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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Dec 25. 2023

이재수 등 삼의사의 상경 담판사실

이재수 실긔, 夜月의 한라산

李在守 等 三義士의 上京 談判事實
-이재수의 손아래 누이 이순옥이 말하고(述), 제주도 한경면 낙천리 서당 훈장 출신 조무빈이 받아 쓰다(記)    

경성(京城)에 올나간 후 법정담판(法庭談判)¹에 근 이개월(二個月)이나 경과하엿스나 결국은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밧게 되엿다. 이때 제수(在守)는 쳔연(天然)²한 태도로 소래를 놉혀 “내가 사형을 밧을 것은 발서 각오(覺悟)하엿섯스나 첫제 유감되는 것은 황제패하(皇帝陛下)께 배옵지 못한 것이오” 그다음 다시 눈을 불읍뜨고 선교사 구마실(具馬瑟)을 갈으치면서 “저런 악마갓흔 놈들을 쥭이지 못한 것이 큰 한(恨)이다.”고 하얏다.     


때에 대내(大內)³에서는 우악(優渥)⁴하신 셩지(聖旨)⁵로 내탕금(內帑金))⁶ 오백원(五百圓)을 하서(下賜)⁷하시와 의장(義葬)⁸하라 하시엿섯다.     


저- 남대문(南大門) 밧 청파역(靑坡驛)말⁹ 뒷산 만리제(萬里재)¹⁰에 의관(衣冠)¹¹한 사람들이 덜퍽¹² 모혀서 쳐량(凄涼)한 눈물로 둥글언 무덤 한나를 죠성(造成)하고 제문(祭文)지어 조상(弔喪)하니 하엿스되,    

 

“오호애재(嗚呼哀哉)¹³ 열열(烈烈) 리의사(李義士)여 웅제장략(雄才壯略)은 일고(一鼓)¹⁴ 벌죄(伐罪)¹⁵에 선우(單于)¹⁶는 둔도(遁逃)¹⁷하고 폭도는 복쥬(伏誅)¹로다. 긔의(起義)¹⁹ 수삭(數朔)²⁰에 위진일도(威振一島)²¹로다. 하서(下賜) 오백금(五百金)은 의송장의(義送葬儀)²²로다. 유지일동(有志一同)은 근장(玆將)²³ 청작(淸酌)²⁴하야 조군슌의(弔君殉義)²⁵하노니 군여유령(君如有靈)²⁶이면 서긔(庶幾)²⁷ 흠향(歆饗)²⁸이어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이후로부터 년년(年年)히 팔월(八月) 삼일(三日)²⁷⁻¹에는 청파(靑坡) 지방인사(地方人士)들은 츄도회(追悼會 )를 열어 일배주(一杯酒)²⁹ 일국(一掬)³⁰의 눈물로 그의 열열(烈烈)한 의긔(義氣)를 추억(追憶)하며, 졍의읍내(旌義邑內)에서도 매년 성대한 추도회(追悼會)를 거행하야 긔념(記念)을 표한다.  

   

제수(在守)의 제매(弟妹)인 리슌옥(李順玉)의 탄원서(歎願書)와 그의 경력(經歷)³¹을 아래에 대강 긔록(記錄)한다.     


<옮긴이 註>

¹법정담판(法庭談判)-세 장두가 옥에 갇혔을 때, 섬나라 온 마을 수백 명의 부녀자들이 제주목관아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찰리사(察理使) 황기연에게 세 장두는 삼읍민을 위하여 의거한 것이니, 봉세관 강봉헌과 창의군의 세 장두를 제주목에서 심판해 주기를 간곡하게 울면서 탄원하였다. 만일 어쩔 수 없이 한성으로 압송해야 한다면, 봉세관 강봉헌 혼자만을 데려가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7월 18일 신축민란의 지도부를 일본에서 임차한 화륜선(火輪船)에 태워 인천으로 데려간 다음, 삼엄한 경비하에 경인철도를 이용해 한성감옥으로 압송했다.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장두는 10월 8일 평리원(平理院) 결심재판이 끝나고, 10월 9일 사형판결이 내려졌다. 그들은 바로 그날 밤 한성감옥에서 서둘러 교수형에 처해졌다.     

신축민란에 대한 평리원(平理院)의 재판관은 법관양성소 교관이었던 프랑스인 그리마시, 프랑스 외방선교회가 파견한 제주성당의 구마실과 문제만 신부, 그리고 서울 약현성당의 정도세 신부, 궁내부 고문관인 미국인 샌즈 등 모두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찰리사의 객관적인 현장보고와는 별도로 민란의 원인을 재심사하였다. 재판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천주교 측의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들인 아전인수식 결론으로 끝이 났다. 민란의 원인 제공자인 봉세관은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무죄방면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아 다시 체포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고향인 평안도로 떠난 뒤였다. 대정현 군수를 지낸 채구석(蔡龜錫)도 세 장두와 함께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그는 그날 밤 교수형 집행을 면제받고 나중에 석방되었다. 교폐의 당사자로 재판을 받아야 할 신부들이 심판관으로 관여하고, 세폐의 원흉인 봉세관을 무죄 석방하는 평리원의 재판이었다. *평리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²쳔연(天然)-시치미를 떼어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다.

³대내(大內)-임금이 거처하는 곳.

⁴우악(優渥)-은혜(恩惠)가 매우 넓고 두터움.

⁵셩지(聖旨)-임금의 뜻.

⁶내탕금(內帑金)-내탕(內帑)에 둔 금이나 돈. 내탕(內帑)은 임금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던 곳.

⁷하서(下賜)-왕이나 국가 원수와 같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금품이나 물건 따위를 줌.

⁸의장(義葬)-장례를 치름.

⁹청파역(靑坡驛)말-청파역말, 지금의 청파대로 1가에 있던 청파역촌(靑坡驛村).

¹⁰만리제(萬里재)-중구 만리동2가에서 마포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세종 때 학자 최만리(崔萬里)가 살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만리현이라고도 하였다. 이 고개는 높고 큰 데다 작은 고개인 애오개가 있으므로 그에 대칭해서 큰고개라고도 한다. 해마다 정월 보름에 이 고개에서 삼문 밖과 애오개 사람들이 돌팔매로 편쌈(석전)을 하는데 삼문 밖 사람들이 이기면 경기도가 풍년이 들고, 애오개가 이기면 8도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용산과 마포 사람들은 애오개 편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¹¹의관(衣冠)-옷과 갓. 남자가 정식으로 갖추어 입는 옷차림.

¹²덜퍽-사람이 힘없이 주저앉거나 눕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¹³오호애재(嗚呼哀哉)-오호 슬프도다.

¹⁴일고(一鼓)-북을 한번 침.

¹⁵벌죄(伐罪)-처벌하다. 죄를 추궁하다.

¹⁶선우(單于)-흉노(匈奴)가 군주(君主)나 추장(酋長)을 높이어 부르던 칭호, 여기서는 불란서 세력을 뜻함.

¹⁷둔도(遁逃)-달아나다.

¹⁸복쥬(伏誅)-형벌을 순순히 받아서 죽음.

¹⁹ 긔의(起義)-의를 일으킴.

²⁰수삭(數朔)-몇 달.

²¹위진일도(威振一島)-온 섬에 위엄을 덜치다.

²²의송장의(義送葬儀-)의인을 보내는 장례.

²³근장(玆將)-이제

²⁴청작(淸酌)-제사에 쓰는 깨끗한 술.

²⁵조군슌의(弔君殉義)-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죽음을 애도함.

