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롤백 불가!
퇴사 결심은 내렸으나 갈 곳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부모님은 모두가 안정적인 환승이직을 하는데 왜 이렇게 무모한 결정을 하냐며 만류하셨다. 그래서 내 마음 속 깊이 끓어오르는 새로운 성장과 도전에 대한 갈망을 호소했다. 그리고 조직 개편과 함께 새로운 제품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고작 몇 달 일하다 퇴사하면 회사와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답했다.
여기서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는 점을 이제서야 인정한다. 중도 퇴사는 배신이 아니다. 프로젝트 초반이나 조직 개편 직후 퇴사하면 업무 공백이 발생하거나 동료들의 업무가 과중해질 수 있다. 그래서 도의적 책임감으로 내가 해야할 최선은, 철저하게 누락없이 인수인계하여 동료들이 일정 기간 동안 겪게될 혼란과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를 신속히 단축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것은 회사의 역할이자 책임이다. 그것이 응당 마땅 고도리인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내가 그렇게나 순진했다...헛똑똑이었지...그리고 부끄럽게도 난...잘될 줄 알았다...!
여튼 그 후 회사와 퇴사 면담을 진행했는데 이렇게 힘들게 퇴사한 사람은 보지도 못했다. 그 힘들다는 입사도 면접이 두 번뿐이었는데 퇴사 면담은 총 네 번이나 했다. 수차례의 설득에도 나의 결정이 완고하자 자회사로 옮기는 방안까지 나왔지만 끝내 퇴사를 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두 가지 확신이 들었다.
- 회사에서 이렇게 아껴주실 정도라면 밖에서도 충분히 잘 해낼 것이다!
- 이왕 도전하기로 결심한 만큼 자회사로 가는 안정적인 길은 택하지 않겠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갈 곳 없이 무모한 퇴사를 했다. 많지는 않지만 모아놓은 돈도 있겠다, 퇴직금도 받았겠다 두어 달은 조바심 내지 않고 구직 활동도 하면서 쉼을 누리기로 했다. 몇 년 동안 온 마음을 다해 일했고 불면증과 일자목으로 건강도 잃었으니 충분히 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마음껏 리프레시를 누렸다. 기약 있는 여행을 마치고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온 순간 현실은 나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판교 중심의 IT 업계 이직 붐이 급격히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서류 단계마저 통과하기 힘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당혹감을 숨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한 분기가 두 분기로, 반년이 지나갔다. 하지만 결국 문을 두드리는 것 밖에는 없기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쓰고 고치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강렬한 임팩트를 주고자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작성해보고, 다시 보니 부실한 듯 싶어 다양한 이미지와 도식을 넣어봤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내용을 전면 수정하면서 STAR 기법으로 구조를 바꿔보고 피그마로 트렌디하게 디자인해보기도 했다. 폰트와 레이아웃도 수 없이 바꿔가며 선배들에게 첨삭을 받았다. 정말로 안 해본 노력이 없을 정도로 한 번 수정할 때마다 5~6시간씩 며칠을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정성은 무용할 뿐이었다.
그 시기쯤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아, 나는 별 거 아니었구나...' 그리고 끝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인생 꼬였다.'
커리어 관리 못해서 인생이 꼬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