 위에서 자유롭게 노는 모양

⁷잠잠부부침(潛潛浮復沈)-물고기가 물 위아래로 헤엄치며 조용히 노니는 모양

⁸금리어(金鯉魚)-금빛 잉어

⁹제- 자의긋=제- (自意)긋-제 마음껏

¹⁰자무락질=무자맥질-물속에서 팔다리를 놀리며 떴다 잠겼다 하는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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