²⁶군여유령(君如有靈)-그대가 영혼이 있다면

²⁷서긔(庶幾)-어서, 꼭

²⁷⁻¹팔월(八月) 삼일(三日)-양력 9월 15일

²⁸흠향(歆饗))-神明이 제물을 받음.

²⁹일배주(一杯酒)-한 잔의 술

³⁰일국(一掬)-두 손으로 움켜 쥐는 일.

³¹경력(經歷)-겪어 지내온 일.     


평리원에 대하여

대한제국의 평리원이었던, 현재의 서울시립미술관
대한제국의 평리원이었으며, 일제시대 경성재판소였고, 1995년까지 대한민국의 대법원이었던 건물이다.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이다.

*평리원(平理院)-1899년 5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존치되었던 최고법원이다. 1895년(고종 32년) 3월 25일의 개혁법률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되어 일제에 의해 이른바 근대적 재판소제도가 생기면서 지방재판소·개항장재판소·순회재판소·고등재판소·특별법원의 5종을 두게 되었다. 1899년 5월 30일의 <재판소구성법> 개정에 의해 고등재판소가 개칭되어 평리원이 설치되었다. 종래에 명확한 심급제도(審級制度)가 없었던 점을 시정해 각 지방재판소·한성부재판소·개항장재판소 및 평양재판소를 총괄하는 상소심으로 되었다.

또한 따로 국왕의 특지(特旨)로 하부(下付)된 사건과 칙임관과 주임관의 구금·심판을 관장하고 국사범사건은 법부대신의 지령을 받아 재판하도록 되어 있었다. 판결은 법부대신의 결재를 받아 효력이 발생하였다. 구성원에는 재판장·판사·검사·주사·정리(廷吏)를 두었으며 당시 한성부재판소와 함께 실제로 개설되어 기능하였다.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일본인의 법부와 사법행정 및 재판에 대한 관여와 간섭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1907년 1월에는 1명의 일본인 법무보좌관이 배치되어 재판소의 왕복서류나 일체의 작성서류를 모두 보좌관의 검인을 받도록 하였다. 또 검사의 기소장이나 판사의 판결서에도 그들의 동의인(同意印)을 날인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막대한 실권을 장악해 재판을 좌우했으며 한국인 판검사는 그들의 동의가 없는 한 결정적인 일은 일절 할 수 없게 되었다.


국사범인 의병사건을 다룰 경우에는 일본인과의 마찰 및 의견 충돌이 심하였으며, 한국인으로서 일본인 변호사를 고용한 사건에서는 한국인 당사자를 구류해 고문하기도 하는가 하면, 일본인이 선고한 형량을 황제가 감형해 버리기도 하였다. 개화기 재판제도 중에서 최초의 일반적 상고심이었으나 주체적으로 운용되지 못하고 1907년 12월 23일자로 폐지되고, 대신 대심원(大審院)으로 개편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프랑스 공사 드 플랑시에 대하여

외교관 차림의 빅토르 콜랭 드플랑시
조선 주재 초대 프랑스 공사였던 드플랑시는 10년 넘게 한국에 머물며 뛰어난 감식안으로 유물 수집에 나섰고, 그의 수집품은 후일 프랑스에 한국을 알리는 매개체가 되었다.

제주민란은 1901년 5월 발생했다. 플랑시 프랑스 공사는 제주민란의 주원인을 봉세관의 과도한 징세로 인식했다. 프랑스는 5월 9일을 제주민란의 개시 시점으로 인정했다. 프랑스는 제주민란의 주도자를 대정군수 채구석으로 지목했다. 주한 프랑스공사 플랑시는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에게 채구석을 제주민란의 수괴라고 통보했다. 플랑시는 일본인들이 제주민란과 연관이 있다고 인식했다. 플랑시는 민군이 일본인과 결탁하여 신부들을 공격한 것으로 단정했다. 플랑시는 일본의 개입을 예측했으므로 본국 정부에 제주민란에 대한 더 이상의 개입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프랑스 해군 사령관 포티에는 알루에트호와 쉬르프리즈호를 제주도로 출동시켰다. 쉬르프리즈호와 알루에트호는 5월 30일 전후 제주도에 도착하여 프랑스 신부들을 구출했다. 고종은 정부군을 보냈고 추가 파병을 지시했다. 그러자 플랑시는 고종의 민란 진압에 대한 의지를 인정했다. 프랑스는 치안이 회복되었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알루에트호와 쉬르프리즈호는 6월 3일 제주도를 떠났다.


그러나 제주민란이 종식되지 않자 알루에트호는 6월 9일 제주도에 재차 입항했다. 프랑스는 제주목사에게 민군 지도부를 엄벌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포티에는 6월 13일 민군 지도부가 체포되자 6월 19일 제주민란의 종료를 선언했다.


플랑시는 본국 정부에 유사한 사건이 재발할 경우 즉각적인 군사 개입을 건의했다. 그는 군함을 동원한 포격, 민란 지도부의 처형, 지방 당국으로부터 배상금 회수 등을 제시했다. 그는 프랑스는 군사적 개입으로 대한제국 황실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프랑스는 대한제국의 재판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플랑시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민란 가담자의 명단을 건네주며 신속한 재판을 요구했다. 플랑시는 채구석이 극형에 처해지기를 기대했다. <현광호 고려대 교수의 논문 ‘프랑스의 시각에서 본 1901년 제주민란’의 초록>     


구마슬 신부에 대하여

구마슬(具瑪瑟) 신부

구마슬(具瑪瑟) 신부는 1871년 5월 8일 프랑스의 바욘느(Bayonne) 교구의 보르드(Bordes)에서 태어나 1890년 9월 16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본명은 마르셀 라쿠르(P. Marcal Lacrouts)이고, 구마슬(具瑪瑟)은 그의 한국 이름이다.     


사제로 서품을 받고 1894년 8월 29일 한국 선교를 위해 출발, 한국에 도착하자 조선교구장 뮤텔(민덕효·閔德孝 Mutel, Gustave Charles Marie)주교는 구 신부를 전라도로 파견했다.     

 

구마슬 신부는 전라도 일대에서 5년 동안 선교 활동을 했다. 구마슬 신부는 심산유곡에 성당을 짓기보다는 넓은 곳으로 옮기려 했다. 그래서 수류(水流)에 있는 전주 이진사(李進士)의 재실(齋室)을 매입해 1896년 그 집을 본당으로 개조했다. 후일 구 신부는 후일 전동(殿洞)성당 제2대 담당 신부로서 전주에 성심여학교와 해성海星 여학교를 개설했다.     


1900년에 그는 한국인 신부 김원영과 동행해 제주도에 파견됐다.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구마슬 신부가 1900년 6월 당시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의 후임으로 제주도로 들어왔다고 기록됐다.    

 

당시 제주도의 인구는 15만 명쯤이고 구 신부는 제주 성내와 산남 서홍리에 천주교 선교 본부를 설치, 각 촌락에 공소를 배치해 선교에 진력한 결과 천주교 신자가 많아졌다.  

   

1901년(광무5) 2월 그는 교섭 끝에 유배인 이범주(李範疇)를 석방시켰다.   

  

동년 4월 신축민란이 일어나고 동 5월에 구 신부는 서울에 피정(避靜)을 가고 없었다.     


피정을 마치고 뭇세(Mousset 文濟萬) 신부와 함께 이 섬에 들어왔을 때는 온 섬이 난리로 뒤집히고 제주성은 포위된 상태였다.     


관덕정 광장에서 많은 신도들이 살해되고 프랑스 군함이 도착해 그들을 구했다. 구 신부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로운 전교를 용기로써 확산시켰다.    

