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시간의 밀도는 다릅니다. 겨울의 오후 4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름이라면 아직 한낮의 열기가 남아있을 시간이지만, 겨울의 4시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하루와 작별할 준비를 하는 시간이니까요. 창밖은 벌써 거무스름한 어둠이 깔릴 기미가 보이고, 공기는 한층 더 차가워집니다.
직장인에게 이 시간은 마음의 겨울과도 같습니다. 퇴근까지 남은 시간은 더디게만 가는데, 창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지니 왠지 모를 조급함과 우울감이 밀려오기도 하죠.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물어가는구나" 하는 상실감이 짙게 배어 드는 시간입니다.
겨울 태양은 겸손합니다. 여름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꼿꼿하게 내려다본다면, 겨울 태양은 남쪽 하늘 낮은 곳에서 비스듬히 우리를 바라봅니다.
여름에는 블라인드를 치고 피하기 바빴던 햇살이 겨울이 되면 사무실 안쪽 구석진 자리, 내 발밑까지 길게 누워 들어옵니다. 그 빛의 색깔을 보신 적 있나요? 차가운 대기를 통과하며 걸러진 겨울 햇살은 투명하고 쨍한 황금빛을 띠고 있습니다. 겨울이 건네는 한정판 선물 같습니다. "추운 날씨에 고생 많지? 내가 안쪽까지 들어가서 안아줄게." 이렇게 말하며 빛이 팔을 길게 뻗어 우리를 감싸 안는 듯한 느낌입니다.
풍요로울 때는 소중함을 모릅니다. 여름날 쏟아지는 햇볕 아래서는 그늘을 찾기 바쁩니다. 손발이 시린 겨울이 되어서야 깨닫습니다. 등 뒤에 닿는 햇살 한 줌이 얼마나 거대한 난로였는지를요.
겨울 오후 4시의 볕은 결핍이 만드는 가치를 가르쳐줍니다. 바깥 공기가 차가울수록,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의 온기는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기에, 찰나의 순간이 간절하게 다가옵니다.
이 시간의 햇살은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이는 자연의 핫팩이자, 긴 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 충전기입니다. 온종일 인공 조명 아래서 긴장했던 몸이 이 짧은 빛을 만나는 순간 스르르 풀리는 경험을 해보신 적 있나요?
식물들은 해가 비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겨울의 우리도 잠시 체면을 내려놓고 본능에 충실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오후 4시, 알람을 맞춰두고 잠시 하던 일을 멈추세요. 스스로 '양지 식물'이 되어보는 겁니다.
볕 찾아 삼만리: 사무실이나 집 안에서 햇살이 가장 깊게 들어오는 곳을 찾으세요. 그곳이 비상구 계단이든, 창가 쪽 동료의 자리든, 옥상 귀퉁이든 상관없습니다. 볕이 든다면 그곳이 명당입니다.
등 내어주기: 그 빛 속에 잠시 등을 돌리고 서보세요. 등 전체로 퍼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껴보세요. 딱 3분이면 충분합니다. 등이 따뜻해지면 굳어있던 마음도 노곤노곤하게 풀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 감상하기: 겨울 햇살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바라보세요. 비스듬한 빛 때문에 일 년 중 가장 길쭉한 그림자가 생길 겁니다. "와, 내 다리가 이렇게 길었나?" 하고 웃어보세요. 길어진 그림자는 당신이 그만큼 긴 하루를 잘 버텨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겨울 해는 야속할 만큼 빨리 떨어집니다. 4시의 황금빛도 금세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오겠죠. 짧은 순간 몸에 스며든 온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볕 한 줌의 기억으로 퇴근길의 칼바람을, 긴 겨울밤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해가 짧다는 것은 아쉽지만, 그만큼 만나는 순간이 밀도는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오후, 창가에 비스듬히 떨어지는 겨울 햇살을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짧은 시간 동안 비춰주느라 애썼어. 덕분에 따뜻했어."
그렇게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며, 겨울이 주는 찰나의 선물을 남김없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추운 계절일수록 우리는 더 자주 따뜻해질 자격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