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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ny Oct 09. 2023

지키지 못할 약속

입덧과 다양한 트러블로 정신 못 차리던 임신 초기.

내가 입안이 아픈단 말도 허리가 아프단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남편. 냄새가 나서 냉장고 문도 못 열겠다며 멀쩡한 음식들을 상했다고 버렸었다. 다 버리면 뭐 먹고살라는 거냐고 말하던 그. 입덧하는 와이프에게 꽤나 다정한 말투.


어느 날 아침.

평소라면 출근을 하기에도 빠듯한 그 시간에 갑자기 남편이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출근이 늦던 이르던 절대 먼저 일어나는 일이 없는 남편이었다. 본인이 쉴 수 있는 최대한 침대에서 버티다가 준비만 딱 해서 나가는 사람인데 이 날은 출근시간 한참 전에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치웠다. 몇 번을 말해야 툴툴거리며 간신히 해주던 음식물쓰레기까지 들고서 출근을 하다니. 분명 고마운 일이지만 고맙다고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왜?'라는 말이 먼저 나와버렸다.

자긴 아기를 도저히 못 보겠으니 집안일을 하는 것이 좋겠단다. 미리 연습해 본 거라고.

그냥 내가 힘들어 보여서 도와줬다고 하지. 참 멋이 없다.


사실은 임신 초기에 조금 많이 힘든 편이었다. 학원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많았다. 또 임신이라는 사실도 나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이런 걱정들로 인해 멘털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초기의 허리 통증이 누군가에게는 엄살로 보였겠지만 나에겐 잠도 쉽게 잘 수 없는 상태였다.

또 치주질환은 피곤하면 가끔 찾아오는 친구였지만 좀 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잇몸이 붓기 시작하더니 이가 내려앉고 반대쪽으로도 음식을 씹을 수 없는 상태였다. 가만히 있어도 그 부분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다. 거울을 보면 한쪽 얼굴이 부어서 비대칭으로 보였다. 이렇게 심하게 온 건 드문 일인데, 코로나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일이 감사할 정도였다.

이런 컨디션으로 출근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급한 성격으로 뭐든지 직접해야 하는 난 아파도 움직일 수 없게 침대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면 뭔가를 하고 있다. 

내 눈에는  항상 해야 할 것들이 보였고 남편에게 부탁해도 곱게 해주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기대도 없이 직접 움직이는 편이다. 이러니 다정한 말 한마디 없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말과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넌 내 걱정은 하니?'

라고 따졌던 걸 마음에 두었었나 보다.

엄청 걱정하고 있다며 입덧 캔디를 건네고 출근하는 그.

자기가 엄청 알아보고 직구로 산거라며 뿌듯해했다.

입덧캔디라고 유명한 제품이었지만 혀가 자꾸 갈라져서 맛이 안 나고 아프기만 했다. 그래도 보는 앞에선 맛있다며 열심히 먹었었다. 그 덕에 더 주문해 준다는 걸 말리느라  조금 피곤했다.

어렵게 구한 거라며 대단한 일을 한 듯이 말하는 그에게 드럭스토어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든든한 남편의 모습. 이미 난 알고 있었다. 오래가지 않을 모습이라는 거. 결혼하기 전에 밥만 해주면 나머지 집안일은 다 해주겠다는 그에게 속았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하루 이틀의 이벤트 성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마움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컸을 수 있다. 남편에게도 사정이 있다. 엄청 한가하던 회사였는데 내 임신을 기점으로 서서히 바빠지기 시작하더니 출장이 잦아졌다. 임신한 와이프를 두고 며칠 씩 출장이라니. 나중에는 산부인과 진료도 씩씩하게 혼자 가곤 했다. 뭐 이쯤이야 대단한 일도 아닐 테지만.


그렇게 다시 내 차지가 된 일들. 만삭 때까지 화장실 청소도 했다. 그 쯤이야. 그 정도 힘쓴다고 애가 나오진 않겠지만 조금 힘들긴 했다. 바쁘고 피곤하니 어쩔 수 없다지만 이런 일들 보다는 다른 것들이 서운했다. 만삭 때까지 혼자 발톱 깎은 일. 그 흔한 크림 한번 안 발라 준 일. 이런 건 왜 해줘야 하냐며 정색하는 사람. 괜찮다. 물론 엄청나게 서운했지만.


출산 후 집안일은 남편 담당이 되었을까?

아니. 분담이라도 하고 있을까?

이 정도면 뻔한 답이긴 하지만 출산 후의 이야기에서 말하기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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