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만렙인 내가 문제를 직면하면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 던 어느 날. 아는 작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본에 놀러 오는 모델님들이 있는데 같이 촬영하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일본에 와서 대부분의 촬영이 손님들을 상대하는 유료촬영이었기에 사진혼을 불태우고 싶던 나는 '당근 빳다죠!'를 외치며 가이드 일을 마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사진작가인 N님은 나의 몇 안 되는, 일본에서 만난 사진 지인으로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사진을 찍는 분이었고, 모델님 두 분 중 한 분은 건너 건너 아는 작가님들이 있을 정도로 인스타 사진계에선 알려지신 분과 나머지 한 분은 얼마 안 되지만 느낌이 정말 정말 충만해 조만간 다른 작가님 피드에서도 볼 것 같은 분이었다. 그렇게 나까지 4명이서 만나 텐진의 한 모츠나베집에서 촬영 전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N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촬영 전, 우선 스토리를 정하고 한 컷, 한 컷 정성스럽게 생각하고, 또 각 사진마다 애정을 가지며 촬영한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나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작가 김시옷,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셔터를 누르는 거지? 시옷이라는 이름은 [사진은 공부할수록 어려운 학문이니 사진의 '사'까지는 아니더라도 'ㅅ'이라는 알자는 마음으로 셔터를 누르자]는 마음으로 지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요즘 들던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요즘 내 사진이 공장사진 같다.'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들었던 묘하고 흐릿한 고민이 이번 만남과 대화를 통해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자기혐오감. 나름 잘 찍고 다닌다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내 사진에 익숙함이 들더라니 매번 똑같은 디렉팅에 똑같은 멘트. 마치 가이드 할 때처럼 뭔가 정해진 틀에 손님들을 맞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사진을 만드는 게 아닌 찍어내는, 그런 느낌. 결국 그 생각은 밥을 먹고 촬영이 끝난 후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렇게, 그날 촬영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같이 갔던 작가님의 촬영 모습이나 디렉팅을 보니 '나는 왜 저 생각을 못했지?'라는 열등감이 강하게 들었다. 더군다나, 200만원 가까이 되는 비싼 카메라와 일본에선 찍기 힘든 정말 멋진 모델님들이라는 좋은 재료를 가지고 요리에 실패한 기분까지. 너무나 찝찝한 이 기분.
찝찝한 이 기분과 열등감을 어떻게든 메꾸고 싶었다. 자존감이 낮은 나를 어떻게든 채워 넣고 싶어 열등감으로 생긴 구멍을 보람으로 채우려 했다. '공장사진이면 어때? 손님들은 그 사진들을 보고 예약을 넣어주고, 좋아하는데!'라며 말이다. 실제로 나만 찝찝하지, 손님들은 만족했으니 괜찮은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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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혼자 마음의 정리만 해두고 글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일주일 정도 묵혀두었다가 다시 적으려고 글을 읽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열등감은 메꾸면 안 된다. 이걸 태워야 한다. 연료처럼 연탄처럼 태워서 더 좋은 무언가로 만들어야 한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회피하는 방향으로 마무리했었던 걸 보면, 어지간히 충격이 컸나 보다. 그렇게 회피만렙인 나는, 다시 이 불편한 감정을 마주 보고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타인의 사진을 더 잘 보고, 열심히 자료 찾고, 사진에 투자하고. 자존감이 낮아 생긴 열등감 덕에 보람과 연료를 얻었네. 아, 그리고 글감도 얻었으니 이 정도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