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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Nov 13. 2023

긔자(記者)⁰의 말

-이재수 실긔, 夜月의 한라산

긔자는 저술이니 긔록이니 하여 본 적이 업다. 찌는 듯한 어느 해 여름날이엿다. 삐(B)군은 의자에 안잣다 일어섯다 그리고 또 머리를 끄덕끄덕 하더니 또 흔들흔들 하엿다. 긔자는 이러케 생각하엿다. ‘아- 이 사람이 근간 정신상실이나 되얏나 왼 일인가 참 이상도 하다.’ 하얏다. B군은 또 테불 우에서 무슨 조히¹ 조각을 끌어내더니 한동안이나 침묵한 태도로 잠작고² 무엇을 상상하더니 곳 붓을 잡고 무엇을 줄줄 쓰고 잇다.


긔자(記者)난 무엇을 쓰고 잇나 하고 잠간 겻눈³ 쥬어 보왓다. 그러나 B군은 무엇인지 꼬불꼬불하고 자듸잔⁴ 글을 쓰고 잇다. 이때 긔자는 이러케 생각하엿다. ‘이 사람이 아마 범서(梵書)⁵나 쓰지 안이하는가’고 암상(暗想)⁶하얏다.


‘그러나 범서(梵書)난 남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은 저러케 스지 안이 하난대’ 하고 좀 보여주기를 요구하엿다. B군은 ”이것 말삼이야요?“ 하고 여러 조히¹ 조각을 차례차례로 내여 노왓다.


긔자는 첫머리부터 읽어 보왓다. 그런대 문구난 무엇무엇이라 하엿스나 그 꼬불꼬불한 글짜는 아모리 뜨더 보아도 알 수 업섯다. 그래서 긔자난 이 글짜는 무슨 의미냐고 물엇다. B군은 빙글빙글 우스면서 ”이것이예요? 이것은 서양 글짜인대 현대류행(現代流行) 소설(小說)에는 이런 신식 서양 글자가 잇서야 애독자에 취미(趣味)가 잇슴니다.” 하얏다.


아- 인제 난 알엇다. 현대 류행적(流行的) 소설은 참 그러쿠나. 그러닛가 저- B군은 의자에 안잣다 일어섯다 또 무엇을 상상하다가 머리를 흔들흔들 하얏지. 그래서 소설의 재료를 엇고 또 각본을 세우고 각본을 쓴 다음에 무엇을 생각하느라고 머리를 좀 기웃드림⁷하고 잇다금 테불에 자죠 눈도 준 것이다. 


B군은 평시로부터 편지갓흔 것을 쓸 때이면 올흔손⁸에 붓을 잡고 그젼에 생각하야 가지고 잇난 것 갓치 쳣머리로부터 끝까지 죠금도 붓을 멈츄지 안이하고 줄줄 쓰난대 그러닛가 소설(小說)은 테제(體裁)가 잇고 구죠(構造)가 잇난 법이야. 안이 그- 그런 것도 안이라 련애(戀愛)이니 비극이니 하난 소설은 그림자만 가지고 창작한 것이라 골자(骨子)다운 말은 하나도 업슬 것이다. 긔자난 B군의 집을 떠나 즉시 집으로 돌아왓다. 정자(貞子)는 문을 열면서 “점심진지(點心進支) 안이 잡수랍시오.” 한다.


이때 슌옥녀사(順玉女史)난 손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련(連)해⁹ 쓸며 양산을 외인손¹⁰에 마라죄고¹¹ 들어왓다. 정자(貞子)난 “아- 슌옥(順玉)시 어서 들어오십시오. 심한 더위에 얼마나 고생들 하시오.” 잠작고 안잣던 긔자(記者)난 “아- 슌옥(順玉)시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난 말에 깜짝놀내여 일어서면서 “아- 슌옥(順玉)시- 오날 잘 오섯슴니다. 참 잘 오섯슴니다.” 슌옥녀사(順玉女史) “녜”

