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친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다.
나의 20대와 30대는 언제나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핸드폰 연락처엔 언제든 연락할 수있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주말이면 약속이 겹쳐 몸을 쪼개야 할 정도였다. 늘 10명 이상의 무리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고, 동문회장, 학생회장, 동아리 회장 같은 '장(長)' 자리가 내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나는 그것이 나의 능력이라 믿었고, 타고난 외향적 기질이라 자부했다. 어딜 가나 환영받는 존재,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리더. 그것이 '나' 스스로를 정의하는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문득 찾아오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 속에 둘러싸여 웃고 떠들었지만, 정작 그 관계들 속에서 '진짜 나'는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무리의 결속을 다지느라 내 영혼이 닳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때는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관계가 소원해지면 내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사람을 챙기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은 아닌지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아무 잘못한것도 없으면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대했다. 그래서 억지로 연락을 돌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모임에 나갔다.
그러나 40대라는 인생의 반환점을 돌면서, 관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에는 인맥의 '넓이'가 성공의 척도라 믿었지만, 이제는 안다. 중요한 것은 넓이가 아니라 '밀도'라는 것을.
수많은 인연이 강물처럼 내 삶을 스쳐 지나갔다. 그 흐름을 거스르려 애썼던 지난날과 달리, 이제는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스쳐 지나갈 인연은 원래 스쳐 지나가는 것이 순리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옷깃을 스친 모든 사람을 나만의 세상 안으로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와 영혼의 주파수가 맞고 마음의 진동이 공명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젊은 날에는 그 기적을 너무 흔하게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모든 사람이 나와 잘맞는 인연이라 착각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 주변에 북적거리는 군중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100명의 얕은 지인보다, 아무말 없이 커피한잔 해줄 수 있는 단 한 명의 진정한 벗이 내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니 주변 사람과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관계를 붙잡고, 맞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끼워 맞추며 애쓰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학대와 다름없다. 누군가 떠나간 자리는 빈자리가 아니라, 오롯이 나로 채울 수 있는 여백이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내가 남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세상은, 그리고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체로 온전한 우주다. 내가 중심이 되는 나만의 세상이 확고하게 서 있다면, 타인의 오고 감에 내 우주가 흔들릴 이유는 없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나를 떠나면 어쩌지 하는 고민은 내 세상의 지반이 약할 때나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타인에게 기대를 내려놓는다. 기대를 버리는 것은 냉소적인 포기가 아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가 내 삶에 머무는 동안의 시간에 감사하되, 떠날 때는 미련 없이 보내주겠다는 성숙한 태도다. 스쳐 지나갈 인연은 보내주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리더로 살았던 지난날도 소중했지만, 고요한 내면의 왕으로 사는 지금이 나는 더 좋다. 관계의 다이어트를 통해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졌다. 내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그 밤들을 지나, 나는 이제 홀로 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만의 세상이 단단해진 후에야 비로소 진짜 내 사람들과의 깊은 울림이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혼자여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 그런 고요의 삶이 설레인다.
나는 지금 나만의 세상을 완성하고 그 세상속에서 상처를 주지도, 상처를 받지도 않는 천국에 살고있다.
20대의 젊은 우리 아이들이 자신만의 그런 세상을 빨리 완성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