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o heavy

여기 제 자리인데요

by 심바

황금 추석 연휴,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KTX를 탔다.

9호차는 왜 이다지도 멀단 말인가. 저마다의 플랫폼을 찾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헤치며, 시댁에서 바리바리 챙겨주시는 음식을 두 손 가득 감사히 챙겨 들고 내가 앉아야 할 그 자리를 찾아 맹렬히 걸었다.

역방향의 좌석인 것을 불평할 수도 없었다. 구한 게 어디야, 3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를 서울로 데려다 줄 귀한 자리인걸. 9호차에 올라 내 좌석 5B를 찾아 통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힘겹게 헤치며 걸어갔다. 그런데 나의 5B에는 좌석만 한 캐리어가 다소곳이 서있다. 좌석에 앉아있던 어느 분께 여기가 9호차가 맞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맞았는데 내 5B는 없었다. 당황스럽군.






'제 좌석이 5B인데 혹시?'

테이블을 내려놓고 뚱뚱한 바나나우유와 편의점 빵과 휴대폰을 올려두고 5A에 앉아있던 단발머리의 여성분께 나지막이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여성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5B의 캐리어 손잡이를 부여잡고는 통로를 따라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럼 이 5B는 내 5B가 맞는 거로군. 어깨에 맨 가방과 왼손, 오른손에 가득 든 짐을 의자 위 선반에 차곡차곡 올려두고 자리에 앉아 테이블을 내렸다. 아침 허기를 달랠 바나나 두 개와 음료와 책을 올리고 나니 곧 출발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이제 기차가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저 앞에서 5B에 있던 커다란 캐리어가 돌돌돌 굴러온다. 통로를 꽉 채우는 존재감 어마무시한 캐리어가. 단발머리 여성은 본인의 자리 근처로 와(결국 내 앞이라는 말)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Too heavy..."

짐작건대 열차 칸 사이에 짐을 올릴 수 있는 선반은 입석 승객의 짐이나 다른 캐리어로 이미 꽉 차있었을 것 같았고, 의자 위의 선반에 올리기엔 캐리어가 너무 무겁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5B를 캐리어에게 줄 수도 없고, 통로에 입석으로 세워갈 수도 없는 처지 아닌가.



바나나와 책과 음료를 치우고 테이블을 제자리에 둔 다음 조용히 일어서서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Too heavy 한 만큼 당연히 나 혼자서는 올릴 수 없었고 단발머리 여성에게 저기 옆을 들어서 밀라고 얘기했다. 겨우 힘을 합쳐 캐리어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었고 우리는 5A와 5B에 어색하게 앉아 다시 자기 자기의 테이블을 펼치고 원래 있던 것들을 올려놓았다. 이내 기차는 플랫폼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이거...'

책을 두어 장쯤 넘겼는데 5A의 단발머리 여성이 편의점에서 샀을 법한 카스테라를 건넨다. 네 조각으로 나뉜, 손으로 집기에 조금은 쉽지 않은. 나는 두 개중 좀 더 예쁘게 생긴 바나나를 건네고 나서 카스테라 한 조각을 씩씩하게 집어 잘 먹을게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까 캐리어를 올리고 나서 건네받은 약간은 어색한 발음의 감사하다는 인사로 미루어볼 때 이 여성은 아마 여행 중이거나 유학 중인 외국인인 것 같았다. 뚱뚱한 바나나우유는 모두가 다 좋아할 수밖에 없지라고 혼자 생각하고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자그마한 호의가 오가는 그 접점이 적당하게 좋았다.




다음 역은 이 열차의 마지막 역인 서울역이란다. 기차 안 승객들의 짐을 챙기는 분주함이 잠을 깨운다. 통로 쪽 좌석에 앉아있는 내가 먼저 일어나야 5A의 단발머리 여성이 나올 수 있다. 선반 위에 올려둔 내 짐들을 내리고 나니 덩그러니 캐리어만 남았다.


그 1분여 동안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이렇게 저렇게 내리는 상상. 어떻게 힘을 주어 받치면 안전하게 저 덩치를 잘 내릴 수 있을까 하고. 그리고는 이내 마치 내 짐인 것처럼 캐리어를 당겨 두 손으로 받쳐든 다음 좀 더 힘을 주어 빈자리에 덜커덩하고 안착시켰다. 5A의 여성에게 '캐리어 여기 잘 내렸으니 잘 챙겨가시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0.5초쯤. 사람들에게 밀려 9호차를 바삐 내리고는 서울역을 빠져나갔다.




그분의 한국어가 능통하지 않아서 좋았다. 과한 인사나 고마움을 표현했다면 왠지 난 조금 머쓱했을 것 같아서. 무심하게 어깨를 톡톡 치고 말없이 건넨 카스타드가, 그럼 이거 한 개 드세요 하고 건넨 바나나가 좋았다.

적당히 주고받은 호의가 좋았다, 이렇게 글로 적어두고 싶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