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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인 아파트의 함정 -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할인 아파트의 득과 실

by 희서

오산에서의 삶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영유아 교육 도시답게 무료 키즈카페, 어린이 도서관, 각종 어린이 행사가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단연 최고는 시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이었다. 나는 맞벌이에, 다자녀 우선권으로 아이 둘을 그곳에 보낼 수 있었다. 어린이집 앞으로는 탁 트인 잔디이, 뒤로는 엄마 품 같은 산이 있어, 아이들은 들에서 산에서 맘껏 뛰놀았다.

문제는 첫째 자주 아팠다는 거다. 떡두꺼비 같은 외모와 달리 면역력이 약던 아들은 병을 달고 살았다. 감기가 끊이지 않아 의사에게 물어보니, 감기 걸린 상태에서 감기가 또 걸렸다는 것이다. 뿔싸, 승 없는 감기라니.


겁 많고, 몸놀림이 둔한 아이(겁 없고, 재빠른 아이는 의외로 잘 안 다친다.)는 정형외과도 자주 들락거렸다. 날, 진료하며 건넨 외과 의사의 예언지 망언인지 모를 한마디는 아직도 가에 맴는 듯하다. "앞으로 자주 보겠네. 친하게 지내자고."(그의 예지력이 관통했음이 씁쓸할 뿐이다.)


덩치 큰 아들을 이끌고 병원을 오가는 일은 내게 주어진 일과 중 가장 육중한 임무였다.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약할까.' 내가 잘못 키운 건 아닐까 자책하던 마음도, 남편을 보는 순간 스르륵 사그라졌다. 187cm 키에, 몸무게 0.1톤에 가까운 남편은 피지컬은 운동선수이나 골골대는 게 병든 닭마냥 영 시원찮다. 면역력도 운동 신경도 유전이었 게다.


낙법도 민첩한 신경이 따라줘야 할 수 있는 것다. 우람한 아들은 장대한 나무가 온몸으로 바닥에 어가듯 러졌다. 그날도 미끄럼틀을 탔을 뿐이고, 엉덩이로 내려왔 뿐인데, 왜 다리가 부러졌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 가는 길은 고행길었다. 더운 날은 더운 대로, 추운 날은 추운 대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나는 병원에 가야 했다. 병세권이었던 수원 신혼집과는 달리, 이곳은 상권도, 병원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정류장이 있긴 했지만 버스는 보이지 않았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동네 사람들은 버스가 오는 시각에 맞춰 정류장에 나왔다.


역세권이 시세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수 전 우리는 그 부분부터 폈다. 집 바로 앞은 아니도, 십 분 걸으면 1호선에 닿았다. 그런데, 남편과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1호선이 지나가긴 했지만, 한 시간에 두어 대가 부였던 것.(딱 수원역까지만 열차가 잦았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넓은 집은 얻었지만, 생활이 불편해졌다. 또 하나의 문제는 집값이었다. 미분양 할인 덕분에 새집을 저렴하게 사서 좋아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잘 팔리는 집 같았으면, 할인이라는 미끼를 던졌겠냐 말이다. 인근 신도시 집값이 들썩여도, 이곳은 구한말 점잖은 양반처럼 꼿꼿이 앉아 었다. 신혼집을 정리할 때, 남편 말대로 인근 도시로 가야 했던 걸까.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나는 '후회'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것은 내 모습에 내 시간에 내 결정에 아쉬움을 두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간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 과거를 헤매다 보면 지금의 소중함을, 미래의 희망을 놓 수 있다. 후회에 발목 잡히는 순간, 사람이 얼마나 찌질해질 수 있는지 나는 몸소 체험해 봤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놓고 집에 와서 이불 킥했던 날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괜히 자존심 세우고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던 밤을, 망쳐버린 시험을 앞두고 더 망치도록 잠만 잤던 하루를 기억한다. 이쯤 되면 삶은 후회의 연속이 아닐까. 하지만 돌아보면 얼룩졌던 그 순간조차 지금의 나를 빚어왔다. 그렇다면 후회는 미련, 연민, 상처 아니라 나를 가르쳐 온 삶의 선생이었지도 모른다.


나는 운전 연수를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에게 한두 번 배우다, 옆에서 나보다 더 놀라는 남편 때문에 오히려 내가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결국 초보도 여유롭게 바라봐 주는 운전 전문 강사로 바꾸었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오가야 프로다운 친절도 함께 따라오는 모양이다. 떳떳하게 지급하고 돌아온 상냥한 가르침 덕분에, 내 운전 실력은 날로 향상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연장이 없으면 맨손으로라도, 사람은 어떻게든 배워나가고 적응하는 법이. 미분양 할인 아파트에서 나는, 값비싼 수업료를 냈고 운전을 배으며, 세상을 배워갔다.



사진 출처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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