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받았다. 샛별 보며 출근해 달빛 아래에서 퇴근하던 남편은, 독박 육아에 지쳐가는 나를 보며 더 힘겨워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조금이라도 교통이 편리한 인근 지역으로 이사하고자 마음먹었다.
오래 머물 거라 생각했던 곳이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더라도, 남편과 나는 이 집에 남아 노년을 보내도 좋겠다고 믿었던 곳. 그랬던 집을 겨우 몇 년 만에 내놓은 것이, 그럼에도 이놈의 집값이 여전히 제자리인 것이, 중개인과 예비 매수인이 수시로 드나들어 마음이 이토록 싱숭생숭한 것이, 이제 이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이 나는,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오산에 투자했던 집은 6개월 만에 새 주인에게 넘겼다. 물살을 탄 듯 가파르게 내려가는 집값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서였다. 매매 계약서를 쓰던 날, 집을 사는 중년 남성은 나에게 자못 부드럽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남 좋은 일 시켜서 어떡해요. 복 받으실 거예요." 그 한마디는 내 오기를 건드렸다. 오기는 곧 배짱이 되었고, 배짱은 또 한 번의 무모한 배팅으로 이어졌다. 성남의 재건축 아파트를 매도했으나, 세입자의 무리한 요구들은 나를 지치게 했고, 그 집도 일 년 만에 팔고 말았다. 결국 나는, 그 중년 남자의 '복 받을 거예요.'라던 덕담이 장기 프로젝트였음을 몸소 증명하게 됐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부동산 시장엔 연이어 규제의 파도가 밀려왔다. 처음엔 잠잠해지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5년 동안 서울의 아파트값은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규제의 틈새로 욕망이 자랐고, 그 욕망은 결국 시장의 논리를 이겼다. 투자는 타이밍의 예술이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기다림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기다림을 견디지 못했다. 팔면 올랐고, 오르면 찌질하게 후회했다. 무슨 사랑 노래 가사도 아니고, 나는 그렇게 늘 너의 뒤에 서 있었다.
봄이면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어 아침을 깨우던 곳, 여름이면 맞바람이 서늘하게 드나들던 볕 좋은 곳, 가을이면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도토리와 밤 열매를 주워 다니던 곳, 겨울이면 경사진 언덕, 우리만의 아지트에서 귀가 벌게지도록 눈썰매를 타던 곳. 나는 그곳을 떠났다.
경기도 화성시, 그 한복판에 자리한 동탄 신도시. 우리의 새 보금자리가 된 곳이었다. 한때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도시였지만, 지금의 동탄은 서울과 수도권 남부를 잇는 젊은 도시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최근 10여 년간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도시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조성된 동탄 1 신도시를 시작으로, 2010년대 중반에는 동탄 2 신도시가 본격 개발되었다. 이 두 구역을 통틀어 '동탄 신도시'라 부른다. 신도시답게 그곳엔 젊은 층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사 간 집으로 놀러 온 친정 엄마는, 길거리에 나이 든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며, 자신은 이 도시에서 적응하기 어렵겠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도시는 늘 활기가 넘쳤지만, 짧은 역사를 지닌 도시인만큼 그만의 고유한 정기를 느끼기엔 부족했다. 그러기엔 도시가 더 영글어야 했다.
동탄집을 계약하고 온 날, 바닥으로 가라앉은 마음이 좀처럼 부유하지 못했다. 여러 번의 부동산 투자 실패로, 집의 크기를 좁혀야 했고, 그럼에도 빚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계약한 집은 구조가 특이해서인지 인기가 없었다. 나는 희한하게도 그 집에 끌렸는데, 좋게 말하자면 독특한 것이 특별해 보였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움직였던 것은 그 집이 급매였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초기 분양을 받아 살다가, 재택근무를 하는 아내를 위해 보다 넓은 방, 넓은 집이 필요하여 거처를 옮긴다고 했다. 그녀는 일본인이었다. 일본 가정집을 가본 적은 없지만, 대략 이런 느낌이려나. 아련한 불빛 아래 옹기종기 놓인 가구들, 창마다 붙은 불투명 필름지, 문마다 매달린 수술 커튼, 기하학무늬의 벽지. 마치 주술사의 집으로 들어서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 나는 그곳에 찬찬히 발을 들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