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다시 걷기 시작하던날
며칠 전 주문했던 속옷 세트가 도착했다.
검은 레이스에 최대한 천 면적이 적은,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을 고른 것이었다.
기분 좋은 설렘으로 상하의를 갖춰 입고, 운동복 위에 걸쳐 입은 채 집을 나섰다.
경비실을 지나자 발걸음은 자연스레 공원 쪽으로 향했다.
싱그러움이 가득한 키 큰 소나무들이 반겨주었고, 그 풍경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신호등 두 개를 건너 약 5분 정도 걷다 보면 도착하는 작은 공원.
둘레는 우레탄 트랙으로 되어 있어 약 40분쯤 걸으면 7~8천 보는 충분히 채운다.
젊은 사람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이 근방은 주택가로, 젊은 세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고요함 덕에 이곳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공원에는 정자가 세 개 있는데, 나는 항상 가장 끝자락의 정자에 앉는다.
앞이 탁 트여 논밭이 펼쳐져 있고, 시원한 바람과 새소리가 온몸을 감싼다.
그곳에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건강하게 자라준 아이들,
나만을 바라봐주는 남편, 어느 것 하나 당연하지 않은, 고마운 일들이다.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면 무심코 시선을 그쪽으로 돌린다.
소리의 끝자락을 따라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바라본다.
이곳에서는 기차의 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
단지 지나갈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눈을 감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마치 내가 하늘을 나는 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바람결 속에서, 담배 한 모금의 연기에 취해보고 싶다.’
피워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실제로 담배 냄새는 불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순간,
이 자연과 고요함이 그런 충동을 낳게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혼자 걷는 것보다, 함께 걷는 게 더 즐겁죠.
밴드 '00' 검색하시면 가입하실 수 있어요.”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네.”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순간, 내 마음속엔 어리둥절한 감정이 밀려왔다.
‘저 사람 뭐지?’ 놀랍고 어색했다.
돌아서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 마음에 들었다면 커피 한 잔 하자고 해도 됐을 텐데, 그냥 가버리네.”
지금 기분 같아선,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도 커피는 마셨을 것이다.
그랬다. 말을 걸지 않아서 그렇지, 누군가가 “차 한 잔 하실래요?”
라고 했다면 정말 함께 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날, 누구나 있지 않을까? 나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저 사람, 참 소심하다.
그렇게 크고 듬직한 체격에, 검은 운동복까지 입고 있었는데.
눈을 마주칠 새도 없이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 자세히 볼 수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긴 머리를 말린 후,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동생이 바빴던 모양이다.
나는 핸드폰을 소파 위로 툭 던지고, 집안일을 시작했다.
매일 청소를 하다 보니 30분이면 끝났다.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갑자기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혼자 걷는 것보다 같이 걷는 게 더 즐거워요.”
검색을 시작했고, 놀랍게도 바로 그 밴드가 검색되었다.
마치 보물지도를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름, 나이, 성별, 사진을 등록하고 가입신청을 하자,
10분도 채 되지 않아 승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이어진 1:1 메시지.
“환영합니다. 회장 장민입니다. 궁금한 점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 주세요.”
“아, 아까 그분이시군요?”
“네, 맞습니다. 공원에서 뵌 그 사람입니다.”
“그랬군요. 사실 갑작스럽게 말을 거셔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옆모습만 봐서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걷기 좋아하시나 봐요?”라는 질문에 “네, 혼자 자주 걸어요.”라고 대답했다.
“내일 저랑 천변 산책 같이 하실래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잠시 망설여졌다.
“천변 풍경이 정말 아름다워요. 지루하지도 않고요. 5시에 다시 여쭤볼게요.”
나는 단순히 “네.”라고 답했다.
천변은 집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다.
혼자 가본 적도, 남편과 함께 가본 적도 없다.
늘 마음속엔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런데 여자로서, 낯선 남자에게 바로 “좋아요.”라고 답하기엔 망설여졌다.
그래도 걷기 동호회라는 것도 신기했다.
나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아온 건 아닐까.
5시가 가까워지자 이상하게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묘한 기대가 생겨났다.
저렇게 낯선 사람에게도 거리낌 없이 말을 걸 수 있다는 그 당당함이 궁금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야, 그냥 걷는 거잖아. 너무 많은 생각하지 마.”
맞다.
그냥 걷고 오는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뛸까?
4시 45분부터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마치 『어린 왕자』의 한 구절처럼.
“너가 4시에 온다고 하면, 난 3시부터 너를 기다릴 거야.”
왕자 같지는 않았지만, 혼잣말로 피식 웃음이 났다.
5시 정각, 메시지가 왔다.
“내일 천변 걷기 하실 거죠?”
망설임 없이 “네”라고 답했다.
“10시쯤 어떠세요?”
“네, 좋아요.”
“공원 입구에서 뵈어요. 남은 오후 편안히 보내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회장님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짧은 대화였지만, 묘하게 여운이 남았다.
마치 바람에 이끌린 듯, 설렘과 멍한 기분이 공존했다.
그리고 솔직히, 내일 아침 10시가 기다려졌다.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차를 타고 천변을 향해 가는 그 시간.
그 안의 공기 흐름은 어떨까? 상상은 이미 집을 짓고 부수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낯선 남자의 느낌, 나쁘지 않았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오래전 잊고 지냈던 감정이, 조심스레 되살아난다.
물이 없어 마치 말라죽던 작은 어린나무가 빗물을 마시니 살아나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