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 엄마의 이기적인 생각-8
내향인 엄마의 이기적인 독서 취향
혼자 오는 도서관 카페. 열람실에서 막 빌린 책과 막 내린 아메리카노. 둘 다 나를 무한 행복하게 만드는 따끈따끈함을 풍긴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조합이다. 어쩌다 이벤트처럼 우리 딸 하교보다 이른 퇴근을 할 때, 근무하는 학교 방학이 우리 딸 방학보다 하루라도 빠를 때 지체 없이 향한다.
설레는 맘으로 열람실부터 들어간다. 3년 전쯤부터.. 그러니까 30대 중반에 접어든 이후부터는 주로 800대 한국현대소설 코너에서 맴돈다. 최은영 작가님, 김혜진 작가님, 한강 작가님처럼 예민한 감수성으로 타인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는 소설에 끌린다. 소설과 함께 많이 찾는 심리학 에세이집도 그렇다. 너무 잘난 사람들이 '나를 본받아라'하는 자기계발서보다는, 자신의 상처와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이 와 닿는다.
평소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어떻게 말로 풀어야할지 몰라 내 마음인지도 몰랐던 그 생각들이 신기하게도 그런 작품들에서는 화자의 말이 되어 아름답고도 적확한 문장으로 드러나 있다. 그게 너무 감동적이어서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나의 손은 바빠진다. 나의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그래, 나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회가 되면 이런 말로 표현하면 좋겠다 하면서.
인기 작가들의 소설이라고 다 내게 맞는 것은 아니다.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허를 찌르는 반전이 숨겨 있는 소설은 왠지 편안하지가 않다. 베르나르베르베르, 기욤 뮈소, 스티븐 킹과 같은 대작가들의 작품임에도 나에게 맞지 않는다. 한국 작가님들중에서도 박범신 작가님, 김진명 작가님. 김영하작가님의 소설은 손에 땀을 쥐고 볼 만큼 흥미진진하고 그 상상력과 재치 있는 문장력에 감탄하지만 나는 기가 쏙 빨리는 느낌이다. 나의 마음에 여운과 감동을 주는 소설들은 아무래도.. 최은영작가님, 김혜진작가님, 한강 작가님들이다.
20대에는 지금과 정 반대였다. 알파걸이 돼라고 하는 자기계발서들에 푹 빠져 있었다. 내가 20대였기에 그런 것에 감흥을 느낀 것도 있지만 2000년대초반 그 시절엔 그런 책들이 주류를 이뤘다. 20대 여자들에게 멋진 커리어우먼과 여성 리더가 돼라고 격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학창시절에 꽤 성실했던 나는 꾸준히 괜찮은 성적을 냈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중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기도 했다. 그랬으니 건방지게도 '내가 제일잘나가'가 투애니원이 아닌 내 노래인 줄 알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시간이 많던 그 시기에 늘 마음의 여유가 없고 기가 빨렸다. 나는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형도 아니고, 성취를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쉽게 지치는 사람인데 그런 나의 기본 성향을 철저히 무시하고 살던 시절이었다. 억지로 모임에 나가고, 인싸인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이런저런 회식을 거절하지 못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남들보다 뭔가를 더 해서 멋진 여자처럼 '보이기'위해 대학원도 다니도, 해외 학회도 무리해서 가고, 퍼스널트레이이닝까지 받았다. 책을 읽을 때도 뭔가 똑똑한척을 해야할 것 같아 사회과학서적들(총균쇠, 한국 자본주의, 정치썰전 등)을 꾸역꾸역 수능공부하듯 읽어댔다. 물론 그 결과들이 뿌듯하긴 했지만, 그 과정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버거웠다. 안 맞는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면 발이 아픈 것처럼.
결혼 생활과 육아를 시작하며 30대 초반부터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육아휴직을 하니 남편 월급만으로는 너무나 벅찬데 신혼일 때보다 지출은 훨씬 커서 멘붕이 왔다. 자연스레 재테크에 관심을 갖고 부동산, 주식투자에 관한 책을 수집해 읽었다. 책을 읽으며 찔끔찔끔 투자도 시도해봤지만 너무 힘들었다. 가뜩이나 내 성향에도 안 맞는 일을 아기돌보느라 시간을 쪼개서 하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육아를 하니 육아서적도 많이 읽었다. 육아의 노하우를 다룬 책들은 내가 20대에 자기계발서에서 봤던 알파걸들이 그대로 엄마가 된 느낌이었다. 수많은 그림책, 수제 장난감, 엄마표 이유식, 신체 및 미술활동 등 '좋은 엄마라면 하거나 갖춰야 할'목록들이 책을 읽을수록 점점 늘어났다. 게다가 마냥 엄마랑 그저 행복하게 함께 놀고 먹고 자고싶은 우리 딸은 그 목록들을 순조롭게 따라주지도 않았다. 점점 몸도 마음도 여유를 잃어갔다.
그러다 우리 딸에게, 남편에게 이유 없이 짜증내고 늘 울상인 내 모습을 보게 됐다. 아차 싶었다. 책읽기는 내 여가활동인데 여가활동 시간에 의무감을 가지고 해야 할 것들을 하려고 발버둥쳤으니 지칠 만도 했다. 그걸 30대 중반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지친 몸과 마음이 왜 지쳤는지 살피는 심리학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흥미로운 제목들 위주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내 성향에 맞는 독서 취향이 확고하게 생겼다. 그 위주로 책을 읽으니 점점 마음의 여유가 찾아왔고, 독서가 '자기계발의 숙제'시간이 아닌 진정한 여가시간이 됐다.
이제 자기계발은 그만하고 알파걸이 되려고 아등바등할 나이도 지났다. 나란 사람은.. 이래저래 목든을 만들어 크게 수익을 낼 생각을 하면 설레기보단 덜컥 겁이 나는 사람이기에 그냥 불필요한 소비 안 하고 미니멀한 삶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려 한다. 그리고 육아서적이 아닌 우리 딸의 마음을 살피며 육아를 해야겠다. 그 대신 나는 내 마음을 돌아보며 내 주관을 뚜렷이 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 공감하는 만큼 내게 소중한 사람들 마음에도 깊이 공감하며 소통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앞으로 또 어떻게 생각이 바뀌고 어떤 다른 책을 읽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이런 소설이나 에세이집을 질릴 때까지 실컷. 혼자 카페에서 조용히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