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끼"
저녁을 준비하던 중,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오늘은 약속이 있다고, 간단히 소식을 전해온다.
남편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야간대학을 졸업했고,
지금은 건축설계사로 인정받으며 일하고 있다. 실력이 뛰어나 스카웃된 케이스다.
나는 주로 9시 전후까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아이들도 요즘은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다.
세 사람이 모두가 늦는 날에는 밤까지 혼자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외롭거나 우울하진 않다.
남편이 늘 “10시 전엔 도착할게.”라며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이 하나둘 전화해 온다.
“아빠 몇 시에 오셔?” 처음엔 늘 “일찍 오실 거야.”라며 안심시켰지만,
몇 번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다 보니 아이들도 안다.
“엄마, 그냥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이제는 있는 그대로 말한다.
그러고 나면 아이들도 왠지 아빠보다 먼저 도착하려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8시쯤, 두 아이가 함께 들어선다.
집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했다.
아이들은 씻고 나면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밤 9시가 넘으면 나도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실내에서는 몸을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원피스 잠옷을 입는다.
이는 남편의 취향이기도 하다.
남편은 항상 노브라,노펜티로 원피스 하나만 입고입기를 바란다.
언젠가 물었다. "왜 그렇게 입는 걸 좋아해?"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저 상상만으로도 설레니까.”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남편의 바람이 크거나 부담되는 것도 아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남편은 늘 나를 배려하며, 부부 사이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존중하는 편이다.
잠자리를 함께 하면서도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그런 세심함이 때로는 애틋하게 다가온다.
나는 결혼 후 지금까지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것이 '열녀'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남편과 삶에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며 살았다’는 말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 같기도 하다.
사랑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설레고 가슴 뛰는 감정보다는 오히려 정과 습관이 더 가까운 것 같다.
잠자리는 어떤 애정의 표현이라기보단, 서로에 대한 본능의 이해와 존중으로 바라본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솔직히 그런 이야기를 깊게 나눠본 적은 없다.
부부모임에 나가보면, 나처럼 옷차림이 화려한 사람은 많지 않다.
여름이면 몸매가 드러나는 미니 원피스를 즐겨 입는다.
남편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등과 허리가 드러나는 옷, 가끔은 파격적인 디자인의 옷도 즐겨 입는다.
허리살이 옆에서 보이고, 허벅지까지 찌져진 치마 이런것들이다.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며, 지인들 앞에서 자주 언급하곤 한다.
술자리에서는 일부러 나를 데리러 오게 한 뒤, 자리에 앉혀 자랑을 한다.
처음엔 몰랐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의도된 행동임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지만,
남편의 그런 방식에도 익숙해져 있다.
남편은 준수한 외모에 세련된 감각을 지녔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선남선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의 취향은 다소 특별하지만,
나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다.
아마 나는 남편에게 ‘익숙하게 길들여진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주말이면 특별한 일정이 없을 경우, 대부분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동생과 함께 본다.
남편은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다.
동생은 그런 나를 보며 “언니, 너무 답답해.”라며 걱정 섞인 조언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우물 안'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이 우물 안이 내게는 가장 평온한 세상이다.
모두가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것이 정답일까?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이 삶이 편안하고 만족스럽다.
직장 생활을 할 때도 회식은 식사까지만 하고 돌아왔다.
사람들은 나를 ‘신사임당’이라 부르기도 했다.
술은 남편과, 혹은 아주 가끔 동생과 맥주 한 잔 나눌 정도였다.
동생이 속상해할 때면 저녁 준비를 마치고, 남편 귀가 전까지 함께 해준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청순소녀’, ‘신사임당’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남편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나를 다르게 부른다.
"야! 섹골아"라고 말이다...
어쩌면 그 표현이 더 진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자극적이지만, 나를 가장 솔직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말.
남편을 만나고 나서 나는 많은 것이 변했다.
어쩌면, 나조차도 나를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남편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그저, 그를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