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28살 그날의 빗소리

#버려진 땅의 진실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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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고, 눈이 내리는 날이 찾아왔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지, 이 버려진 호텔 부지 땅에서 하룻밤을 자고 싶었다.

천막 텐트를 설치했다.



대형 텐트라 바람에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했고,

안에서는 장작불을 피우고 발전기로 히터를 돌릴 수 있었다.

당연히 TV도 갖췄다.

첫날은 오후에 은정과 화가 사장, 셋이서 불을 피워놓고 잠을 잤다.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에는 셋이 함께 사우나를 다녀왔고,

둘째 날 저녁에는 나 혼자 텐트에 남아 잠을 청했다.

의외로 무섭지도 않았다.

그렇게 십여 일 동안 매일 혼자서 겨울밤을 보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장작불을 피워놓고 막걸리를 홀짝이고 있는데,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거지 차림의 백발 노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도 막걸리 한잔 주시겠소.”
나는 얼떨결에 웃으며 따라주었다.
“한잔 더 주시오.”
“예.”




그렇게 노인은 막걸리 두 잔을 비우더니, 말없이 일어나려 했다.



“술 잘 마셨습니다. 이 자리, 한번 파보시오.”



나는 얼떨결에 그를 불러세우려 했지만,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꿈이었다.

그러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이 자리를 파보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은정에게 전화를 걸어 포크레인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겨울의 매서운 찬바람이 스며드는 오전 9시, 포크레인 두 대가 도착했다.

천막을 치우고 땅을 파 내려가자, 얼어붙은 흙이 쉽게 갈라지지 않았다.




“뭐가 걸리는데요.” 기사 한 명이 소리쳤다.
“천천히 파보세요.”

4미터쯤 내려갔을 때, 나무가 보였다. 그것은… 관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컸다.



포크레인 기사 둘이 직접 내려가 관 뚜껑을 열었고,

그 순간 두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관 속에는 백골이 누워 있었다.



나는 직접 내려갔다. 그리고 백골 밑에 감싸여 있던 것을 들어 올리는 순간,

숨이 막히듯 휘청거렸다.



금덩이였다.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보석이 박힌 칼 한 자루였다.

나는 곧장 112와 문화재청에 신고했다.


경찰차가 도착했고, 곧 현장은 폴리스 라인으로 봉쇄됐다.

공무원과 관계자 50여 명이 몰려와 포크레인으로 남은 흙을 걷어냈다.

드러난 것은 200kg에 달하는 금덩이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칼.



조사 결과,

이 관의 주인은 임진왜란 당시 제주를 점령했던 일본 무사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언론은 연일 대서특필했고, 한 달간 내 땅은 발굴로 뒤집혔다.

하지만 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에서 공식 입장을 전해왔다.



금과 보석은 땅 소유주인 나에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무려 5천억 원을 제시했지만,

우리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나에게 2천억 원 보상과 호텔 개발 인허가 전면 지원을 약속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호텔 허가 발표와 함께 주변 땅값은 폭등했다. 발표전에 인근 토지를 두 배 가격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총 10만 평이 넘는다. 한적한 시골 마을은 순식간에 개발지로 변모했다.



그리고 1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됐다.

30층, 200개 객실을 가진 초대형 호텔.

지하에는 사우나, 1층에는 커피숍등과 , 30층에는 고급 레스토랑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주변엔 100평 단위의 식당 30곳이 분양되고,

제주 최대 규모의 2층 골프 연습장도 설계됐다.

총공사비는 1천억 원이 넘을 예정이었다.




은정에게는 총괄 책임을 맡겼다.

펜션은 화가 사장이 관리했다.

생활은 그대로였지만, 유튜브 방송은 오히려 더 활기를 띠었다.

호텔관광학과 출신 두 명을 영상팀으로 고용했고, 모든 과정을 기록해 올렸다.



금괴 발견부터 호텔 공사까지 리얼하게 담긴 영상은 구독자 200만 명을 돌파했다.

펜션 예약은 매진이었다.

채널 구독자는 300만 명을 넘겼다. 이제 일상은 달라졌다.

아침 8시 30분, 카페에서 직원들과 티타임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바다 낚시를 즐겼다.


은정은 집에서 생활했고, 펜션 사무는 학생 두 명이 단순 장부 정리를 맡아 거들었다.



그리고 오늘.
회의가 끝난 뒤, 나는 제주시내로 향했다.

빨간 미니 원피스,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치마 자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운전기사 없이 직접 차를 몰고, 처음 발을 디뎠던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매니저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싸인 하나 부탁드립니다.”