 

구 신부는 1909년 신성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서울 성바오로수녀회의 김아나다시와 이공사가 등 두 수녀가 부임해 여성 교육이 활발해지면서 그는 여성 교육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1914년 구 신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활동할 수 없게 되어 1915년 6월 전주全州로 가서 선교 업무를 계속했으며 1929년 8월 11일 사망해 전주에 묻혔다.  <출처 : 제주일보>


김원영 신부와 수신영약(修身靈藥)

*김원영(金元永, 세례명 아우구스티노)신부는 1869년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태어났다. 1882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말레이반도의 페낭 신학교에 유학, 10년 동안 공부했으나 1891년부터 신학생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게 되자 이듬해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편입하였다. 1899년 종현(鐘峴, 현 明洞)성당에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이종국(李鍾國), 홍병철(洪秉喆)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고 이해 5월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함께 제주도에 첫 선교사로 들어가 서귀포 한논(현 西烘里)에 본당을 창설하였다.(김원영 신부는 1901년 5월 사제회의차 서울에 출타 중에 제주신축항쟁이 발발하여 제주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 후 황해도 봉산(鳳山), 함경도 안변(安邊) 등지에서 사목하다가 1904년 경기도 행주(幸州)에 부임하여 성당을 건립하는 한편 1914년부터는 수원 갓등이(현 華城郡 峰潭面 旺林里)본당 주임신부를 겸하면서 갓등이본당에서 운영하던 삼덕학교(三德學校)를 4년제의 신명의숙(新明義塾)으로 개편했고, 1917년 정식으로 행주에서 갓등이로 전임된 후 한층 더 교육사업을 발전시켜 1927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교사수녀들을 초청, 교육을 전담시켰다.


1933년 황해도 신계(新溪)본당으로 전임되어 3년간 사목하다가 1936년 봄 신부피정차 상경하였으나 피정을 마친 후 몸이 쇠약해져 주교관에서 휴양 중 10월 7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수신영약 요약

1899년 제주 지역에 첫발을 내디딘 선교사들은 제주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고, 또한 제주에는 교민촌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현지의 실정에 어두운 조건에서 포교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결혼의 문란함과 무속이 만연되어 있는 제주민의 풍속을 야만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러한 풍속들을 전교에 방해되는 것으로 판단하여 배척하는 데 주력하였다. 김원영 신부는 결국 1900년대 초 천주교 교리에 입각하여 제주도의 여러 풍속을 교정하기 위해 수신영약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수신영약은 제주도에서 행해지던 각종 제례와 미신의 내용을 소개하고,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교회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중에서 수신영약에 소개된 제사들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들이다. 교회가 제주민의 생활 속에 배어 있는 신앙 형태로서의 제사를 모조리 이단으로 배격한다는 것은 문화적 갈등과 충돌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위글은 <신학전망 163호, 2008년>에 실린 문창우 신부(현 제주교구장, 주교)의 논문, ‘기억의 대립과 토착문화 인식-김원영 신부의 수신영약을 중심으로’ 초록 첫머리 글임.


*아래 글은 <제주여성사료집II>에 실린 ‘수신영약(修身靈藥)’ <해제(解題)>와 일부 항(項)의 소개글이다. (옮긴이 註-신축년 제주민중항쟁이 문화와 종교 충돌의 일면이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解題> 수신영약은 1900년 초 제주도 천주교회 제주교당의 김원영 신부가 천주교 교리에 입각하여 제주도의 여러 풍속을 교정하기 위해 작성한 서적이다.

<수신영약>은 제주사람들이 행하던 유교제례와 무속신앙 등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원시유학과 천주교 교리를 동원하여 이론적으로 비판한 호교서적이다.‘修身靈藥’의 의미는 이 글의 끝에 “좋은 육신(肉身)의 교사댁(敎師宅)에 있는 약(藥)만 구청(求請)할 것이 아니라, 영혼(靈魂)의 좋은 약(藥)을 얻어 듣고”라는 문구에서 보듯이, ‘몸을 수양하는 데 필요한 영혼의 명약’, 즉 천주교 교리를 일컫는 것이었다.     


김원영 신부는 제주 선교 초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글 서문에서 그는 제주사람들이 “하느님은 공경치 아니하고 이단사상에 골몰하며”, “성교하려 하는 사람까지 모함하고 훼방하는”일을 안타까워하였다. 앞으로는 제주민들이 “토목(土木)사상과 이단 숭배”를 끊고 천주교를 믿게끔 하려는 것이 이 글을 집필하게 된 주요 의도였다. 그는 이 글의 집필을 위해 제주에 유배와 있던 전 한성판윤 김경하(金經夏)로부터 제주도에 관한 역사책을 얻어서 국한문으로 요약했으며, 조선 포교를 위한 불어판 관습법을 읽기도 하였다. 그는 이 책을 교민들을 위한 강론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점에서 <수신영약>은 당시 제주의 천주교회가 토착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의 가치가 있다. 김원영 신부는 우선 천주교의 교리를 유교이론이나 경전 문구를 인용하여 설명함으로써 유교의례나 관습에 젖어 있던 제주사람들의 천주교 입교를 유도하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전면적으로 유교식 제사를 부정하는 내용이 전개된다.      


이어서 18항(내외유분별), 19항(혼배), 20항(첩을 불취), 21항(주색잡기) 등 4개항이나 할애하여 제주도 결혼 풍속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수신영약>에서 가장 핵심적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제주도의 민간 신앙 및 각종 제사의례를 소개하고 이를 이단으로 규정, 부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런 내용 구성에 비추어 볼 때, 이 글을 통하여 당시 천주교회의 제주도 토착문화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修身靈藥의 일부 발췌 글>

12. 천하만민이 모두 마땅히 성교를 준행할지니라 이 지방에서 뱀을 위하여 간사스러운 계집들이 쌀이나 밥을 뿌려 주니 이런 것이 의리에 마땅한 것이냐. 시방 무당이 굿을 하며 우매한 사람을 속여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일이라고 말을 하나, 비례비의(非禮非義)로 살면 얼마 못되어 악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니, 자연히 사람은 이를 막지 못하나 하늘은 필연코 이를 없애리라. 정의, 김녕, 토산에 뱀의 커다란 굴이 있어 해마다 처녀 하나씩 산 채로 뱀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때에 이 목사가 제주를 관할하고 서 판관이 본읍 제주를 다스릴 제 신당을 불사르고 무당의 미신 행위를 엄격히 금하였더니, 그 후 무당이 아주 없어진 적이 있었다. 이로 볼 때 무당에는 도가 없기 때문이고 혹 있다 하더라도 그 도가 진실하지 못하기에 얼마 동안이라도 없어졌으며, 아주 없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천주 성교인은 위주(爲主) 치명하기를 어찌 무서워하리오.     


