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중이었다가 상연이었다가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by 심바

사랑 이야기로 범벅이 된 드라마나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요즘 흔하디 흔한 연애프로그램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유는 하나,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해서.

대신 인생이 담겨있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생각할 무언가를 많이 던져주는, 그래서 여운이 남는.



요즘 지인들이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인 '은중과 상연'을 꼭 보라며 추천해 주었다.

주인공은 김고은과 박지현. 음 로맨스는 아니겠군.

덧붙여주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감정소모가 어마할 거라고.


네가 멀쩡한 게 싫어. 망가졌으면 좋겠어 나처럼.


예고편 속 상연(박지현 분)의 대사. 여자 친구들 간의 관계에 관한 거구나.

아 그런 감정소모...

긴 연휴 동안 정주행을 해보자, 하며 맥주를 한 캔 따고는 드라마 속으로 들어갔다.





3일이었다, 15편을 다 보는 데 걸린 시간이.

13화까지 은중이와 상연이는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이라고 생각했다.

예고편의 첫 대사처럼 상연이가 일방적으로 은중이를 망가뜨리는 처절한 악 그 자체인 것 같지만 내겐 그렇게만 보이지 않았다.

상연의 어떤 감정과 모습들은 어떤 설명이 없이도 너무나 이해가 되는 그 무엇이었으므로.

그렇지만 친구라는 이름으로 맺어졌었기에 더 아프고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으리라 짐작되었고, 과연 어떤 결말을 보여줄까 궁금했다.






상연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날을 28일로 정해두고 은중에게 그 마지막을 함께 해달라고 한다.

13편의 서사동안, 처음 만난 국민학교 때부터 40대로 커리어의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까지 원수보다 못한 사이였던 둘을 이렇게 엮는다고...?

은중이었다 상연이었다를 반복하며 클라이맥스로 치닫아온 내 감정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둘 사이의 사건 하나하나에 애달프고 화가 났던 내 감정마저 갑자기 먼지가 되어버린 기분.

찢어질 것 같은 마음의 고통들도 상연의 예정된 죽음 앞에서 모두 다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드라마 속 깊숙이 들어가 두 친구의 감정들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던 나도 일순간 티브이 밖으로 빠져나와 관망을 하게 되었다, 은중과 상연뿐만 아니라 내 삶에 대해서도.






산다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드라마를 보다 이렇게 훅 돌아보게 될 줄이야.

평생 잊지 못할 악몽 같은 기억도, 사람도, 관계도 죽음 앞에서는 용서가 되는 것일까..

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사람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면, 마치 그럴 거라고 예정되어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



살다 보면 열심히 미워하고, 힘들게 아파하는 관계들이 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대명제 앞에서 그런 감정의 소모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렇게 나는 인생이 담긴 작품 하나를 만났다,

앞으로 꽤 오랫동안 두고두고 되돌아볼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