긔자(記者) “그런대 나는 오날 저- B군의게 갓섯지요.” 슌옥녀사(順玉女史)난 B군이 누구인지 물론 몰나섯다. 슌옥녀사(順玉女史) “B군이 누구심니가?” 긔자(記者) “압다¹² 저- 경성(京城)집 B군 말삼이예요.” 슌옥녀사(順玉女史) “녜- 그럿슴니가?” 긔자(記者) “B군은 요사의 소설을 저슐(著述)하여요. 그런대 련애(戀愛)이니 비극(悲劇)이니 하는 소설들은 죠고만 그림자(影子)만 잇스면 백 패이지니 이백 페이지니 길다라케 씁듸다. 그리고 가다가 잇다금 엉터리 업난 말도 간혹 쓰난 것 갓해요. 그래서 나는 이러케까지 생각하얏슴니다. 저- B군은 조고만 그림자만 가지고도 길다라케 소설 한 권(卷)을 저술하난대 나는 저- 훌융하고도 사람답고 영자(影子)¹³ 가 안이요 골자(骨子)며 거짓말이 안이요 참말이며 서양말이 안이고 동양말이며 우리 동양 말삼에도 우리 조선 근래 말삼이며 죠선 근래 말삼에도 우리 제쥬도(濟州島) 말삼이며 실적(實跡)이고 참 말삼인 저- 리의사(李義士) 말삼인대...” 


긔자가 이 말을 끝내 맛치지 못함에 슌옥여사(順玉女史)는 만한¹⁴ 수심을 가지고 잇난 듯한 얼골에 좀 깁버히 생각하는 어조로 ”녜- 그럿슴니다. 그러치 안이하야도 하도 억울하고 울화가 나서 전라남도 도청과 죠선총둑부(朝鮮總督府)에 탄원서까지 제출하여 보왓슴니다. 이 무식한 여자의 소견으로난 될수록 리이사(李義士)의 실긔(實記)를 우리 조선 국문으로 쓰엇스면 조흘 줄로 생각합니다.


긔자(記者) “녜- 알엇슴니다. 그런 말삼 들엇슴니다. 그래서 나는 요사의 리이사(李義士) 모사(描寫)를, 실사(實寫)를 꼭 쓰어보려고 함니다.” 긔자(記者)는 이런 문답을 한 이후로 쥬야를 물론하고 이 실긔(實記) 한 권을 만들기에 전력을 다하얏다.


남들은 엇던 것을 탐독하든지 말할 것 업고 우리난 특히 우리 죠선 사람인 이상은 한번 보면 피가 끌어 올을 것이고 이 부패한 현사회(現社會)에 애인이니 졍남(情男)이니 하는 소설이 안이면 그것 볼 것 알 것 업다하고 집어 던지고 뒤도 도라보지도 안이하는 사람의게는 그의 마음을 수양(修養) 식힐 것이오 그의 사상을 굿세게 할 것이다.


애독자 저시(諸氏)¹⁵ 즁에는 물론 이러케 생각하실 분도 만히 잇을가 념녀하와 두어 말 더 쓰나이다. ”리제수(李在守)는 제주 사람이다. 또 그 군사행동도 제쥬에만 국한된 사실인대 전죠선(全朝鮮)에 무슨 그러케 큰 관계(關係)가 잇스리요.” 이러케 생각하는 이가 잇다하면 그는 반다시 오해(誤解)임이다.


쳔주교가 죠선에 들어와 근백년(近百年) 동안 암암리에서 포교(布敎)에 진력하야 그 세력은 장차 우리 삼쳔리강산 구석구석에까지 밋치게 되엿다. 이때 만일 리의사(李義士)가 업섯더라면 불국(佛國)의 세력과 교도들의 횡포가 전죠선(全朝鮮)에 파급되엿슬 것이다. 리의사(李義士)는 참말로 조선사람이며 동양사람이다. 죵교혁명의 걸인(傑人)¹⁶이다.