21. 사람이 세상에 나매 주색잡기를 하여야 남이 말하기를 이팔청춘에 한 번은 할 것이라 하니 이치에 당연한 것이오, 혹 부당한 것이오 오호라, 내가 제주 절도에 들어와 본즉 한 남자가 너더댓씩 첩을 둔 자가 많으며 임의대로 본처를 소박하니 이 어찌된 일이오. 조강지처는 집에서 쫓아내지 못하는데, 첩을 위하고 본부인은 내쫓는단 말이오. 우리 성교인은 한 번 바른 혼배를 하면 죽을 때까지 갈리지 못하며, 본부인이 살았을 때는 다른 이에게 장가가지 못한다. 또 성교인 가운데는 동신(童身)으로 수정(守貞)하는 이가 많으니라. 제주의 여러 풍속이 육지와 다르니 과히 말할 것은 없소마는, 여기에 유도(儒道) 공부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 소학을 진실히 독습하였다 하리오. 칠세에 남녀 동석하지 않으며 함께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데, 내외가 구별 없이 가리지 않고 다른 이의 젊은 미인과 수작을 하니 어찌 탐색이 아니 나리오. 본래는 황토도 미물(美物)이요 청수도 미물이나, 상합한 즉 반드시 진흙으로 추물이 되느니라. 내가 우리 대한 여러 도읍과 타국 항포(港浦)를 유람하여 보아도 제주와 같이 주색잡기 많음을 못 보았소. 이 절도도 대한에 속해 있으니, 예의동방이란 좋은 칭호를 듣기에 합당하도록 수신수심(修身修心)하여 봅시다. 속담에 이르기를 “술과 여색과 재물과 방탕한 기운은 사람을 가두는 네 개의 담장이라.”고 하였느니라.    

 

22. 우리 제주에서 뱀을 위하니 천주 성교 도리에 어떻다 하오. 본래 뱀이 무엇이기에 공경하리오. 신이란 말이오. 사람과 같이 영리하단 말이오, 그 뱀이 미물(美物)이 되어 사랑스럽단 말이오. 매년 정월(正月)에 칠성할망집을 새로 일고 덮어 주며, 뱀을 뒷할망이라고 이름하여 죽이지도 아니하고 잘 모셔 두고, 간혹 칠성할망이 나오면 요사스럽게 백미 등을 뿌려 봉양하니, 만국 사람의 거스름이 되며 천주의 명을 순종하지 않음이니, 대개 들어 보소. 만민이 뱀을 보면 깜짝 놀라 원수같이 여겨 만나는 대로 죽인다. 또한 뱀은 기왕에 우리 조상을 속였으므로¹ 모든 인생의 뼛 속의 원수이다. 제주에서는 뱀을 죽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신으로 공경하여 고사(告辭)를 하니 무슨 유익을 보았소. 혹은 무령(無靈)한 금수가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하고 영리한 사람을 낳았단 말이오. 뱀을 보고 칠성(七星)할망이라고도 하며 혹 뒷할망이라고도 하는데, 조모(祖母)란 명칭을 어찌 이 무령한 뱀에게 주리오. 아마 노형을 보고 뱀을 가리키면서 가로되 “그대는 이 뱀의 몇 대손이오.” 하면, 성을 내어 대답하기를 “사람은 사람을 낳고 짐승은 짐승을 유(類)를 낳는데 이 웬 말이오” 하여 아무쪼록 뱀의 종류 아님을 해명할 것이오. 그러면서 여전히 뱀에게 고사를 하니 대장부도 겉과 속이 다르게 일구이심(一口二心)을 하려 하오. 의가(醫家)에서 사주(蛇酒)와 사즙을 백병통치라 하니 제주인민도 그 약을 쓰고 새로 조작하며, 또 어떤 제주 사람은 뱀을 보는 대로 때려죽이고 약까지 하여도 어찌 아무 탈이 없는가. 이런 것만 보아도 뱀을 때려죽이면 큰 우환이 몸에 유전(遺傳)한다는 말이 허무한 잡설이 아니오. 만약 뱀이 뒷할망이라고 한다면 어찌 뱀에게 물리며, 또 뱀의 독으로 약을 구한단 말이오. 어찌하여 뱀의 독으로 병자가 단명 요사(夭死)하느냐. 내 ‘할망’ 말을 들었을 때 친애(親愛)를 포함한 말로 들었더니, 그래 친애할 자까지 무정하게 물어 죽인단 말이오. 본래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물 위에 두사 초목금수 등과 만물을 사람의 소용(所用)으로 결정하신 것인데, 인생이 어찌 상제(上帝)의 법을 함부로 어겨 금수의 밑이 되려 하는가.     


23. 풍수(風水)와 택일(擇日)과 관상(觀相)함은 믿을 만하오. 노형은 물음에 대해 차례대로 들어 보시오. 풍수는 하상주(夏商周) 삼대 때에는 전혀 없었는데, 진(晋)나라 때에 곽박(郭璞)²이라는 사람이 남의 돈이나 재산을 빼앗고자 하여 조작한 것이니, 허망함을 대개 말하리라. 부모나 타인이 별세하면 지관(地官)을 불러 용혈의 땅(좋은 묏자리)을 고르며, 나침반을 가지고 동서남북의 방향을 관찰함으로써 가재(家災)와 자손의 흥패(興敗)를 안다고 한다. 하상주 삼대 사람들은 이런 이단이 없어도 많은 왕후 장상과 호걸 유생들이 매년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여산에 묻혔는데, 무덤 주위로 세 개의 샘물이 흐르며 물에 수은(水銀)이 덮여 있어서, 풍수의 말로 하면 비교할 만한 자리가 없이 좋다고 하나, 삼세(三世)를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다. 곽박도 비명(非命)으로 왕돈(王敦)에게 살해되었다. 이러므로 성자고(成子高) 이르되 “생(生)이 사람에게 이로움이 없거든 어찌 죽음이 사람에게 해로우리오” 하니, 사람이 죽은 후에 불식(不食)의 땅(좋지 않은 묏자리)을 택하여 장례를 치러도 재앙이 없을 것이오, 도리어 이 분묘로 길흉을 구하는 자는 재앙이 있으리라. 옛적에 유중도(柳仲途)가 이르되 “장례를 잘 치른 집은 반드시 번창하지 않으리라” 하였으니, 지관의 간사함을 어찌 깨닫지 못하는가. 산 사람이 집을 지을 때 땅의 습기를 살피고 주위에 물의 흐름을 잘 살펴보는 것은, 인생이 항상 수토(水土)로 인해 죽는 지경에 이른다고 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무덤이 어찌 땅의 습기를 알아 조화를 부리리오. 내 일찍이 들으니 부귀는 재천이라 하였지, 부귀현우(富貴賢愚)와 빈천수요(貧賤壽夭)가 분묘에 있다는 말은 못 들었노라. 천하만국이 지관을 불러 묏자리를 취택하지 않고 한 동(一洞)이나 한 읍(邑)이 산이나 야지(野地)를 도매하여서 모든 죽은 자를 매장하여도 문명 개화한 나라인데, 홀로 우리 나라 근처에서 풍수법이 있으나, 저 서양 각국과 부귀영웅이 많이 태어나오. 대한(大韓)이 부국강병하단 말이오.상서(祥瑞)와 길복이 시체로부터 온다고 할 수 없으니, 이는 본래 스스로 썩지 않을 능력이 없어서 얼마 못 되어 썩어 버리는데 어찌 자손을 복되게 하리오. 또 그뿐 아니라 부모님께서 본래 구차하게 사시어 가산이 부요하지 못하였거늘 돌아가신 후 분묘에서 도와 주시리오.     


상서와 길복이 땅의 형세에 있을 수 없다. 이를테면 자기에게 묻혀 있는 시체도 썩음에서 구원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원동(遠洞)에 사는 자손을 복되게 하겠는가. 옛적에 송범문(宋范文)은 풍수가를 매우 미워해도 자손이 번성하였고, 진시황과 송채경(宋蔡京)은 풍수법을 최고로 믿었으나 온 집안이 멸망하였다. 본래 지형과 습기를 돌보지 않아도 되는 사례를 내 일전에도 직접 목격한 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바다를 건너다가 익사하였는데 그 자손들이 부요하며, 다른 사람은 오히려 좋은 침실에서 죽어도 그 자손들이 가난하기 짝이 없는 일이 있었소. 만약 모든 상서로움 이 풍수로조차 난다면 먼저 지관들이 좋고 상길(詳吉)한 지형을 골라 두었다가 그 후 자손에게 줄 것이거늘, 항시 살펴보니 지관들이 매우 가난함은 무슨 연고인가. 속담에 이르기를 “큰 부자는 하늘로 말미암고 작은 부자는 근면으로 말미암는다” 하였으니, 풍수를 버려 두고 근실히 천주께 믿고 바라고 수심(修心)하여 허욕을 끊어 보소.     

