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만나는가가

by 심바

소설책을 잘 읽지 못한다. 작품 속 인물과 사건에 몰입해야만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어서 그렇다.

나의 읽기는 주로 틈새에 이루어지는데 그런 점도 한몫하는 것 같다. 아까 어떻게 끝났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다 보면 그 재미가 훨씬 반감되는 것이다.


그런 내가 근래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은 작년 가을에 읽었던 김주혜 작가님의 '작은 땅의 야수들'이다. 612쪽에 달하는 길다면 긴 이야기. 주변 이들에게 책 한 권 추천해 달라는 얘기를 들으면 꼭 이 책을 알려주곤 했다.


'파친코'와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을 워낙 재미있게 읽었는데,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어서 그런가... 하다 곧 이유를 알아냈다.

내가 이 책을 언제, 어디에서 읽었느냐 하는 것.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KTX 열차 안, 아이들은 통로 우측, 남편과 난 통로 좌측 좌석이었다.

약 3시간 30분.

오갈 수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는 텅 빈 시간이 생겨났다. 그래서 가방 속에서 가장 두꺼운 그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너무나 몰입해서 단숨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문학성이 뛰어나서이기도 했을 테고 좋아하는 주제여서이기도 했을 테지만,

KTX 여서가 내겐 아마 가장 큰 이유였을 테다.

책을 읽기에 너무나 적합한 시간과 환경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책만 읽으면 됐던 시간. 그 몇 가지의 조건들은 한데 겹쳐 나에게 인생책을 뚝딱 한 권 만들어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영화도 그랬던 것 같다. 삿포로로 향했던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영화 '마더스'도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기억. 아마 집에서였더라면 혼자서는 절대 보지 않았을 텐데(스릴러를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기내에서 제공되는 많지 않은 옵션 중에서 골라야 했던 터라 영화 소개프로그램에서 영화상 수상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다며 스치듯 보았던 그 영화를 골랐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변해가는 심리가 절절하게 느껴져 더 몰입해서 보았던 그 영화도, 어느 것의 방해도 받지 않는 비행기에서 2시간 30분의 텅 빈 시간 덕분에 더 강렬하게 다가온 것 같다.





기차가 아니더라도, 비행기가 아니더라도 난 그 책과 영화를 내 인생책, 인생영화라고 말할 만큼 오롯이 빠져들어 볼 수 있었을까.

아니.


바람에 나풀나풀 너울거리는 갈대처럼 환경의 영향을 쉬이 받는 나니까. 작품이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대하는 자세의 문제인 거지, 나는 나를 알거든.



예고 없이 툭 나타나주는 소중한 시간 그리고 장소.

다시 만나게 될 그때 그곳에서 또 삶 속의 별사탕 같은 책과 영화를 또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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