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 엄마의 이기적인 생각-6
내향인 엄마의 이기적인 스타일링
매일 전날 밤이면 다음 날 입을 옷을 고른다.
매일 입는 꼭 필요한 옷으로 갖춰놓았더니 고르는 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 2단 행거 1개에 나의 사계절 옷이 다 들어간다.
매일 비슷한 옷을 고른다. 상의는 스탠다드 핏의 흰색, 혹은 연한 파스텔톤이다. 무늬나 장식이 없이 단순하고 밋밋하지만 밝고 시원한 색감이라 청량한 느낌이 든다. 하의는 부츠컷이나 와이드핏 청바지, 어두운 색 슬랙스이다. 상하의 모두 너무 헐렁해도 작은 키가 너무 작아보이고, 너무 타이트해도 짧은 목이나 다리가 더 짧아 보인다. 하체에 비해 상체가 가늘고 어깨라인 모양이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 입으면 내 체형의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릴 수 있다.
20대에는 다양한 색, 장식,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다면 지금은 매일 비슷하게 코디한다. 20대에는 매일 비슷한 코디를 해버리면 나를 꾸밀 줄 모르는 밋밋한 사람이 돼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정 반대이다. 매일 비슷하게 입어보니, 나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찾아 내 개성과 매력을 살릴 수 있게 됐다.
몇년 전 어느 날, 안방에 딱 맞게 짜여진 제법 큰 옷장조차도 곧 터질 듯한 모습을 보고 현타가 왔다. 옷의 가짓수는 정말 많은데 입을 옷은 하나도 없어서 매일 아침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도서관에 갔다가 곤도마리에님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적인 미니멀리스트 곤도마리에님은 옷장을 미니멀하게 갖추기 위해 '설레는'옷만 남겼다고 한다. 본인에게 가장 어울리고 편안한 스타일이 '가디건에 원피스'라는 것을 알고 그런 것 위주로 남기자, 그 후부터 가디건+원피스 조합이 본인의 시그니처 스타일이 됐다고.
옷을 비우기로 결심은 했는데 평소 패션 감각이나 꾸미는 센스가 별로 없던 나는 어떤 스타일이 내게 어울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큰 마음을 먹고 퍼스널컬러 진단을 받았다.
진단 결과는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20대에 붉은 계통의 레이스가 많이 달린, 정말로 페미닌한 스타일의 원피스를 꽤 많이 입었었다. 퍼스널컬러 이론에 따르면 그런 것들은 '봄웜트루톤'계열의 사람들이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다. 나의 퍼스널컬러는, 그와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여름쿨톤라이트' 컬러였다.
여름쿨톤라이트는 흰색이 베스트이고, 흰색에 물감(물감도 이왕이면 시원한 푸른 계열로) 한 방울 정도 떨어뜨린 파스텔톤이 잘 어울린다. 그리고 화려하고 사랑스럽기보다는, 심플하고 청순한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고 한다. 색깔은 흰 색이나 아주 연한 하늘/연두/보라색이 잘 받는다. 핏은 섹시함을 강조하는 타이트한 핏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나치게 힙하고 넉넉한 핏도 별로다. 적당히 쇄골과 힙라인이 살아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스탠다드핏이 청순함을 더한다.
나의 패션감각을 절대 믿지 못하는 나는 당연히 전문가의 진단을 100%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여름쿨톤라이트에 부합하는 색, 핏의 옷들만 옷장에서 남겼다. 나머지는 기부하거나 중고장터에 팔았다. 그러자 옷장에 여유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매일 비슷한 옷만 입게 됐다.
그리고 옷 가지수가 많지 않으니 옷을 더 소중히 관리하게 됐다. 옷 디자인과 색상은 거의 정해졌으니 옷을 고를 때 이 부분은 많이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옷감을 주의깊게 본다. 옷이 몇 개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보풀이 나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을지를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됐다.
자유로운 영혼이었지만 스타일에 대한 안목이 제로였던 20대때도 인터넷으로 옷을 많이 샀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조악한 옷들이었다. 아기를 낳고서는 직접 매장에 나갈 여력이 더 없어져 마찬가지였다. 아기를 돌보다 너무 지치고 힘들면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다가 쇼핑몰에 들어가고, 아무 옷이나 충동적으로 사는 일이 많았다. 페미닌하고 화려한 옷들이 그럴 땐 눈에 잘 들어왔고, 제대로 보지 않고 산 인터넷 옷들은 한 번 입으면 보풀이 생기거나 색이 바랬다. 처음 입었을 때 폼이 절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옷은 많은데 입을 옷이 항상 없던 것이리라.
나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찾은 이후로, 메이크업도 그에 맞게 변했다. 여름쿨톤 라이트에게 맞는 메이크업은 한 듯 안한 듯 자연스럽고 깨끗한'메이크업이다. 그래서 그 많던, 어울리지도 않던 색조화장품은 모두 비웠다. 어쩐지 블러셔나 섀도를 바를 때마다 얼마 바르지도 않았는데 어색해지기 일쑤였다. 내가 메이크업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타일 자체가 색조화장이 어울리지 않는데 할 필요가 없겠다 여겼다. 그래서 딱 5가지. 선크림, 메이크업베이스, 파운데이션, 투명 파우더, 연분홍색이 나는 립밤만 남겼다. 나는 매일 이 5가지 화장품으로 똑같이 화장을 한다. 한 듯 안한 듯 피부톤만 밝혀주는 3분컷 메이크업(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그 많던 조악한 귀걸이, 목걸이도 다 비웠다. 귀걸이는 콩알만한 진주귀걸이 하나만 남겼다. 청바지로 캐주얼하게 입은 날에도, 슬랙스와 블라우스로 격식을 갖춘 날에도 모두 무난하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목걸이는 아예 하지 않는다. 목이 짧은 나는 ..안타깝게도 그 어떤 목걸이를 해도, 목걸이를 안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요즘은 매일 코디하는 것도, 메이크업하는 것도.. 항상 비슷하게 하는데도 오히려 너무 즐겁다. 20대때보다 30대후반에 접어든 지금 더 화사하고 예뻐졌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친정엄마는 내가 어릴 때는 물론, 성인이 된 후에도 내 옷 쇼핑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고 나서는 "엄마 옷이나 사"라고 자주 이야기했지만, 본인 옷을 사는 것은 즐겁지 않다고 했다. 친정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본인 옷보다는 내 옷을 사고 내가 얼마나 예쁠지 기대하며 설렜다고 한다. "너도 애미가 돼봐라, 이 마음 이해될거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게 고맙기도 했는데 묘하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역시! 친정엄마랑 나는 달랐다. 나는 엄마가 됐어도 우리 딸의 스타일링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딸아이는 매 년 옷 사이즈가 달라진다. 어차피 한 철 입고 못 입을 거 비싼 옷은 사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불편하고 예쁜 옷보다 적당히 편한 옷이 많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딸 옷은 큰 고민하지 않고 고른다. 음.. 더 솔직히 말하면...내 옷 살때만큼 딸래미 옷은 신중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내 옷이 더 예뻤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옷 쇼핑하는게 훨씬 즐겁고..설렌다. 우리 딸이 좀더 크면, 본인 옷은 일찍부터 본인이 골라 사면 좋겠다. 다 엄마가 먼저 사주느라 옷 고르는 안목을 키우지 못한 나랑 다르게.. 우리 딸은 본인의 찰떡 스타일은 스스로 일찌감치 찾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