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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수련일기

그건 사랑이었네

by Stacey J

한동안 반복적으로 할머니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할머니는 나와 눈을 마주치거나 직접 말을 건네지 않으신다. 다만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이다.

때때로 자각몽을 꾼다. 주로 할머니가 나오는 꿈이 그렇다.

몽롱함의 여러 단계가 중첩되어 흐려진 의식 사이로 아주 얇고 투명한 틈이 보인다. 틈 사이으로 비추어 나오는 빛을 보는 찰나의 순간 갑자기 깨어있는 상태처럼 선명해진다. 보는 나를 알아차리는 나를 인지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


5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오는 비슷한 꿈이 반복되자 할머니가 편치 않으신지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이미 저 편으로 흘러간 지난 꿈을 더듬어본다. 어떤 느낌이었지? 분명히 불길하거나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다. 아마도 그저 나를 보러오신 것인지 모른다.

할머니는 너를 걱정하고 계신거야.

꿈 이야기를 털어놓은 며칠 뒤, 아빠는 그런 결론을 내려주셨다.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이니까 아빠가 더 잘 아시겠지. 아빠 말씀대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칠 분이 아니다. 어디서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걱정해주시는 분이었으니. 그러자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더는 할머니를 걱정하지 않을께요. 그리고 저는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갈 거에요."

일상 속에서, 명상 중에 때때로 할머니가 떠오르면 마음으로 메세지를 보냈다.


조건 없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적 있다면
그것만으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자애명상(Loving kindness meditation)을 할 때 먼저 사랑의 상태로 우리의 의식을 유도한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힌 뒤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할 준비가 되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던 하나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부모님의 사랑, 연인이나 배우자, 친구 또는 반려동물의 사랑일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단편적인 기억도 좋다. 그 때의 나로 돌아가 그 사랑을 경험하고 당시 느꼈던 감정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불씨를 피우기 위한 동작과도 같다. 차츰 왼쪽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지고 얼굴 근육의 힘이 릴랙스되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갈지 모른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사랑의 에너지 속에 머무르며 우리 내면에 잠들어 있는 여리고 부드러운 본성이 기지개를 켜고 온 몸의 세포를 통해 퍼져나오는 것을 느낀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선명해지면서 조금씩 더 멀리 확장됨이 느껴질 것이다.



나 자신이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자애명상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시작한다. 순차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 아직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상처주고 미워한 사람들을 위해서 깊이 명상한다. 그렇게 내면에 있는 사랑과 자비를 일깨워서 마지막 단계까지 이르게 되면 비로소 나와 타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든 살아있는 대상에 대한 연민이 가득해진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기분이 든다.






자애명상을 할 때 할머니의 사랑을 종종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내게 조건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일요일마다 할머니댁에 가는 것은 무조건적인 루틴이었다. 북촌의 한옥집, 삐그덕 거리는 오래된 현관문이 열리면 할머니는 늘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ㄷ자 구조의 전형적인 한옥집의 부엌에서 할머니는 늘 대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셨고 나는 창가의 식탁 의자에 앉아 할머니가 타주는 미제코코아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사촌들과 놀거나 안채에서 티비를 보는 것보다 할머니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

할머니 손을 잡고 동네 마트에 장을 보러가거나 약국가는 길을 강아지처럼 따라나서는 것도 좋아했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행동이 느렸던 내가 진심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젊고 빠릿한 엄마의 잔소리와 핀잔을 피해 엄마가 꼼짝못하는(?) 할머니의 집에 가는 일요일은 어린 나의 힐링데이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할머니가 그렇듯 할머니는 손녀인 내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상장을 타오거나 일등을 하지 않아도 그저 볼 때마다 기특하다고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밥을 먹을 때 구운 갈치며 고등어를 발라 수저 위에 얹어주셨다. 무엇이든 더 먹으라고 귤이며 사과, 감을 깎아 손에 들려주고 더운 아랫목 이불 안에 두 발을 쏙 넣어주셨다. 그런 사랑을 할머니가 정정하셨던 십여년 전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른다.

며느리인 엄마는 할머니에 대해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고부관계에서 받은 원망과 서운함도 있다. 모든 사람이 그녀에 대해 다른 입장과 추억을 가지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온전히 나와 할머니의 관계에서 받은 사랑은 나를 튼튼하게 해주는 자양분이 되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줄 수 있을까?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은 반의 반도 돌려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이 아닌 어떠한 상태 또는 에너지장에 가깝다. 우리에게 익숙한 에고의 시선으로 비교하고 판단하는 순간 본질에서 멀어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적인 감정에서 한걸음 떨어져 핵심을 보는 연습이 늘 필요하다.

사랑은 두 음절의 단어로 충분히 담아낼 수 없을만큼 폭넓은 다양성과 깊이를 지닌 무엇이다. 다른 언어적 표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아쉽다.

척박한 바위 틈에서 피어난 들꽃처럼 사랑의 빛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 그래도 인간의 본성에 사랑이 있기에 오늘날 이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누군가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져온 불씨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기를 '선택'할 수 있는 건 오직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그러니 우리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기를, 더 많이 웃을 수 있기를, 먼저 안아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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