나는 웃으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호텔은 제주시내에서 가장 비싼 곳이었고, 여전히 장사가 잘됐다.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매니저와 마주 앉았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매니저가 아니었다.

호텔 전체를 총괄하는 본부장이었다.



토박이였고,

예전 내가 캐리어 두 개와 배낭 하나를 끌고 이곳을 찾았을 때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그녀와 나와 함께 바닷가를 거닐었다.


나는 호텔 관련 질문이 나올까 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흰색 블라우스에 남색 조끼와 스커트, 웨이브 진 머리.



전형적인 한국 미인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그 길로 나는 제주시내를 드라이브했다.

마음에 여유가 깃들자, 문득 눈에 들어온 간판. 왈츠 전문 학원이다.



차를 세우고 3층을 올려다보았다.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안에서는 수업이 한창이었다.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강사였고, 네 명의 학생이 춤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구경하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한 여자가 들어왔다.

학원 원장이었다.

남자 강사와 함께 학원을 운영하는 듯했다.



수업이 끝난 뒤, 나는 조심스레 남자 선생에게 부탁했다.



“선생님, 왈츠 한 곡…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는 미소로 답하며 내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긴 순간, 몸이 낯설게 떨렸다.

회전이 시작되자 단단한 근육의 힘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 강렬한 압도감에 온몸의 혈류가 잠시 멎은 듯했으나,

곡이 끝날 즈음 심장은 오히려 폭발하듯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단 한 곡의 왈츠가 나를 다시 살아있게 만든 것이다.



이 학원은 남매가 번갈아 수업을 맡았다.

남자는 날카로운 리듬감을,

누나는 경험으로 다듬어진 우아함을 보여줬다.



결국 나는 학원을 등록했고, 주 3회 개인 레슨을 받기로 했다.

매일은 무리라 생각했지만, 세 번의 리듬만으로도 충분히 내 삶에 전율을 불어넣을 것 같았다.



누나와 춤을 출 때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같은 여자이지만, 그녀의 손끝과 시선,

섬세한 호흡 속에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매혹이 숨어 있었다.



몸이 맞닿을 때 전해지는 묘한 떨림,

서로의 맥박이 교차하는 순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아, 이런 유혹이 있기에 레즈비언이라는 이름도 존재하는 것이겠구나’ 하고 문득 깨달았다.


그녀 같은 여자가 다가온다면, 거부할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있을까.



두 사람은 모두 댄스스포츠 프로였지만, 생업은 따로 있었다.

학원 1층에서 커피숍을 운영했고, 건물은 아버지 소유라 월세 걱정도 없다고 했다.

누나는 이미 가정을 꾸렸지만, 남자는 아직 홀로였다.




나는 다시 왈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는 호텔 카페에서 직원들과 티타임을 나누고,

펜션과 호텔 공사 관련 업무를 간단히 지시했다.

공사장은 자주 가지 않았다.


내가 현장에 매일 간다고 해서 건물이 빨리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그보다는 바람과 푸른 하늘을 즐기고 싶었다.



티타임은 끝났다.

화가 사장 역시 현장에 투입되었고,

펜션 관리도 전화와 주 1회 교육이면 충분했다.



나는 시내로 나가 사우나를 들르거나, 혹은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걸었다.

몇 마디 지시로 하루 일이 정리되곤 했다.



점심에는 호텔 본부장과 식사를 하기도 했고,

댄스스포츠 남매와 어울려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가끔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즐기기도 했다.


오후에는 펜션으로 돌아오면, 두 사람은 알아서 퇴근하고 없다.



일상은 단순했지만,

내 안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언제나 왈츠였다.



남자와 춤출 때는 단단한 남성의 기운이,

여자 프로와 함께할 때는 설명할 수 없는 전율과 유혹이 스며들었다.



그 미묘한 차이는 내 심장을 자극하는 맥박처럼 매혹적이었다.



저녁, 펜션 2층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뒤 시원한 캔맥주를 따냈다.


하얀 셔츠 하나만 걸친 채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비소리에 창문을 열자,

파도에 섞인 짭조름한 바닷내음이 한순간 몸을 감쌌다.

그 짙은 향이 오히려 나를 깨우고 자극했다.



스스로 내 몸매를 비추며 잠시 감탄했다.



두 번째 맥주를 따는 순간,

그날 배운 왈츠의 회전이 다시금 눈앞에 아른거렸다.


비내리는 바닷가의 밤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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