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로 기쁜
"아들, 내일 수업 취소해도 될까...?"
신호가 좋지 않다. 지난 첫 주 수업을 잘 마치고 이제 본격적인 열운 모드로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급작스러운 수업 취소라니. 우선 차분하게 사유를 물어보았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엄마의 오랜 벗이 미국에서 잠시 들어오셨는데 공교롭게도 수업 날만 시간이 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번에 필라테스 강사님께 연락을 드렸고 감사하게도 흔쾌히 수업 연기를 해주셨다.
난 엄마가 친구 만나서 보내는 시간을 진심으로 반기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주 만나는 지인은 대개 학부형의 관계로 인연을 시작하게 된 동네 아주머니들이시다. 학교와 학원 소식을 나누고 자녀에게 멋진 추억을 선사해 줄 교외활동도 찾아다니며 노력과 시간을 기울여온 동지이다. 그런데 그들만의 한 가지 특이한 습성이 있는데 바로 서로를 자녀의 이름으로 호칭하는 것이다. 나의 눈에는 굉장히 이상해 보이지만 그 동지들 간에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 양식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철수의 어머니가 영희의 어머니를 부르는 경우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영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주체, 객체, 상대의 실체가 도통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없는 문장이 난무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문제없이 이해한다.
"철수야, 철수 이번에 성적 엄청 올랐다매? 축하해!"
"어우 고마워 영희야~ 영희가 과외 선생님 알려주고 영희랑 독서실 다닌 덕분이지 뭐~"
이 대화에서 철수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며, 영희는 도대체 누구일까? 이렇게 그들은 서로를 서로의 자녀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요즘의 젊은 학부형들은 그러지 않을 것 같긴 한데 90년대 초반생의 자녀를 둔 학부형들은 자녀의 이름이 곧 그녀의 이름과도 같았다. 엄마는 자녀로 인해 맺어진 관계이다 보니 자녀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것이 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 행동 양식이 너무도 싫었다. 본인의 이름을 스스로 상실하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고, 엄마라는 그 역할이 주는 부담에 깔린 채 그녀의 삶이 빛을 잃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내 바람과 달리 정작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아무렇지 않아 했다.
이제는 알게 되었다. 자녀로 인해 맺어진 관계라서 자녀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들은 자녀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던 나머지 본인의 이름 대신 자녀의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괜찮았던 것이다. 괜찮았다기보다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호칭이자, 직책이자, 훈장이었던 것이다. 아들이 전교에서 알아주는 우등생이었다면 아들의 이름으로 동네방네 불리는 것이 엄마에게는 기쁨 그 자체였을 것이며, 딸이 전교회장이 되었다면 엄마는 딸의 이름에서 무한한 자랑스러움을 만끽했을 것이다. 이것은 극적인 사례이지만 어떤 상장이나 성적표가 없더라도, 우리는 모두 존재 자체로 그녀의 자부심이기에 그녀들은 기꺼이 아들딸의 이름으로 불리길 선택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청춘의 중간지점에서 뒤돌아보며 나지막한 탄식을 내쉬고 있다면, 작은 별빛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온기를 잃어가고 있다면, 우리 모두 기억하자. 우리는 울음 하나 갖고 이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어떠한 노력과 수고도 없이 부모의 환영을 오롯이 받은 존재였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이 이름을 잃었을지언정 우리로 인한 기쁨을 잃지는 않았다는 것을.
엄마 고마워. 그래도 다음에는 수업 취소하기 전에 미리미리 알려줘야해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