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하마 Oct 27. 2024

내향인 엄마의 이기적인 생각-10

내향인 엄마의 이기적인 인간관계

  학창시절 난 반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아이였다. 단짝 친구 한두명과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며 쉬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랑 비슷한 친구와 다이어리를 꾸미고 교환일기를 썼다. 신화 오빠들 이야기, 한일월드컵 박지성 김남일선수 이야기를 했다. 그 와중에 어떤 친구 무리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당시 유행하던 개그콘서트 복학생과 출산드라를 흉내내기도 했고 조피디의 친구여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기도 했다. 그렇게 노는 활발한 친구들을 구경하기에는 참 재밌었지만, 거기 꺼어들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활발한 친구들이 참 부러웠고, 그들에 비해 내 모습은 아쉽게 느껴졌다. '나도 저렇게 인기가 많은 분위기메이커 친구가 되고 싶다.'라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노력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았고, 노력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와글와글하고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누구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할 지 갈피가 안 잡혔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몰라 멍하니 있기 일쑤였다. 대학생일 때도 선생님이 돼서도. 하지만 그 시절 나는, 인간관계는 넓어질수록 좋고 많은 사람들에게 싹싹하고 명랑하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정답인 줄 알았다. 지금은 MBTI성격유형이 대중화되어 내향형의 사람들의 성향을 많이 존중하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폭넓게 사람을 사귀고 모임에서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꼭 필요한 사회적 능력인것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나 또한 힘들어도 억지로 그 정답에 맞추려 했다.


  임신하고 모르는 점이 많아 맘카페에 가입했더니 그곳에선 모두가 각종 엄마모임을 하고 있었다. 산후조리원 동기 모임(조동모임), 같은 문화센터 클래스 엄마들 모임, 어린이집 엄마들 모임, 유치원 엄마들 모임, 초등학교 학부모 반모임 등.. 아이가 커갈수록 그 모임의 성격을 달리하며 진행중이었다. 그런 모임에 참여한 글에는 댓글이 달렸다. "서로 의지가 되고 좋아요", "아이들끼리 친구 만들어줬어요", "아이들 육아랑 교육 정보도 다 여기서 얻는 것 같아요"라는 댓글들을 보며, 나도 시기에 맞게 저 모임을 열심히 참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산후조리원 동기모임부터 나에게는 고난이도였다. 생후 백 일 남짓한 아기들이 모유를 얼만큼 먹는지,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는지, 통잠은 얼만큼 자는지 서로 비교했다. 어떤 육아용품이 얼마나 유용한데 또 얼마나 비싼지 은근히 자랑했다. 우리 딸이 분명 좀 작고 적게 먹지만 소아과에서 '이정도면 정상 발달'이라고 했는데도 덜컥 불안해졌다. 육아휴직중이라 돈도 없는데 유용한 육아용품을 갖추지 않은 것이 우울해졌다. 난생 처음 아기를 키워보며 안 그래도 매일매일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 깨달으며 눈물로 지새고 있었는데. 같은 처지의 엄마들이랑 이야기하다보면 위안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임 중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해주고 웃어주느라 진이 다 빠졌다.


  딸아이가 조금 자라 문화센터 수업을 다녔다. 같은 수업을 듣는 엄마들과 수업이 끝난 후 함께 유모차를 끌고 카페에 갔다. 늘 문화센터 수업이 끝나고 낮잠을 자던 딸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안 재워주고 다른 곳에 데려가자 영문을 모르고 징징댔다. 잠투정하는 딸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억지로 웃으가며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너무 힘이 들었다. 엄마들은 "같이 있으니까 시간이 더 잘간다"하며 카페에서 나와 한 집에서 모여 아이들을 놀게 하자고 했다. 그 집에서 딸아이를 재워볼까 하고 따라갔으나, 낯선 곳에서 딸아이는 잠이 들지 않았고, 간만에 동지들이 모였다고 즐거워하는 엄마들은 수다를 그칠 줄 몰랐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딸아이를 데리고 나만 먼저 나왔다. 그날 이후로는 문화센터 수업이 끝나면 엄마들에게 인사만 하고 곧장 집으로 도망가곤 했다.