이 책은 긔자(記者) 처음 저술(著述)인 고(故)로 사실(事實)인 것은 보증(保證)하지요만은 슐자지능(述者之能)¹⁷이 업기로 문구와 구절이 변변치 못하와 단지 리제수실긔(李在守實記)라고 명명만 하고 애독저시(愛讀諸氏)의 압헤 올니개 뙤엿사오니 여러분이여 문구와 구절에 취미(趣味)를 구하시지 말고 이 책의 내용과 리의사(李義士)의 거사(擧事)에 취미를 구하여 쥬시기를 바란다.


일구삼이년(一九三二年) 팔월

긔자 식(記者 識)


<옮긴이 註>

⁰긔자(記者)-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방방곡곡으로 번지자 한경면 낙천리 서당 훈장이었던 조무빈(趙武彬 1886~1952) 선생은 저지리 서당 훈장 박세현(朴世賢)과 낙천리 훈장 김여석(金汝錫), 신촌리 훈장 신계선(愼啓善)과 함께 도민 총궐기를 촉구할 목적으로 격문을 작성하고, 거사에 앞서 고사를 지내고 격문을 붙이다 검거되었다. 그해 10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정사법(政事法) 위반으로 박세현과 김여석은 각각 징역 3년, 조무빈과 신계선은 각각 징역 1년이 선고되었다. 이른바 '기미년 격문사건'이다. 2018년 광복절, 조무빈 선생은 거사 100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았는데, 직계 후손들이 모두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어 제주에 사는 외손녀가 대신 수상했다. 


형을 마친 조무빈 선생은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통항조합(通航組合)을 설립해 제주와 오사카를 오가는 연락선을 운영했다. 또한, 1932년에는 이재수의 누이 이순옥씨와 함께 '이재수실기'를 집필하고 중도문화당(中島文華堂)에서 발간했는데, <긔자의 말>로 머리말을 대신했다. 그러나 일제는 '부정발간'혐의로 이 책의 판매를 금지하기도 했다.


¹조히-‘종이’의 방언(강원, 경북, 전북, 충청)

²잠작고-잠자코(‘잠자는 것처럼 하고’의 준말)

³겻눈-‘곁눈’의 옛말

⁴자듸잔-자디잔

⁵범서(梵書)-산스크리트어

⁶암상(暗想)-곰곰이 생각함

⁷기웃드림-갸웃둥

⁸올흔손-오른손

⁹련(連)해-계속해 

¹⁰외인손-왼손

¹¹마라죄고-말아쥐고 

¹²압다-감탄사 ‘아따’의 옛말

¹³영자(影子)-그림자

¹⁴만한-‘많다’의 옛말

¹⁵저시(諸氏)-여러분

¹⁶걸인(傑人)-뛰어난 사람

¹⁷슐자지능(述者之能)-문장의 잘 되고 못 됨은 쓴 사람의 글재주에 달렸다는 말 


[신축제주항쟁 뒷이야기] 오돌또기⁰ 老聖女

‘夜月 한라산-이재수 누이 회고’

李圭泰 著 <人間博物館 : 맨발記者 南韓縱橫記, 1967 三中堂> 중 발췌 

할머니가 된 이순옥 여사 (1964 조선일보)

-天主를 팔아 놀아난자들

내가 오돌또기(할미꽃)라 불리는 노성녀(老聖女)를 서귀포에서 수소문한 것도 한국 여인이 살아온 하나의 자세를 더듬어 보고 싶은 뜻에서였다. 서귀포 사람들은 거의 이 오돌또기 할멈을 모르고 있었으며 그의 오빠 이재수가 60년 전에 저지른 반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이름을 알고 있었기에 동회를 쫓아다니며 명부를 뒤져보고 바닷가 가까운 구멍가게를 찾아 들었다. 서귀포시 서귀리 665번지¹에 사는 이순옥 씨. 이재수의 누이, 나이는 일흔셋²이었다.


