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와 만나는 평일 오전 시간에 나는 엘른이 된다.직접 만나는 건 아니고 유선상 만나는 그는 내 전화 영어 선생님이다. 지난여름 아이들과 치앙마이 한 달 살이를 하며 영어 회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물론 기본적인 회화 수준만 된다면 외국 한 달 살이쯤 몸짓, 발짓, 번역기짓?으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치앙마이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일 년 내내 북적거리는 곳이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영어로 소통해야 할일이꽤 많다. 마음만 먹으면 좋은 외국인 친구도 얼마든지 사귈 수 있는 곳이 치앙마이다.
'다음에 이곳에 다시 온다면 그땐 유창한 영어 실력자가 되어 나타나리라.'
굳은 결심은 곧 실천으로 옮겨졌고, 치앙마이를 다녀온 후부터 지금까지 주말을 뺀 모든 요일엔 유선을 통해 지와 영어로 소통하고 있다.
지는 필리피노 남자 선생님이다. 두 살배기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이기도 하다. 영어 발음과 빠르기는 네이티브 수준이어서 따라가기 조금 벅찰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알아들은 척? Yes를 연달아 말하며 얼버무린다.(No보단 Yes로 사는 인생이 더 순탄하듯, 영어 회화에서도 Yes는 소통의 만병통치약 정도 되는 듯하다) 지는 착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유선을 타고 들려오는 지의조용하고도 따스한목소리를 통해,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순둥순둥한 사람이란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착해서 친절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바로 지다. 나는 이런 그와 통화하는 시간이 즐겁다. 물론 영어의 압박감은 내가 뛰어넘어야 할 산이지만.
"엘른, 오늘 계획은 뭐니?"
"수업 후에 걸어야지. 지금은 걷기밖에 못 하지만, 허리가 낫게 되면 수영도 다시 하고 싶어."
"빨리 낫길 바랄게. 다음 달부터는 수영할 수 있을 거야."
지는늘 긍정의 메시지로 격려해 준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은 깊이가 그윽하리라. 지의 응원으로 시작되는아침은 기분 좋은 느낌이 몽글몽글 솟는다. 참 고마운 '지'
"지, 너 '브런치 스토리'라고 알아?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었는데 말이야.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 여기서 글을 쓰다가 진짜 작가도 될 수 있어."
"정말? 굉장하다!"
'지'가 보내준 사진
지는 구독자가 되어 내 글을 열심히 읽어준다. 그리고 매일 아침이면"굿모닝, 엘른. 나, 네 글 읽었어."라며 글의 감상을 나눠준다.긍정의 메시지와 함께.
글은 매개체가 되어 지와 나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용기 낼 수 없었던 지난날, 나만 알고 있던 깊숙한 이야기, 가까운 이에게도 보일 수 없었던 아득한 감정까지. 글은 숨기지 않았다. 먼 나라에 사는 '지'는 글을 통해 그런 나를 알아가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사람과의 내밀한 정도는 만나온 시간과 장소와 비례하지만도 않은 거 같다. 가장 오래 보아온 가족에게 상처받는 이들을 보며,마음의 작은 일렁임에 반응하고, 애써주는 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 내 글에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마워.너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영어가 잘하고 싶어졌어. 너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영어 선생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