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아침 풍경을 가만히 내려다본 적이 있으신가요? 출근 시간의 지하철역이나 대로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보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러닝머신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누구 하나 멈춰 서 있는 사람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바쁘게 걷고, 뛰고, 어딘가로 향해 실려 갑니다.
지하철 환승 통로를 걸을 때를 떠올려보세요.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 있다 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이 빨라지죠.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며 걷다 보면, 내가 걷고 있는 건지 인파에 떠밀려 가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귀에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꽂고, 시선은 스마트폰 액정에 고정한 채, 우리는 '목적지'라는 깃발을 향해 맹렬히 돌진합니다. 그곳에 늦게 도착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에요.
저도 그랬습니다.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신호등의 숫자가 깜빡이면 저도 모르게 전력 질주를 하곤 했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땀이 나도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2분을 아끼는 것이 '승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반대로 눈앞에서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어버리면 세상에서 가장 큰 불운을 맞이한 사람처럼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아, 젠장. 조금만 더 빨리 걸을걸.'
겨우 1분, 길어야 2분 남짓한 시간.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왜 그리도 아까웠을까요? 횡단보도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서서 신호등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은, 출발 총성을 기다리는 단거리 육상 선수 같았습니다. 온몸의 근육은 긴장되어 있고, 마음은 이미 길 건너편에 가 있었죠.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은 어떠신가요? 누군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늘 종종걸음을 걷고 있진 않은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도 전에 닫힘 버튼을 연타하고 있진 않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현대인들이 겪는 이런 만성적인 조급함을 '시간 기근(Time Famine)'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기근처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끼며 항상 허기져 있는 상태를 말하죠.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할 자원' 혹은 '돈'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될 것 같아."
"남들은 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아 불안해."
불안감이 우리를 떠밉니다. 우리는 멈춰 있는 순간조차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다. 신호 대기 중에 스마트폰으로 뉴스 기사를 훑어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밀린 카톡을 확인하고,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3분 동안 설거지를 해치우죠. 틈새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갓생(God+인생)'이라 부르며 칭송합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건 중요합니다. 하지만 코치로서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분초를 다투어 아낀 시간들로 인해, 당신의 마음은 더 여유로워졌나요? 아니면 더 쫓기는 기분이 되었나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시간을 아끼려고 발버둥 칠수록 시간의 노예가 되어가는 기분을 느낍니다. 페이스 조절을 잊어버린 레이서는 완주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겐 '속도'보다 '호흡'이 필요합니다.
불과 한 달 보름 전입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바쁘게 걷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습니다. 초록불이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더군요. 습관처럼 짜증이 밀려오려는 찰나,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높은 하늘에 양 떼구름이 그림처럼 떠 있었습니다. 그리고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선선한 바람이 느껴졌습니다.
머릿속에서 '띵-' 하는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습니다. '아, 내가 오늘 하늘을 한 번이라도 올려다봤던가?'
빨간 불은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도시가 나에게 선물한 '공식적인 쉼표'였습니다.
'잠시 숨 좀 고르고 가세요."
"지금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 좀 빼세요."
빨간 불은 그렇게 저에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발을 구르고 조바심을 내도 신호는 정해진 시간이 지나야 바뀝니다. 바꿀 수 없는 외부 상황과 싸우느라 내면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대신, 이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날 스마트폰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1분 동안 온전히 '거리에 서 있는 나'를 느껴보았습니다. 세상의 해상도가 달라졌습니다.
빠르게 걷거나 뛸 때는 휙휙 지나가는 '흐릿한 배경'에 불과했던 풍경들이, 멈춰 서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마다의 생생한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건너편 빌딩 유리창에 반사된 햇살이 얼마나 눈부시게 부서지는지, 가로수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어떤 춤을 추는지, 횡단보도 옆 화단에 핀 작은 꽃이 얼마나 기특하게 생명력을 뽐내고 있는지... 평소라면 절대 보지 못했을,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던 세상의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청각도 예민하게 깨어났습니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공사장 소음, 그리고 제 숨소리까지. 도시의 소음이 소음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오케스트라처럼 느껴졌습니다.
고작 1분이었습니다. 1분의 몰입은 하루 종일 긴장해 있던 제 뇌를 말랑말랑하게 풀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뇌 과학적으로도 뇌가 아무런 목적 없이 멍하니 있을 때,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되어 뇌의 피로를 씻어내고 창의성을 회복시킨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멍 때리기'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과열된 뇌를 식히는 최고의 쿨링 시스템인 셈입니다.
우연히 본 글에서 '마(間)'라는 개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일본어라고 하던데 비어 있는 공간, 즉 여백을 의미합니다. 빼곡하게 채워진 그림보다 적절한 여백이 있는 그림이 더 큰 울림을 주듯, 음악에서도 음표와 음표 사이의 쉼표가 있어야 선율이 완성됩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기만 하는 음악은 소음일 뿐입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빈틈없이 채워진 스케줄표, 1분 단위로 쪼개어 사는 계획성이 곧 성공적인 삶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삶의 윤기는 그 계획과 계획 사이, 틈새와 여백에서 피어납니다.
신호등 앞에서의 1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30초, 커피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2분. 이 자투리 시간들을 '죽어 있는 시간' 취급하며 스마트폰으로 메워버리지 마세요. 이 시간들이야말로 당신의 삶에 숨구멍을 틔워주는 귀한 '여백'입니다.
생산성 강박을 잠시 내려놓으세요. 효율성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잠깐 벗어두세요. 횡단보도 앞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존재로서의 나'를 느껴보세요. 발바닥에 닿는 보도블록의 단단함, 코끝을 스치는 계절의 냄새,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나가는 공기의 흐름...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저와 함께 작은 실험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퇴근길에, 혹은 내일 아침 출근길에 빨간 불을 만나면 절대로 짜증 내거나 조급해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겁니다. 대신 반가운 마음으로 마음속으로 외쳐보세요.
"오케이, 보너스 타임이다!"
"도시가 나에게 1분의 휴가를 주었구나."
스마트폰을 꺼내는 대신,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를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고개 들어 하늘 보기: 구름의 모양이 토끼를 닮았는지, 거북이를 닮았는지 관찰해 보세요. 오늘 하늘색의 이름을 지어주어도 좋습니다.
사람 구경하기: 건너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보세요. 지쳐 보이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으로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어요'라는 텔레파시를 보내보세요.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은 나에게 돌아와 나를 따뜻하게 합니다.
깊은 호흡하기: 4초 동안 숨을 들이마시고, 7초 동안 멈추었다가, 8초 동안 천천히 내뱉어 보세요. 숨을 내뱉을 때 몸 안의 불안과 긴장이 함께 빠져나간다고 상상하면서요.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치열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짧은 '1분의 휴가'를 제대로 누린 당신의 발걸음은 이전과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쫓기는 자의 다급한 걸음이 아니라, 자신의 호흡을 알고 리듬을 탈 줄 아는 사람의 여유로운 걸음이 될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간다고 해서, 잠시 멈춰 섰다고 해서 당신이 뒤처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산책이니까요. 멈출 줄 아는 사람이 더 멀리 갑니다. 쉼표를 찍을 줄 아는 사람이 더 아름다운 문장을 씁니다.
그러니 오늘, 빨간 불 앞에 선 당신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도약을 위해'충전'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당신의 속도는 아주 적당합니다. 아니, 아주 훌륭합니다.
부디 오늘 하루, 신호등이 선물해 준 1분의 틈새를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 틈새가 팍팍한 당신의 하루를 지탱하는 단단하고 부드러운 쿠션이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