하루 동안에 열두 시가 있고, 한 달은 대소를 분별하여 30일 혹 29일이요, 1년 365일 6시 중에 오행(五行)과 오성(五星)³ 이십팔수(二十八宿)⁴와 육십갑자가 있는데 어느날이 길하고 흉하리오. 비컨대 칠월칠석이 길일 같으면, 이 날 이 서방과 박 서방이 동시에 장가들었는데 어찌하여 박 서방은 자손이 많고 이 서방은 후손이 없느뇨. 어찌하여 한 사람은 아들만 낳고 한 사람은 딸만 낳느뇨. 15일이 길한 날이라 하여 두 사람이 같이 떠나 길을 가다가 어찌하여 하나는 길가에서 죽고 하나는 무사하는가. 한 날 두 사람이 집을 짓거나 집을 일거나 퇴벽(허물어진 벽)을 고치는데, 어찌하여 하나는 재산이 많고 집안일이 걱정없이 잘되며, 다른 사람은 빈곤하여 말할 수 없이 고생을 하느냐. 내 이전 사람의 역대(歷代)를 상고하여 보니, 주무왕(周武王)은 갑자에 흥하고 상 주왕(商紂王)⁵은 같은 갑자지만 패하였는데, 이 두 왕이 하루 동안에 교전하여 한쪽은 이기고 한쪽은 졌으니 어찌하여 이렇소. 하루 한 시(時) 사이에도 산 사람 칠천여 명이나 죽은 사람은 열 중에 팔구가 되었다.     

또 사람이 흔히 밤에 낳고 죽으니, 밤은 악귀가 침범하는 때인데 어찌 상서로우며 길하리오. 그리고 흔히 보는 일로서 택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히려 복과 자식이 많고, 모든 일에 날과 시간을 택한 사람은 가난하고 자손이 없으니 어쩐 일이오. 지관들이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줄은 모르고 남의 길흉화복만을 보아 주려 열심히 돌아다니니, 눈뜬 소경이로구나. 근래 인심이 점점 쇠하는데 풍수들은 왜 그리 인심이 좋아서 이런 상서로운 모책(謀策)을 타인에게 누설하는고. 실상 지관의 말대로 상서가 있을 것 같으면, 결코 누설하지 않고 혼자 만상 천복을 누리리라. 또 육갑(六甲)은 천간십자(天干十字)와 지지십이자(地支十二子)⁶로 세월 일시를 가르쳐 알게 하는 것인데, 근래 요사스러운 풍수들이 귀곡(鬼谷)⁷을 따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로 육갑의 근본 상태를 점치며, 일시를 영혼이 없는 짐승과 결합시켜 놓고 자시(子時)는 쥐요, 축시는 소〔牛〕운운하여 인상, 형상(形狀), 안색을 보아 이것으로 길흉 요상(妖祥)을 안다 하니 가히 불쌍하도다. 별과 점괘를 위주로 하여 남이 잘되고 잘못되는 것을 보아 주러 다니는 이여, 혹 천문에 통달하면 신성(辰星:별자리)이 회전함을 보고 비 올 것이나 바람 불 것이나 덥고 추울 것을 알며 일식 월식도 안다 하거니와, 저 관상 보는 자들이 흔히 일자무식이니 어찌 천지나 분간할 줄 알리오. 이러한 사람들이 어찌 타인의 화복을 보아 주리오.    


중니지문(仲尼之門)⁸에서는 삼척동자까지라도 사람의 형상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또 여씨춘추(呂氏春秋)⁹에 가로되 “거친 사람이 인상이 좋으니, 인상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아 벗을 선택하여야 성인이 된다” 하였으니, 어찌 사람의 근본이 손바닥이나 손가락에나 눈동자에나 귀목〔耳苩〕위에 있다 하려 하오. 점치는 사람의 수많은 말 중에 우연히 하나가 적중하는 것을 가지고 변통없는 법과 같이 만들어 우부(愚婦)를 현혹하려 하느뇨. 어찌 일월이 회전함에 인명이 매었으리오. 인명은 재천이라 하였소. 죄인이 법 아래 죽으면 명이 사납고 직성(直星:사람의 운명을 맡은 별)이 악하다 하니, 별의 죄악을 어찌 사람이 받는다 하리오. 나라에서 십대신(十大臣)이나 관장(官長)을 지목하실 제 어찌하여 이 점치는 법을 채용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마땅한 도덕인재(道德人才)만 택하시느뇨.     


제요(帝堯)는 장수하시고 순(舜)은 단명하시고, 문왕(文王)은 장수하시고 주공(周公)¹⁰은 단명하고 중니(仲尼)는 장수하시고 자공(子貢)은 단명한 것은 육신의 다름이지 마음의 다름이 아니다. 또 용모로 길흉을 따지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하리라. 순(舜)은 겹눈동자이셨고 항우(項羽)도 역시 겹눈동자이셨으며 공자와 양화(陽貨)도 마찬가지였다. 한(漢) 고조는 코가 우뚝하였고 관락(管輅)도 역시 코가 우뚝하였다. 이는 형모(形貌)만 같고 언행 화복이 피차 같은 것이 아니다. 점치는 법에 길흉이 매었다면 서로 같은 용모에 어찌 피차 화복이 같지 아니하느냐. 어찌하여 하나는 장수하고 하나는 단명하였느냐.     


본래 이 점치는 법의 허황함을 알려 하거든 점치는 자에게 가서 물어 보면 되리라. “그대의 살 기약은 몇 해나 되며, 죽기는 어느날 어느 시 어느 곳에서 유병(有病) 혹 무병(無病)하므로 명(命)을 마치리오” 하면 즉시 대답하기를 “아주 모르노라” 할 것이다. 관상 보는 자는 자신의 길흉화복과 죽을 때를 전혀 모르면서 타인의 상 보러 다닌단 말이오. 속담에 말하기를 “죽음에는 노소 없고 죽는 기한 모른다” 하니, 이는 진실한 말이로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죽는 기한을 모르게 하사 항상 예비하도록 하고,¹¹ 또 죽기는 한 번만 할 터이니, 각 사람이 마치 밤마다 도적을 지킴과 해마다 기근을 막음과 같이 하는 본분을 보이심이다. 풍수, 택일, 관상의 허망함을 수많은 어구로라도 말할 것이로되, 이만하여도 기왕 노형이 깨달으신고로 그만 그치노라. 비근한 예로 코가 높은 것이나 용모 흰 게 상길(祥吉)인 곳은 태서국인(泰西國人)뿐이요, 용모는 황색이 상길인 데는 동국인(東國人)뿐이라.     


