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벚꽃이흐드러진다는 동네에, 벚꽃이 지고 연둣빛 이파리가 고개를 내밀 즈음 이사를 왔다. 연둣빛 잎사귀는 이내 무성해지더니 고운 옷을 입었다가 벗었다. 그리고지금 마지막 계절 앞에 서 있다.낯을 많이 가리는 딸아이는 이사 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새 학기가 되고도 몇 달이 지나서야조금 친한 친구가 생긴 딸아이는학교생활에 이제야적응할 만한데 다른곳으로 가야 하냐며 불만을 토했다.
"어땠어? 선생님은 좋으셔? 친구들은 친절해? 급식은 맛있고?"
새로운 학교에서의 첫 수업이 끝난 아이를 붙잡고 여러 질문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엄마, 선생님이 참 좋으셔. 친구들도 먼저 다가와서 말 걸어주고. 급식도 정말 맛있었어."
딸아이의 밝은 미소를 보니 긴장했던 마음이 느즈러졌다.
다행히딸아이는 학교 가는 걸 즐거워했다. 도시의 친구들보다 순박한 이곳의 친구들에게 마음이 더 간다고 했고, 체험 활동이 많은 학교 수업도 흥미롭다고 했다.시간이 갈수록 아이는 점점 더 밝아졌다.그만큼 웃음도 많아졌다.
"엄마, 토요일에 친구랑 놀이터에서 만나 놀기로 했는데 나가도 되지? 3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는 친구랑 약속을 잡아 밖에서 뛰어노는 것도 좋아했다. 그동안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냈는데, 혼자 나가서 친구랑 놀 만큼큰 것인지, 이곳 친구들이 좋은 것인지. 뭐든 긍정적인 방향이다 싶어 약속을 허락해 줬다.
딸 없이 보내는 주말 오후. 주중에차고 넘쳤던 회사 업무로 녹초가 된 남편은 스르륵 잠이 들었다. 동네 탐방도 해보고 싶고 맛있는 커피도 한 잔 먹고 싶어, 자는 남편을 깨울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예전 같으면 황금 같은 주말 오후에 내리 잠만 자는 남편을 고운 시선으로 볼 리만무했다. 그런데 코를 드르렁 골며 숙면의 세계로 빠진 남편이 안쓰럽게 보이니 내 마음이 넓어진 건지, 늙은 건지? 포기한 건지? 뭐가 됐든 오죽하면 토요일 오후까지 깊은 잠에 빠져있을까 싶어, 이왕이면 풀충전모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남편이 자는 방,문을 조용히 닫아주었다.
"아들, 엄마랑 밖에 나가서 동네 투어할까?"
"아우, 나는 집에 있는 게 좋은데."
만화책에 빠져 히죽거리는 사춘기 아들에게는 예의상 물어본 것으로.
'혼자 나가보지 뭐!'
아파트 로비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제법 순한 바람이 손끝에 닿았다. 11월 중순에 이런 바람, 반갑다고 해야 하나, 반갑지 않다고 해야 하나. 지구 온난화와 미래 세대를 잠시 걱정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 홀로 동네 탐방'을 시작했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상냥했다.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같은 날이었다. 북적거리지 않는 지방의 작은 도시, 여유 있는 걸음에서 나오는 마음이 고양이의 솜털처럼 부드럽고 안온해진다.
'아, 여기에 옷도 파는구나. 아들 옷 좀 사줘야겠다.'
치킨 한 마리는 거뜬히 혼자 해치우는 아들의 식욕과 발육은 남달라서 내 몸무게를 뛰어넘은 지는오래 전일이고, 곧 내 키도 능가할 작정이다. 이런 아들이 입으면 딱 좋은 옷을 발견하고는 옷 가게 앞을 서성거렸다. 빨간 색상이 아들과 잘 어울리지만, 검은 옷만 찾는 암흑의 전사가 된 아들을 위해 최대한 톤다운된 색상의 맨투맨을 사고 기분 좋은 걸음을 사뿐히 옮겼다.
고요한 바람이 한 번씩 기지개를 켤 때마다 들려오는 풍경소리.
'분명 알록달록한 풍경에서 나는 소리일 거야.'
눈보다 귀가 먼저 반응한 소품샵으로 걸음을 옮기니 예상했던 것처럼 꼬까옷을 입은 듯, 고운 옷으로 차려입은 풍경들이 가게 지붕 앞에 매달려있었다.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조심스럽고도 두근거리는 걸음으로 가게 안을 들어가니 아니, 이건 웬걸. 하나의 소품처럼 고양이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사장님, 여기 고양이가 있네요?"
"원래는 엄마랑 같이 다니는 길냥이였는데, 가게 앞에서 몹쓸 사람이 얘 엄마를 납치해 가는 걸 본 후로는 겁이 나서 밖을 안 나가네요. 그래서 이렇게 같이 살 게 됐죠. 뭐."
담담하면서도 애정이 묻은 사장님의 이야기에 마음이 묵직해졌다.
'너, 그래서 여기에 사는구나. 소품을 하작일 법한데... 사장님한테 고마워서 점잖이 있는 거구나. 귀여운 녀석.'
고양이 티코스터와 딸에게 줄 고양이 가방을 사고 나서, 의젓한 고양이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건넸다.
' 잘 지내야 해. 세상엔 몹쓸 사람도 있지만 따스한 사람도 많아. 사랑으로 아픈 상처가 아물어지길... 가끔 올게. 안녕.'
'어떤 커피를 마셔볼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드립 커피, 카푸치노, 달달한... 그래. 달달한 크림 라테를 먹어보자. 아, 이 카페에서 파는 크림 라테가 맛있다고 했는데. 오늘이 영접하는 날이 될 줄이야.'
평상시 담아두었던 그 카페의 그 메뉴를 맛볼 생각에 두근대는 마음으로 카페 문을 열었다.
산미가 살짝 나는 원두를부드러운 우유로 감싼 라테 위에, 땅콩으로 갈아 만든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시원한 크림라테의 맛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 모금의 달콤함에 한 움치의 행복이 깃들었다.각자의 시간을 존중해 주고, 그 안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나 자신에 으쓱해하고 있는데 눈에 들어온 수상하고도 요상한 책 한 권. 마법에 이끌리듯 간 곳에 쓰여 있는야릇한 문구!
'오호라, 그래. 한 번 물어보자. 흠흠.. 마음을 가다듬고 신경이 분산되지 않게 최대한 집중해서, 우주의 모든 기운을 끌어모아...
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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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해 멋진 일들이 일어날지도.'
'이 요상한 책이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는구먼. 기분은 좋다. 달달한 커피도 맛있고, 행복이 바로 내 앞에 있구먼.'
집에 들어가는 길, 땀으로 범벅된 딸아이와 만나 편의점에 들렀다. 음료수를 벌컥 들이켜며 친구와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얘기하는 딸아이를 보니 모두에게 완벽한 하루였구나 싶어오늘을 찰칵 찍어 마음 서랍에 저장해 두었다.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은 날에 꺼내보려고. 그리고다시 힘내서 살아가 보려고.
글을 쓰고 나서.
완벽한 날이 아니었죠. 남편은 주말 오후에 잠을 자고, 아들은 집 밖은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 딸은 친구와 놀러 나갔고요. 이 글의 제목인 '이토록 완벽의 날의 외출'은 반어적 의미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우울한 날의 외출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 상황을 완벽히 역전시킬 수 있는 힘. 그 힘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글로 담고 싶었습니다.이토록 완벽한 날을 만들어 갈 당신의 하루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