-역사의 현장 관덕정

그 할멈은 전봉준 다음가는 민권 운동의 영웅으로 불리고 또 천주교도 700여³ 명을 학살한 이단의 수괴라고도 불린 성교란(聖敎亂)의 주모자 이재수의 친누이인 것이다. 이 오돌또기는 그 오빠의 그늘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하늘(神)을 우러러본 채 평생 피어있었다.


1901년 제주도에 있어서 천주교는 관권 위에 있었고 신부(神父)는 목사(牧使) 위에 있었다. 신부가 목사의 관아에 구둣발로 들어가도 아무말도 못했으며 한낱 신도가 염전에서 하느님의 뜻을 빙자하여 소금 가마니를 짊어지고 나갔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신흥세력에 아부한 사이비 교도들은 관(官)을 팔아 사세(私稅)를 뜯었다. 교회에다 형틀을 갖다 놓고 사형(私刑)을 가해도 감히 누구 하나 탓할 사람이 없었다. 또 교회당은 그곳에만 숨으면 면죄가 되는 노트르담의 사원이었다.


-이재수의 난이 있을 때의 제주 풍속

이런 일이 있었다. 사이비 신도 하나가 대정(大靜)고을의 한 오름에서 말똥을 줍고 있는 처자에게 눈독을 들였다. 결국 이 처자는 치마를 찢긴 채 마을로 내려왔다. 격분한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성폭행범을 뒤쫓아 갔다. 한데 이 간부는 성당으로 몸을 피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 성당을 둘러싸고 고함만 지르다가 돌아갔다. 성당에만 다니면 그보다 더한 죄도 면죄된다는 것이 통념처럼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3일천하 영웅

이렇게 무법한 세상을 통분히 여기고 있는 사람 가운데 대정 고을의 관노 이재수란 젊은이가 있었다. 한라산에서 성폭행이 있었는지 한 달도 안 되어 이재수의 아버지가 성당꾼들에게 붙잡혀 간 것이다. 사세(私稅)를 내지 않고 하느님이 시킨 성당의 사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성당 앞에 놓인 형틀에 묶이어 주리를 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 너머로 본 이재수는 더이상 분함을 참을 길이 없다.


-지금의 대정읍 인구 17,000명

마침내 학대당한 사람끼리 반천주교의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봉기에 당시 제주 사람이 호응을 하고 의병들이 하루하루 늘어났다.


대정에서 양군(兩軍)으로 나눈 의병은 좌군을 한림을 거쳐 제주로 진군하게 하고 이 장수가 거느린 우군은 서귀포를 거쳐 제주에 이르기로 했다. 이 양군이 제주를 협공하기까지 군사는 수만으로 늘어났다. 제주성을 포위하고 열흘이 지났다. 성안에서는 관군이 농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리한 화총(火銃)으로 무장했기에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한 의군이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성안에 갇힌 제주 사람들은 식량 조달이 안 되어 굶기 시작했다. 도둑이 성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일어났다. 관군은 원병을 기다렸고 프랑스인 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원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성

그것은 부녀자들의 봉기였다. 이 용감한 부녀자들은 관군과 방망이로 싸워 화총을 빼앗아서 성 밖의 의군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많은 피를 흘리며 기어코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 성문을 열려는 의군과 관군의 싸움에서 죽어 간 제주의 부녀자는 수백 명을 헤아렸던 것이다. 입성한 의군은 천주교도를 잡아다 관덕정 앞뜰에서 집단 학살을 했다. 그때 죽은 천주교도는 700¹명을 헤아린다. 이재수의 3일천하는 관군의 원병(援兵)으로 끝났다. 사실 관군의 원병이 없었다 해도 제주 섬에서 못된 짓을 다하는 천주교도들을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거병의 목적을 다했기 때문에 이 성교란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이재수는 관군에게 자신을 잡아가도록 손을 내어밀었다. 이렇게 많은 병사를 이끌고 오지 않아도 손수 찾아 가려했던 참이라고 하면서 끌려갔다. 이때 의군의 밥시중을 하며 제주시까지 따라왔던 누이 오돌또기가 울며불며 오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몸부림치자 이재수는 누이를 달래면서 비장하게 말했다. “너는 죄인의 누이가 아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그릇 섬기는 악한 무리를 무찔렀다고 나를 축복해줄 것이다. 너는 그런 진정한 하느님에게 유명을 달리한 나의 명복을 빌어 달라.”하는 유언을 남기고 침착하게 압송되어 갔다.