24. 무당이 굿을 하면 병자가 나으니 신효(神效)한 법이 아니오. 내 일전에 삼성할망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소. “삼성할망 굿할 제 진실하게 믿고 하느냐” 하니, 제 대답이 “믿다니요, 요사를 부리다니요, 생명을 부지하고 괴롭게 일할 수 없어 남 속이는 노릇을 하지요” 하니, 더 또 증명이 될 만한 근거를 들어 무엇하리오. 그러나 몇 가지 비유를 들어 보시오. 가까운 마을에 화재로 인해 모든 가산이 불에 탈 위험에 다다랐는데, 물 부어 불 끌 생각은 아니하고 무당 불러 풍악(風樂) 굿을 하고 무가(舞歌)하여 불을 끄려 한다면, 노형이 권하여 물로 불을 잡게 하리라. 병세에도 이와 같아 약으로 병을 다스릴 것이지, 저 무당이나 판수(점을 치는 일로 업을 삼는 장님)들이 무슨 극성의 묘책이 있길래 의원도 아닌 술객(術客)이나 심방들을 불러다 놓고 사오백 돈씩 주어 가며 굿을 하느냐. 본래 병자의 정신이 병세로 어지러운데 종과 징과 북을 치고 가무로 시끄럽게 하니, 정신이 어두워 입맛을 아주 잃어 기진할 것이므로 이 심방들이 병인에게 이롭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기절시키려 다닌다 하리로다. 속담에 이르기를 “먹어야 살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였다. 한 사람이 아주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심방을 불러 주림을 쫓아야 이 사람의 병이 부득불 나으랴. 그런고로 고금에 주린 사람이 먹음으로 살았다는 말은 들었어도, 무당이 굿함으로 쾌차했다는 말은 못 들었노라. 어찌 무당이 병세를 쾌할(快活)케 하리오.     


날마다 보니 수많은 무당들이 또한 앓아 죽는 지경에 이르니, 어찌하여 심방들이 제 몸에 병이 있느뇨. 이 무당의 법이 옳다고 한다면 첫째로 무당들이 앓지 말아야 될 것이 아니오. 1년 365일 동안에 점괘를 하다가 요행지사로 눈먼 소경 길 바로 다니듯 한두 번 맞춘다면 이게 상서(祥瑞)라고 하리오. 활 쏠 줄 모르는 자가 과녁을 향해 활을 쏘아 90에 요행 한 번 맞춘 것을 가지고, 천하에 극효(極效)한 법인 줄 알아 무당과 판수를 불러 굿하는 자는 모두 마귀의 노복이요 하느님의 원수가 된다. 요행히 병이 나아서 장수한들 죄는 태산같이 쌓이게 되며, 공평한 천주 성교를 아니 받들므로 덕행은 조금도 없으니, 참으로 이런 사람들 보면 천지간에 불쌍하도다. 본래 어느 나라 임금이라도 적국(敵國)과 물화상통(物貨相通)을 엄금하는 것은 인민을 사랑하고 돌봄이니, 어찌 우리 만민의 대부모 되시는 천주께서 금하시는 것을 하려 하느뇨.     


25. 제주(濟州)에서 섣달과 정월과 2월 간에 여러 가지 심방굿을 제일 많이 행하여 각 신(神)을 숭상(崇尙)하는데, 천주 성교인은 어찌 보기를 싫어하는가.


1) 내가 천주님과 성모님의 홍은(鴻恩)을 입어 기해년(1899년) 2월 7일에 신부로 서품된 후 4월 17일¹²에 제주도에 도착하여, 이곳 풍속을 듣고 보았더니 육지와 다른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단(異端)만 가지고 대충 말하노라.     

2) 정월에 거리제를 하니 이 뜻은 대개 이러하다. 길거리를 가로막아 놓고 병풍을 두르고, 한 10여 가호(家戶)들이 술 떡 밥 황육 등과 돈을 주어 가며, 그 동네 거리의 악귀를 몰아 쫓아 아무쪼록 새해 잘되게 하여달라 함이나, 어찌 청탁을 분별하지 못하는고. 노형보다 더 비천한 무당이 무슨 재능이 있기에 악귀를 몰아 내쫓으며, 풍악과 경 읽음으로 좋고 상서(祥瑞)로운 신을 흘려 들여오리오. 또 이 거리제를 할 제 노상(路上)을 꽉 가로막으므로 사람이 지나가지 못하며, 소와 말들은 짐을 싣고 이 골목 저 골목 돌아 가까스로 본가에 이르러 짐을 부린다. 또 밤 이 거리제를 하니, 어찌 곤히 자는 사람을 경 읽음으로 깨게 하는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매 하나도 진실된 것이 없으므로 성교인은 보기를 싫어하느니라.     

3) 신당에 종이와 댕기와 고운 밥과 베 조각 등을 걸고 손으로 빌어 재앙을 면하려 하니 허황하도다. 이 나무가 음식(飮食)을 하오. 이 신당이 한기(寒氣)로 옷을 달라고 한단 말이오. 머리가 없는데 어찌 댕기로 머리를 치장하려 한단 말이오. 신당이 영리하여 편지나 혹 일지를 쓴단 말이오. 이런 허비(虛費)를 가지고 가난한 사람에게 시사(施捨)를 하면 공로나 있어 하느님의 진노(震怒)를 면할 것인데, 고집불통이라 전부터 시행해 내려온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면 어찌하여 제주 사람들이 본조상(本祖上) 아니하던 것을 하는가. 고․양․부 삼씨가 일본 미녀를 하나씩만 취하였다 하는데, 근래는 어찌하여 “계집 셋이 있어야 한 사내가 산다” 하는가. 이 무령한 나무 덤불이 무슨 조화를 부리리오. 이러므로 천주 성교를 하는 사람은 이런 것이 영리하거나 전비(全備)하지 아니함을 알고 스스로 신당에 사배(祀拜)하지 않느니라.     

4) 명감이란 것은 거친 땅에 초막(草幕)을 짓고 산신을 임격(臨格)하게 하여 새해에 아주 좋은 밭이 됨으로써 한 번 농사에 백 배의 수확을 얻게 하여달라고 함이다. 정월에 전상(田上)마다 대개 이런 초막이 있으니, 노형은 무슨 신효(神效)를 산신한테 얻었소. 어찌하여 풍재(風災)로 흉작이 되었다는 말을 매년 되풀이하오. 만약 이 산신이 도와준다면 어찌 풍재(風災)를 면하지 못하오. 이러므로 우리 성교인은 이런 요사스러운 짓을 하지 않소.     

5) 포제(酺祭)와 천제(天祭)를 하는데, 이것은 수건 쓰고 촛불을 크게 켜고 커다란 돼지를 잡아 제상에 두고 제를 하며, 그 예절은 많은 점에서 향교 예절과 흡사하다. 한 마을이 그 동네를 위하여 제헌하는 것이라, 천자(天字)가 들어가므로 큰 예절인 듯하나 실상은 허황하다. 중용에도 말하기를 “상천지재(上天之載)는 형체․소리․냄새가 없다” 하였는데, 형체 없는 신이 구미(口味)를 찾아 돼지고기를 먹겠는가. 천주 성교인은 천지만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조성하신 하느님을 거룩하고 조촐한 제례로 재계목욕하며 공경하니, 정도(正道)를 하는 사람들이 사도(邪道)를 하는 것을 부러워하여 참견하겠는가.     

