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도시의 아침에는 비밀이 많다

#나무와 비를 사랑하는 여자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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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매일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은 걷는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 정리되는 시간이다.


어쩌면, 걷기 위해 준비하는 순간이 가장 설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침엔 늘 같은 루틴이 반복된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정리한다.


거실 구석, 어질러진 자리. 무엇인가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남편의 물건들도 하나하나 확인한다.

넥타이와 벨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내 하루도 안정된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린 후, 집안을 한번 더 둘러본다.

마음속으로 '이 정도면 됐다' 싶으면,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가볍게 썬크림을 바르고, 립스틱을 아주 살짝 바른다.

화장은 하지 않는다. 피부가 깨끗해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다.


거울을 한번 보고, 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신는다.

문을 나서기 전의 이 과정이 작지만 나에겐 매우 중요한 의식이다.



4월 초, 아침의 자외선이 신경 쓰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앞집 여자를 만난다.


50대 후반쯤, 살집이 있고 꾸미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녀의 눈빛에서 가끔 부러움이 느껴진다.

언젠가 그녀가 말했다.

"20대 아가씨처럼 날씬하고 키도 크고 참 보기 좋아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아줌마예요." 물론 겸손한 인사였지만, 속으로는 그녀 말이 전혀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미인대회에 나갈 정도로 외모에 자신이 있었다.

169cm에 51kg, 긴 웨이브 머리.

두 아이의 엄마이지만, 나 자신을 잘 가꾸며 살아왔다.



앞집 여자와는 입주 때 한번 식사를 한 게 전부다.

나이차가 있어서 깊은 친분은 없지만, 마주치면 인사는 나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경비실을 지나 주차장으로 나가면, 주변의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단풍나무, 은행나무, 목련, 소나무...

그 푸르름이 마음에 스며들 듯 다가온다.

하늘, 바람, 구름, 태양, 나무, 비. 그 모든 자연이 내게는 친구이자 위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챙겨 다시 나가 나무 아래 선다.


떨어지는 빗방울, 나뭇잎 위로 튀는 물방울들, 초록의 잔디와 흙냄새.

그 모든 것이 나를 유혹한다.


특히 봄이면 목련이 마음을 흔들고, 바람에 날리는 하얀 잎들은 나를 함께 흩날리게 한다.

가을이면 노란 잎들이 비에 젖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쓸쓸함, 고독, 외로움이 밀려들기도 한다.


나는 자연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다.

도시 속 작은 정원에서조차도 숲의 숨결을 느끼는 사람.

풀잎 위에 떨어지는 비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내가 이렇게 비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언젠가 두 시간을 넘게 비와 함께 시간을 보낸 날이 있다.

그날 이후 나는 비의 팬이 되었다.



오늘은 날씨가 맑다. 햇볕은 따갑지 않고, 공기는 시원하고 맑다.

어디를 걷겠다고 정하지는 않는다.

그냥 발이 이끄는 대로 걷는다.

아파트 주변을 몇 바퀴 돌기도 하고, 집 근처 초등학교 뒷편 공원으로 향하기도 한다.


공원은 축구장 두세 개 크기로, 테니스장, 농구코트,

배구코트가 있고, 무엇보다 곧게 자란 소나무들이 마음에 든다.

흙길이라 더 좋다.

그 곧음이 나의 성격을 닮은 것 같아 더욱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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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공원이 아닌 논밭 쪽으로 간다.

20분쯤 걸으면 도착하는 곳.

공원 정자에서 바라보이기도 하는 그곳은, 도시 속 작은 시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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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 가는 길목에 꽃집이 하나 있다.

부부가 운영하는 곳인데, 나는 늘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안에 들어와서 구경하세요"라는 말에 웃으며 고개만 끄덕인다.


사진도 찍지 않는다. 그냥 눈으로만 충분하다.

그 길 끝에 논밭이 펼쳐진다.



예전에는 고추와 옥수수가 심어진 밭이었지만, 지금은 건설 예정지로 바뀌어 있다.

그래도 몇몇 주민들이 작은 텃밭처럼 경작하고 있다.


도로변 가까운 쪽은 물을 대기 쉬워 활발하고, 안쪽은 조용하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발바닥으로 흙의 촉감을 느끼게 된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편안함.



말랑한 흙길을 밟는 그 감각이 좋아서 자꾸 이곳을 찾는다.

해바라기, 고추, 옥수수도 본다. 어릴 적 시골에서 봤던 풍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진다.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가끔 풀숲에서 꿩이 날아오르는 것도 본다. 도시에서 꿩을 본다는 것은 놀랍고 기분 좋은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피로가 밀려든다. 매일 만보기를 확인한다.



만 보가 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날은 2시간에 만오천 보를 넘기기도 한다. 다리에 근육이 잘 붙는 편이라, 예전부터 "말근육" 소리를 들었다. 날씬한 몸매에 건강한 하체는 내게 있어 은근한 자랑거리다.



집에 도착하면 보통 12시 전후.

시간 안에 돌아오려 애쓴다. 집에 들어오면 운동복을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땀을 씻으며 거울 앞에 서면, 가끔 혼잣말이 나온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아."



언젠가 아들이 말했다. "엄마 옷은 좀... 너무 튀어."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누군가의 시선 앞에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다음 날, 속옷 서랍을 정리하고 평범한 것들로 새로 장만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걷고, 자연을 사랑하고, 나를 가꾼다.



하루를 시작하고 정리하는 이 시간이 고맙고, 이 삶이 감사하다.



어쩌면 다음 생에는 대자연으로 태어나고 싶다.

바람이 되어 나뭇잎을 흔들고, 빗방울이 되어 흙을 적시며,

햇살처럼 누군가의 얼굴을 쓰다듬는 존재로 말이다.


그런 삶, 그런 존재가 나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