-수절하는 두 할미꽃 오돌또기

제주도는 다시 잠잠해졌고 오돌또기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오돌또기는 대역(大逆)을 한 죄인의 누이라는 낙인을 받고 거리로 내쫓기게 되어 문전걸식을 해야만 했다. 오돌또기는 문전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었다. 밥을 주면 대역죄를 동정 한다 해서 화를 입을까 봐 더러는 내어 쫓고 더러는 달래서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도 오돌또기는 틈틈으로 오빠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글로 써보았다. 쓰다 보니 하나의 전기(傳記)가 될 것 같았다. 오빠의 누명을 벗기는 것은 내가 살 길이다라고 굳은 마음을 먹은 다음 그 전기를 들고 서울로 갔다.


열다섯 살 때였다. 오돌또기는 총독부 문 앞에서 사흘 동안을 노숙하며 출판을 허가해 달라고 관계 관리를 귀찮게 졸랐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오돌또기는 그 전기를 들고 일본으로 현해탄⁴을 건너갔다.


머리를 땋아 내린 이 소녀는 도둑차를 타고 또 어떤 때는 애걸해서 공배를 타고는 해서 하면서 돈 한 푼 없이 현해탄을 건너갔다. 오돌또기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⁵ 등 이름있는 일본의 문인들을 찾아가 그 문전에 자면서 출판해 줄 것을 애걸하고 다녔다. 한 소녀의 정성을 저 버릴 수가 없었던 이들 작가 12명은 서로 돈을 추렴해서 소녀의 숙원을 풀어주었다.


야월 한라산(夜月 漢拏山)이란 이 책을 들고 고향에 돌아온 오돌또기는 알 만한 사람에게 이 책을 나누어 주고 다녔다.


시집가라는 것을 끝내 뿌리치고 오빠로부터 학살을 당한 편인 예수 슬하로 귀의한 것은 스물한 살 때였다. 예수꾼을 죽인 이재수 누이가 예수를 믿는다.’는 역설의 배리(背理)⁶속에서, “정녕 오빠는 하나님의 사자이신 거다. 하나님을 팔아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들을 없애려고 보내신 거다. 오빠는 오히려 하나님 편이다“는 기도문을 평생 외었다. 아무리 하느님 편이라도 해도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죄를 굳이 묻고 하찮은 여자의 일생일지라도 그 속죄가 가능하다면 속죄케 해달라고 빌었다. 그녀가 신에게 귀의 한 것도 또 그가 성처녀로서 평생을 살아 낸 것도 그 속죄 때문이었다.


오빠 이재수의 그늘에 또 다른 하나의 엘레지⁷가 있어왔다는 것을 오돌또기가 안 것은 스물다섯 살 때 일이었다. 일적화(一寂花)라면 성교란이 일어날 무렵의 제주 땅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이 만큼 이름 높던 명기였다. 제주 목사가 대정고을을 자주 들렸던 것도 이 일적화를 소유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비록 신분이 관노일 망정 이재수의 인품에 정이 끌려 있던 때라 성교란이 조금만 늦었던들 춘향이의 비극을 겪었을 뻔 했던 것이다. 오돌또기도 이 일적화의 명성이나 그 고운 얼굴과 미끈한 몸매를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바로 그녀가 오빠 이재수와 정을 나누었다는 그 명분으로 수절하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오돌또기는 꿈만 같았다. 오돌또기와 일적화는 외딴 언덕 밑에 움막을 짓고 밭을 일구고 살았다.


외로울 때면 가야금을 튕기면서 고독을 달랬다. 이 두 여인은 정처없이 허황한 천지를 헤매고 있을 오빠와 영혼이 쉬어 갈 조그마한 발판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그들은 대정 고을에다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그 돈을 얻기 위해서 기나긴 구걸 행각을 나섰다.