6) 전에 절터였던 곳에 기(旗)달고 축문하여 심방들이 경을 읽고 지방(紙榜)을 써 근처에 붙이고 주육을 차려 놓고 굿을 한다. 전에 서 판관(徐判官, 즉 서린)이 절 오백과 당 오백을 소멸(燒滅)하였는데, 어찌 근래 사람들이 마구 옛적 절터에 제사를 하는가. 서 판관께서 하신 일을 책하여 바꾸려고 하니, 근래 백성들이 제 도읍의 관장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면 충민이냐, 역적이냐. 옛적에 있던 불상을 보면 기술자가 흙 한줌 가지고 두 편에 나누어 한편 가지고 불상을 만들고 한편 흙을 진흙 속에 저버리거나, 나무 하나를 두 쪽에 나누어 한쪽 가지고는 그 불상이 허황한 줄 알아 서 판관을 칭찬할 것인데, 오히려 전 절터를 기념하는 뜻으로 음식 등 물질을 거기 버려 놓는다는 말이오. 공자 이르시되 “시작이 졸렬하면 나중에 이루어짐이 없다”고 하셨으니, 우리 성교인은 이런 아름다운 말을 따라 굿에 참석 못하오.     

7) 용신제(龍神祭)도 정월이나 2월에 지내는데, 이는 곧 물귀신을 위하여 하는 제사다. 노형이 물을 위하오, 혹 물에 있는 물귀신을 위하오. 만약 물을 위할진대 어찌하여 사람이 물을 건너가다가 불행히 빠져도 구원하여 줄 줄을 모르고 죽게 하는가. 만약 물귀신에게 제헌(祭獻)한다 하면 어찌하여 신이 물을 억제(抑制)하고 금지하여 자기를 흠숭하는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오. 또 흔히 자살하는 여자들이 물에 빠져 죽으면 항상 말하기를 “용신(龍神)이 데려갔다” 하니 미련한 말이로다. 산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숨이 통하지 않으므로 호흡이 끊어져 죽으며, 혼백이 분리하여 혼은 지하로 가고 백(魄)은 물위에 뜨는데, 이를 두고 악귀가 자살한 자의 영혼을 벌하려 지옥으로 끌고 갔다 하느냐. 또 본래 용이 무엇인지 온 세상 만인이 잘 모르는데 우리 제주에서만 안다 하오. 이런 모든 것이 이치를 거스리니 어찌 천주를 공경하는 사람이 아는 체나 하리오.     

8)칠성제(七星祭)는 북두칠성을 위하는 제사다. 제주성 내에 칠성동이 있는데, 본래 삼성 고․양․부가 제주를 삼도(三徒)로 구분하려고 함께 모여 공회(公會)를 하던 곳이다. 노형이 어찌하여 청천에 많은 별 중에 북두칠성을 취택(取擇)하여 정성을 하는가. 빛나고 아름다움이면 아마 미성(尾星:彗星, 찬란한 꼬리를 가진 별)의 광채와 찬란함이 북두칠성보다 훨씬 낫고, 또 다른 별도 매양 한결같이 비추는데 하필 이 북두칠성만 공경하는가. 예부터 현재까지 별이 사람을 낳아 기른다는 말을 못 들은 것은, 영이 없는 물건이 만물 중에 가장 귀하고 영리한 사람을 낼 수 없음이라. 이를테면 내가 한 푼도 없으면서 만억금 남에게 주마함 같도다. 그런고로 천주 성교인은 천지만물과 그 안에 포함한 것까지 조성하신 대주재이신 하느님만 공경하노라.     

9) 전방(廛房:상점) 귀신을 위하여 전방 한편에 송판(松板)으로 제단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낸다. 아침에 전방을 열며 가게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 귀신께서 오늘 날 망건을 쓰고 귀 아니 뺀 놈¹³으로 돈을 많이 들어오게 해줍소” 하는 것이니, 근래는 귀신도 도적질할 줄 아나 보오. 본래 어느 사람이든지 불의하거나 공짜의 물건을 바라면 이내 없어지고 마는 법인데, 가련하다, 사람의 탐욕이여. 걸인에게 만승천자위(萬乘天子位)를 맡겨 줄지라도 부족하다 하리라. 이러므로 우리 욕심은 죽은 후에야 다 채워지리라. 전방신에게 그처럼 빌어서 전방신이 한푼오리라도 더 보태 주는 것 보았소. 또 아무리 미련한 자라도 망건 쓴 후 귀 배놓지 않은 것 보았소. 귀신하고 농담하려다가는 참으로 상서(祥瑞)로운 일이 전혀 없으리라. 어찌 이런 농담을 듣고 도와 줄 마음이 있었던들 도와주겠는가. 이런 허황한 것을 알고 성교인은 참관하지 아니하느니라.     

10) 문제(門祭)를 할 때, 집터의 크기를 보아 집터가 크면 네 냥(兩), 작으면 두 냥 씩을 제사의 비용으로 상두(문제를 하는 사람)에게 주는데, 이 사문제(四門祭)도 정월에 하는 것이다. 밤이면 너더댓 시에 돼지와 다른 음식을 차려놓고 축문을 높이 외우며 제사를 지내니, 허황하다. 이 사문(四門)에서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방향을 살필 때 출입도 못하게 하니, 인생을 살렸다 하랴. 고로 성교인은 상관없으니 네 냥이나 두 냥의 제사 비용을 내지 않느니라.     

11) 집 일고 나서 비가 오면 부자 된다 하니 허황하다. 가난한 사람도 집을 일어 비가 오되 일상 가난하고 궁색하기 짝이 없다. 공자의 말이 “부귀는 재천이라” 하셨다. 또 집 이는 새 비에 젖어 쉽게 썩을 터이니 부요하겠느냐. 명년에 다시 집을 일 터이니 헛된 경비가 더 드는데 어찌 부자 되는가. 본래 비하고 집하고 그 집 사람들하고 무슨 상통함이 있기에 지붕을 이은 후에 비가 오면 부자 되리라 하며, 만약 비가 아니 오면 가난하리라 하는가. 성교인은 이런 요사스러운 말을 귀 밖에 듣는다.     

12) 집을 소실(燒失)하였으면 무당 불러다 놓고 굿을 하는데, 네 기둥에다 홰(횃대:물건을 걸 수 있게 만든 기구)를 매어 두고 무당들이 굿하며 말하기를 “불이여!” 하며 불을 홰단에 붙였다 끄고 또 굿하니, 이를테면 화재 본 사람의 넋 나간 것을 편안하게 함인가. 사람이 “불이여!” 소리로 넋 나갔으면, 무당이 다시 그 지겨운 형상을 재연할 제, 어찌 또 놀래 넋 나가지 아니하겠는가. 본래 사람에게 넋이 나가면 즉각에 죽는데 아직까지 죽지 아니하였으니, 넋도 나가지 아니하고 혼백과 같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넋이 본몸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또 만약 혼이 나갔다 하면 이 무당의 경 읽고 쟁 침으로 다시 본몸으로 불러들여 보내랴. 이런 난설은 마치 항아리를 쓰고 햇빛 없다하는 자와 소경이 대문 없다 함과 같으리니, 우리 성교인은 믿지 못한다. 우리는 오로지 측은한 마음으로 꿇어 엎드려 천주께 빌어 “정도(正道)에 돌아오게 하소서” 하느니라.     

13) 집을 인 다음에 사기병에 물을 넣어서 집 마루턱에 두든지 사내가 지붕에 올라가 오줌을 누고 내려오든지 하니, 이는 택일이 필요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만약 택일함으로 만사가 잘 이루어진다면, 어찌하여 세상일에 그릇됨이 많겠는가. 천주 성교인은 이런 짓을 아니하느니라.