  주변 어른들도, 그 시절 육아서적에서도 아기에게 말을 많이 걸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해 주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난 딸아이를 데리고 집에 있으면 내가 아이의 사회성 발달 기회를 안 주는 엄마가 돼버린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4살때까지 제대로 된 말을 못 했던 우리딸은 나의 죄책감을 부채질했다. 엄마가 수다쟁이가 못되고 활발하게 모임을 하지 않아서 우리 딸이 말이 너무 늦다는 막말까지 들으니 다 때려치고 싶었다. 내가 천성적으로 말이 별로 없고 혼자 있는게 좋은걸 어떻게 해. 나도 어릴 때, 엄마가 발달장애가 있는 내동생만 데리고 치료실이며 병원만 순회하느라 나랑은 수다도 안 떨고, 집에만 있었는데. 근데 나 별 탈 없이 잘 자랐단 말이야. 하는 생각을 하며 나에게 상처를 준 통념들에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게 정당한 의문인지 내 임무를 다하지 않는 자기합리화인지 헷갈려하면서.


  결국 어느 시점에서 다 포기해버렸다. 학교에 복직하고 워킹맘이 되면서 어떤 모임에 낄 여유조차 없어졌다. 꾸역꾸역 내 할일을 하고, 딸아이와는 집에서 함께 촉감놀이를 하고 그림책을 읽으며 조용히 놀았다. 시끌벅적한 장소에서 남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우리 딸도 덜 떼쓰고 덜 예민했다. 덩달아 나도 조금 편안했다. 평일 저녁에 딸아이 또래의 엄마들이 초대해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 '다음'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딸아이는 내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데려가지 않아도, 함께 왁자지껄하게 놀지 않아도 나름대로 잘 자라났다. 유치원에 입학하자 처음으로 단짝 친구가 생겼다. 자신과 비슷하게 얌전하고 조용하게 노는 친구를 사귀어 누구보다도 즐겁게 지냈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우리 딸은 여전히 조용하고 얌전하다. 얼마 전 "엄마, 반장이 뭐야? 3학년 때부턴 반장을 뽑는대"라고 묻길래 설명해줬더니, "그렇구나... 나는 못할 것 같아."라고 단칼에 선을 긋길래 한참을 웃었다. 친구들을 이끄는 리더십도 없고 활발하게 놀진 않지만 나름의 자기 스타일대로 학교생활을 즐겁게 한다. 비슷한 단짝친구와 둘이 손을 꼭 잡고 조용히 놀다가 함께 하교하는 모습이 참 귀엽다. 차분하고 섬세해서 수업시간에 오히려 더 잘 집중하고 과제도 착실히 한다. 아이들의 모습이 다 다르고 각자의 모습이 존중받는 요즘이다. 이제 나의 학창시절과 다르게 어른들이 "친구들 많이 사귀고 다같이 친하게 지내야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나랑 맞는 친구와 잘 지내고, 다른 아이들과는 갈등이 생겨도 서로 잘 해결하며 상처를 줄 정도로 다투지는 말라고 가르친다.

 

  이제 내가 나서서 엄마들과 친해지지 않아도 된다. 딸아이가 친구가 생겨도 그 엄마와 억지로 만나지 않는다. 대신 딸아이 친구만 우리 집에 초대해 두 아이를 잘 보살핀다.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엄마가 누구와 억지로 친해져야한다는 말은 틀린 것 같다. 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말이다.


  엄마들이 모여 육아와 교육 정보를 나눌 필요도 없어졌다. 육아와 교육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유튜브며 블로그며 본인 저서에 넘치도록 소개했다. 그 정보만으로도 나에겐 벅차서 더 이상의 정보는 나에겐 과부하를 줄 것 같다. 게다가 엄마들의 많은 정보는 엄마들마다 조금씩 달라 나처럼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은 부화뇌동하기 딱 좋다. 그냥 전문가들의 지식을 기준으로 잡고, 딴 사람 말고 우리 딸의 마음을 잘 듣기로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전과 다르게 억지로 어떤 모임에 나가진 않는다.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혼자 보낸다. 가끔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소규모로 만난다. 특수교사로서 내가 본받고 싶은 선배 선생님, 교육관이 잘 맞아 진심으로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동료 선생님들, 어릴 때부터 허물없이 속 이야기를 나눴던 동창들 몇 명. 일대일로 대화할 때가 가장 좋고 아무리 많아도 4명을 절대 넘지 않는다. 그리고 모임 시간은 3시간을 넘지 않는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는 지치지 않는다. 억지로 미소짓지 않아도 미소가 나오고, 진심으로 그 사람이 궁금하고,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고,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오히려 에너지를 얻고 힘을 내서 일상을 더 충만하게 가꿀 수 있다. 이제 내 인생에서 그런 관계만 소중하게 가져가고 싶다.


  

  


이전 09화 내향인 엄마의 이기적인 생각-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