-파뿌리 백발로도 못다 풀 恨

방에서 자는 날보다는 노숙하는 날이 많았다. 이 두 여인은 제주 400리 길을 걸어서 푼돈을 모았다. 성교란에 죽음을 당한 후손들은 이 두 여인에게 시궁창 물을 끼얹기도 했다. 또 성교란에 가담했다가 가산을 빼앗긴 집 후손들은 구걸해서 짊어지고 다니는 곡물을 빼앗기도 하였다. 이 모진 일들을 속죄로 감수하며 2년 동안을 빌고 다녔다.


들판에서 잘 때의 베개라면서 꺼내어 보이는 것이 누덕누덕해진 성서였다. 이 구걸 도중에 일적화가 병이 들었다. 그녀는 굳이 약을 마다고 했다.


그리고 영주산⁸ 해받이⁹ 좋은 양지를 손수 찾아서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누울 자리를 파서 묻어 달라는 말과 가야금도 함께 묻어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일적화가 약을 마다하고 또 손수 묻힐 자리를 찾아 누운 것은 이미 빌어놓은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오돌또기 노성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가엾은 일적화를 양지에 묻고 나뭇가지를 얻어 십자가를 만들어서 꽂아 준 다음 오돌또기는 구걸 행각을 혼자서 계속했다. 그리하여 제주 각 지방에서는 <오돌또기>란 옛 노래에 새 가사를 붙여 이 가엾은 여인의 맺힌 시름을 읊기까지 되뇌였다.


언제나 한을 다 풀꼬, 오돌또기 할매야!

저승에 가서나 쉴꼬, 오돌또기 할매야!’


오돌또기는 대정 네거리에 오빠 이재수의 비를 세워놓고야 말았다. 비석을 세웠을 때는 이미 그녀의 머리가 희끗희끗 세어있었다.


이 노성녀는 정방 폭포 앞에 보이는 섭섬¹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옛날 저 섬에는 용이 되고자 하는 귀 달린 뱀이 살고 있었다. 용왕에게 정성 드린 공양으로 섭섬에 숨겨둔 여의주 두 개를 찾으면 용이 되리라는 게시를 받았다. 이 섭섬이 원귀가 자기에게 옮은 것 같다고 말했다.


비 오는 날 밤이면 울기 마련인 이 섭섬의 원귀와 같이 비 오는 그 수많은 밤을 울어 살아야 했던 이 노성녀는 오빠의 유골을 찾는 일이 남은 여생에 꼭 해야 할 자기의 일로 여기고 있었다.


형장에서 교수되어 청패묘지¹¹에 다른 두 제주도 민란 주모자와 함께 묻혔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으니 날더러 서울 가거든 청패 죄수묘지를 알아보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서울에 와서 살펴보았더니 청패 죄수묘지는 청파동의 고급 주택이 들어 있는 둔덕이었으며 1930년대에 무연고 분묘로서 처분되고 아무 흔적도 없었다. 아무튼 오돌또기는 섭섬의 원귀처럼 여의주를 못 찾고 지쳐 죽어야 할 것인가!


