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삶의 방식도 있습니다.
무슨 사진이요?
"증명사진이랑 이력서에 넣을 사진이요. 비자 신청하려면 이력서도 제출해야 하는데, 거기에 들어갈 사진도 보내주실 수 있나요?"
증명사진이야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고, 정 안되면 지하철 포토부스에 가서 찍으면 된다. 그런데 이력서 사진이라니? 더군다나 일본 비자 심사에 제출할 사진이라면 정장까지 쫙 입고 찍은 사진이어야 할 것 같은데. 네이버 클라우드부터 아이클라우드,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구글 드라이브까지 싹 뒤져봤지만 없다. 이력서 사진이. 생각해 보니깐 이게 왜 없지? 마지막으로 머릿속 서랍 어딘가에 이력서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는지 뒤져봤다.
사회생활을 남들과 다르게, 운 좋게 시작했다. 평범한 면접이 아니라 운 좋게 TV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 3위로 탈락했지만, 운 좋게 회사에서 남자 직원이 필요하다 해서 나까지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한 직장을 몇 년 동안 다닌 후, 이직이 아닌 프리랜서로 전향. 그러면서 몇 번의 이력서를 적었을까? 손에 꼽을 정도니 남들과는 다르게 이력서 사진을 찍을 일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난 당연히 내가 정장 입은 사회인이 될 줄 알았고, 어른은 다 그런 옷을 입고 일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일하는 직장이나 업종은 정장을 입을 일이 잘 없었다. 입어 봤자 세미 정장 정도였지.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 잘 살고 있다. 어릴 때 생각했던 내 모습과 다르지만, 구두가 아니라 스니커즈나 운동화로, 넥타이가 아닌 카메라 스트랩으로, 가죽 가방이 아닌 가이드용 깃발을 들고 다니며 나는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다른 이들도 잘 살고 있다. 비록 언제 다시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상암동에 가서 전동킥보드를 타고 배달의 민족 알바를 할지는 모르는, 그저 달콤하지만은 않은 자유 속에 살고 있음에도 말이다. 세상은 정장 입은 이력서 사진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 없는 삶이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당장은 필요하기에 부랴부랴 이력서 사진을 찍을까 했지만, 일본에서 이력서 사진을 찍으려면 우선 정장도 필요하고 비싸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진 촬영에 정장까지 합성해서 2만원에 가능한데!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잔머리를 굴려 포토샵 AI 기능으로 예전 증명사진에 정장을 입히고 머리 스타일을 바꿔서 제출했다. 휴우 나란 사람, 이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 이번 이력서도 어찌어찌해냈으니 앞으로도 당분간 나는 이력서 사진 찍을 일 없이 살지 않을까?
24.06.03 아직은 프리랜서일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