14) 2월 21일에 동쪽으로부터 영등할망이 들어온 날이라 하여 무당들이 굿을 하는데, 작은 배를 만들어 그 안에 미역과 닭과 양식과 물과 나무를 싣고, 사공 없이 배만 바다에 띄워 내놓고, 15일 동안 해변을 돌아가며 굿을 하고, 이 굿을 마친 날부터 모든 배들을 출입하게 한다. 본래 외눈박이 장수(將帥) 같은 절도(絶島)를 한바퀴 도는데 사백여 리뿐인 고로 한눈 가지고도 뚜렷이 보이는데, 영등할망이 미역씨와 다른 물건씨를 바다에 뿌리려 들어온 날이라 하는가. 또 영등할망에게 외면(外面:겉) 의복을 차려 주면 바다에 파도도 없게 하며 고기 잡기도 잘된다고 하니,     

첫째로는 영등할망이 무엇인지 분명 모르고 하는 일이요, 의복(衣服)이 바다 풍랑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구제기(소라)를 까보면 껍데기뿐이라 하니, 겨울에 새들이 산림에서 살 수 없어 해안에 내려와 구제기를 까먹은 것이 자갈 수보다 많거늘, 어찌하여 영등할망이 먹은 것이라 하느냐. 또 만약 미역씨를 뿌리려 왔다 할진대, 미역이 이미 있어서 넉넉히 바다에서 그 종류를 전(傳)하는 것인데 또 씨를 갖다 대해를 온통 덮으려 하는가. 이런 허황한 말이 어디 또 있으리오. 또 이날부터 배가 출입하니 이전에는 이런 번거로운 법 없이 출입했는데도 사공과 선척(船隻)이 일일이 손실이 없었다 하는데 이 무슨 사술인가. 이런 것만 보아도 성교를 하는 삼척동자까지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리라.     

15) 뚝할망은 이전에 제주 사람이 폭풍을 만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외눈박이 장수하고 싸우는데 이 뚝할망이 도와주고 제주까지 데려다 주었다 하여 당을 지어 섬기고 있다. 바구니에다가 말갈기와 털로 하여 꽂고, 관덕정에서 사람 죽일 때도 갖다 놓고 생사대권(生死大權)을 가진 귀신 할망이라 하니, 어디 진실한 것이 있기에 바구니를 받들어 귀신으로 공경하는가. 이런 난설을 수없이 많이 지어낸 사람이 미친 사람이면 같이 미친 사람 되려 하여 뚝할망을 받들려 하는가. 옛적에 고․양․부는 땅에서 솟아났다 하면 어찌 혼배하여 인류를 전하리오. 진실로 생사대권을 잡은 분은 천지신인을 모두 조성하신 자이다. 그러므로 이 뚝할망이 생사에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인명은 재천이니, 우리 성교인은 이런 것을 예배하지 아니하느니라.     

16) 마주단¹⁴은 말 위하는 단(壇)이니 판관이 하는 제사요,     

17) 풍우뢰단(風雨雷壇)은 비바람 오는 제사이니 또한 판관이 하며,     

18) 해신제(海神祭)는 별도(화북)에 있는 배 대는 옛적 포구에서 판관이 그날 배를 해상에 띄우며 제사하는 것이요,     

19) 예단[厲壇]은 양반의 딸이 출가 후에 자손이 없이 죽거나, 아무라도 자녀 없이 죽은 외로운 양반에게 음식 차려 놓고 비는 단이니 혹 이단이라고도 부르며,     

20) 봄 석전은 목사(牧使)가 난리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며,     

21) 소렴당¹⁵은 목사가 나아가 신선 노리개하고 노는 데니라.     

22) 배(船) 고사하는 것은 사공이 돼지 하나와 술과 다른 음식 등을 차려 가지고 제사하여 “아무쪼록 발선(發船)과 해중(海中)과 회선시(回船時)에 무사하게 하여 줍소서” 하며 술을 바다에 붓고 배 전후좌우와 돛대 목에 붓는다.      

오호라, 우리 작은 제주 섬이 비록 땅으로 작고 작으니 이단 사상이 이렇게 많으니 가련하고 난처하도다. 내가 힘을 다하여 이단 되는 것을 알아 풀어 밝히려 하여 많은 것 중에서 일부만

이 위에 기재하였으니 보는 자에게 부족한 듯하나, 여기 말하지 아니한 것과 여기 이왕 말한 것까지 천주님과 성모님의 홍은(鴻恩)으로 아주 이 제주에서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엎드려 천주와 성모 마리아께 비오니, 보는 자는 이것이 오히려 부족하다 하지 말지어다.     

기해(1899)년 3월에 도구내(외도) 사람이 산제(山祭)를 하러 갔다가 밤에 자는데, 여인 하나와 노인 남자가 울며 나타났다. 그가 묻기를 “어찌하여 울으시나이까” 하니, 저들이 대답하길 “우리는 본래 제주 신령이더니 오래지 않아 병선(兵船)이 와서 우리를 칠 것이기에 이 본토를 버리고 떠나갈 터이니, 그래서 우노라. 우리 말이 거짓이 아닌 증거를 보이리라. 남문 밖에 우성목¹⁶이 저절로 부러졌음이 증거라” 하고 다시는 뵈지 않았다. 도구내 사람이 하도 이상 황망하여 진가를 알아보려고 남문 밖에 가본즉 과연 우성목 하나가 반허리깨가 부러져 꼬꾸라져 있었다. 그 후에 윤선(輪船)으로 천주 성교 전교사가 입도하시니, 해몽(解夢)하건대 우리 성교가 이 섬에 들어오므로 악귀들이 원한(怨恨)하는 듯하니, 제주 여러 점잖은 이들은 이 핑계 저 핑계 하지 말고 악귀 공경을 그치시오. 사신(邪神)이 기왕 떠났으니 무엇을 바라고 이단을 더하여 두호(斗護)하지 아니하는 악귀를 공경하리오.     

23) 몸 비린 것은

① 뱀 죽은 것을 보면 7일 동안이요,

② 말과 개고기 먹은 사람이 3일 동안이요,

③ 산모가 7일 동안이요,

④ 경수 월수(月水)하는 여자가 7일 동안이요,

⑤ 상처와 손 베임과 존장(尊長)에게 매맞음은 다 나을 때까지니라. 또 고양이 죽은 것을 보아도 몸이 비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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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註>

¹ 창세 3, 1 이하 참조.

²곽박-중국 동진의 학자.

³오행-우주간에 운행하는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다섯 원기로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에 의해 우주 만물을 형성한다고 함.

⁴옛날 인도, 페르시아, 중국 등에서 해와 달과 여러 행성의 소재를 밝히기 위해 천구(天球)를 28로 구분한 것.

⁵상 주왕-상나라 마지막 왕인 폭군. 주 무왕에게 패하여 멸망함.   

⁶천간-60갑자의 위 단위. 즉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 지지 : 60갑자의 아래 단위, 즉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⁷귀신이 모인다고 일컬어지는 별의 이름.      

⁸공자와 제자와 그 가르침. 중니(仲尼)는 공자의 자(字).

⁹진(秦)나라의 백과 사전.

¹⁰주(周)나라 시조인 무왕(武王)의 아우요 문왕(文王)의 아들임.

¹¹마르 13, 32 ; 루가 12, 36-38 ; 마태 24, 43 참조.

¹²여기의 날짜는 모두 음력임.                      

¹³“망건 쓰고 귀 아니 뺀 놈”:돈 버는 일 등 즐기는 것을 싫어하는 어리석은 사람. 망건 쓰고 귀 안 빼는 사람 있느냐는 속담은, 망건을 쓰면 누구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귀를 내놓는다 함이니, 돈 버는 일 먹는 일 등 즐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¹⁴마주단-마조단(馬祖壇)으로 마조제(馬祖祭)를 지내던 제단.       

¹⁵어승생에 있던 신당.                         

¹⁶우성목-옹중석, 우중목이라고도 하며 돌하르방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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