<필자 註> ‘이재수의 난’을 천주교에서 신축교난(辛丑敎難)이라고 부른다. 양쪽에서 주장하는 이야기는 다르나 프랑스 신부 한 명과 한국인 신부 한 명이 제주도로 파견되어 올 때 이들을 잘 돌봐 주라는 지시가 고종으로부터 제주 목사에게 직접 내려갔었다. 천주교 선교에 힘이 실린 것이다. 민란이 일어났던 그해 1월 제주도의 천주교 신자가 영세신자 250명 예비신자 700명 수준이었다. 지금의 서울 시내 작은 성당만한 교세였다. 그러나 여기에 제주도의 불량배들이 이 천주교에 떼거리로 입교하여 천주교를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린 것이 민란의 폭발을 가져오게 된 주요 동기가 되었다. 세상 물정 몰랐던 조선인 보좌 신부와 프랑스 신부가 이 사실을 제대로 읽지를 못하고 방치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는 중앙정부 파견 감세관과 일방적으로 천주교회 측만 편을 드는 무능한 제주 목사에게 쌓인 원한도 또 다른 민란 폭발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슷한 사건이 반세기 뒤에 제주에서 또 있었다. 제주 4·3폭동도 공산당 색출하라고 내려보낸 평안도 출신 반공 청년단체였던 서북청년단의 극심한 행패도 한몫 했었다, 제주도는 이때나 그때나 외부 영향으로 힘든 재앙을 겪어야 했나 보다. 본문에 제주성 내의 아녀자들이 적극 호응했다고 했는데 다른 역사 기록에는 이들이 잠녀¹²(해녀)들이라고 되어있다. 한국 역사에 여자들이 적극 들고 일어난 민란은 없었는데 제주 민란의 해녀 봉기는 한국 여성사회 발달사에서 주목해 볼 사실이다.


-이재수는 이때 나이 20살이었다.

관노라고 되어있으나 이미 이때는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노비제도가 다 폐지된 뒤였다. 통인¹³이나 마부였다는 말이 있는데 통인(군수의 개인비서)이면서 필요하면 군수가 탄 말의 고비를 잡고 마부로서 수행했을 것이라는 추리가 든다. 그가 지도한 제주 민란은 특징이 있었다. 천주교 자체에 대한 원한보다도 교를 업고 행패를 부려댄 불량배들에 대한 응징이 봉기의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프랑스 신부를 해하지 않은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더해서 불량배 응징을 하자 토벌차 제주에 급파된 강화진대¹⁴ 병사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봉기군을 모두 해산하고 주동자 3명이 모든 책임을 지고 투항한 점이다.


끝까지 저항하거나 육지나 일본으로 도주할만했는데도 이들은 목숨을 포기하고 투항했던 것이다. 이들이 부대 해산과 투항 전 세 명 외에는 아무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교섭한 것도 유념할 대목이다. 기록을 찾아보니 원래의 이재수와 같이 처형된 두 명을 포함한 삼의사의 비가 유지들에 의해서 61년도에 대정읍에 건립되어 있다고 되어있었다. 이 비가 이재수의 여동생 이순옥씨가 세웠을 것으로 생각되어 대정읍 사무소에 문의해보니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앞 본문에 이재수가 제주를 떠나기 전 여동생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했던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너무 사람을 많이 죽인 자책감도 있었겠지만 자기가 떠난 뒤 천주교 신자들에게 당할 가혹한 보복 가능성도 걱정 안 할 수 없는 누이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순옥 씨가 다녔을 서귀포 성당¹⁴에 문의했더니 신부님이 새로 부임한 데다가 사무장 역시 여기에 관한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장두라 불리던 세 명의 주동자들, 이재수와 오을길, 강우백 세 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그해 10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옮긴이 註>

⁰오돌또기-제주민요 ‘오돌또기’에 대해서 명확한 정설은 없다. 제주 방언으로 할미꽃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고, 예쁜 여인이 노는 모습을 일컫는 것이란 주장도 있다.

¹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665-2, 솔동산로에서 서귀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²이순옥은 1897년 대정읍 인성리에서 출생, 1982년 향년 85세로 서귀포시 서귀동에서 타계하였다.

³최근 희생자는 300여 명으로 밝혀졌다.

⁴현해탄(玄海灘))-우리나라와 일본 규슈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大韓海峽, Korea Strait)이다. 과거 일본에서 부르던 겐카이나다(玄海灘)를 우리 한자어로 부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실제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협(對馬海峽)이라고 부르는데, 쓰시마 섬을 사이에 두고 동서 2개의 해협으로 나뉜다. 부산과 쓰시마 섬 사이를 서수로(부산해협), 쓰시마 섬과 규슈 사이를 동수로(쓰시마 해협)라고 부르기도 한다.

⁵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일본의 작가, 평론가, 영문학자로 본명은 긴노스케(金之助)다. 도쿄에서 출생, 도쿄 대학 영문과를 마치고, 1900년 영국에 유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때의 연구가 후년의 대학 강의 ‘문학론’과 ‘문학 평론’이 되었다. 1903년 귀국, 도쿄 대학에서 영문학을 담당했다. 1905년 <호토도기스>에 ‘나는 고양이다’를 연재, 지성과 풍자로서 일약 유명세를 얻었다. 초기에는 풍자적이고 화려한 공상적인 작품을 많이 냈으나, 차츰 현실적이며 자신이 부정하던 자연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나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정의관으로써 인간은 어떻게 하면 이기심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한국과 일본으 물론 서양의 학문에 정통하고, 한시를 쓰며 가요도 작사하여 대중의 호평을 받았다. 그 문하에서 우수한 문학자가 많이 배출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⁶배리(背理)-이치에 맞지 아니함. =Paradox(틀린 것 같으면서도 옳은 의론).

⁷엘레지(elegy)-悲歌, 슬프고 애절한 노래.

⁸영주산(瀛洲山)-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에 위치한 고도 326m의 오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명을 '영모루'라 기록하였다.

⁹해받이-햇빛을 가리기 위한 물건의 하나. (=파라솔, 일산, 양산)

¹⁰섭섬(=섶섬)-서귀포시에서 남서쪽으로 3㎞쯤 떨어진 무인도인데, 각종 상록수와 180여 종의 희귀식물, 450종의 난대식물이 깎아지른 기암괴석과 바위 절벽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이다. 또한, 국내에서 유일하게 넙고사리로 불리는 파초일엽이 자생하는 섬이다.

¹¹청패(靑牌=靑坡=청파역말)-춘향가 중 이 도령이 장원급제하여 남원으로 내닫는 휘몰이 장단에 청파가 나오며(남대문 밖 썩 내달아 칠패, 팔패, 청파, 배다리 지나 애오개를 넘었구나), 보은의 박씨를 입에 문 제비도 마찬가지였다.(저 제비 거동 보소, 보은표 박씨를 입에다 가로 물고 남대문 밖 칠패거리, 팔패 배다리, 청패, 애오개 넘어...) *이 청파역말 언덕에 무연고 죄수 묘지가 있었다.

¹²잠녀(潛女=海女)-실제로는 아래아 발음으로 ‘좀녀’로 부른다. 바다 노동하는 제주 여성을 부르는 점에서 개념 없는 해녀보다 적합한 용어다.

¹³통인(通引)-수령의 신변에서 호소(呼召)·사환(使喚)에 응하던 이속이다. 지방관서와는 달리 중앙에 배속되어 이와 같은 일을 한 자들을 청지기(廳直)라 하였다.

¹⁴강화진대(江華鎭隊)-강화도에 주둔하던 부대.

¹⁵서귀포 성당-이순옥은 천주교가 아니라 개신교에 입교하고 서귀포 제일교회를 다녔다.

¹⁶오을길(吳乙吉)-오대현(吳大鉉)의 이명(異名)이다. 서귀포시 예래동에서 출생하였다. 유림의 좌수로서 보부상을 거느리던 황국협회에 소속된 상무사(尙武社)의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01년(고종 38)에 일어난 제주민란 당시에 서진장두(西陣狀頭)가 되어 동진장두(東陣狀頭) 강우백(姜遇伯)과 함께 민란을 지휘하였다. 제주민란은 반봉건 외세타도의 성격에서 출발하였으나 실제로는 민군과 천주교도 사이의 갈등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프랑스함대와 일본함대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찰리사([察理使) 황기언을 파견하여 이를 진입하였다. 1901년 6월 이재수(李在守)‧강봉헌(姜鳳憲)‧채구석(蔡龜錫) 등과 함께 체포되어 7월 13일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7월 27일부터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10월 9일 최종 판결이 내려져 다음 날인 10월 1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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