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도전의 서막
보현사는 지어진 뒤 단 한 번도 잠을 자본 일이 없었다.
세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본관은 법당이고 나머지 두 채는 숙소였다.
토요일이라 화가의 부모님이 와서 머무르기로 했고,
은정과 화가도 함께 보현사에서 묵기로 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예전보다 훨씬 단정해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도 깔끔했고, 안으로 들어서니 모두 이미 와 있었다.
특별히 예불은 생략하고 시주만 드렸다.
날이 좋아서 마당에서 소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다.
밤이 깊어가자 모닥불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오는 길에 양주 두 병을 사왔는데, 시바스리갈 큰 병이었다.
7시쯤, 한 대의 차가 들어왔다. 호텔 본부장이었다.
내가 직접 초대한 것이다.
그녀도 오늘은 이곳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이혼 후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본부장이 도착하자 내가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갔는데,
다들 따라나와 함께 맞이했다.
“뭐 대통령 오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본부장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타이트한 청바지, 보라색 블라우스, 그리고 운동화.
꾸밈없는 차림이 오히려 빛나 보였다.
내가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어서 와요.”
그리고 차례로 직원들을 소개했다.
“여기는 은정 씨, 전직 형사였어요. 여기는화가 ○○펜션 사장 , 호텔 공사를 전담하고 있죠.
여기는 화가 부모님이십니다.”
자연스럽게 술잔이 오가기 시작했다.
여자 넷이서 양주, 소주, 맥주를 섞어가며 밤 12시까지 마셨다.
취기가 오르자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분위기는 한층 따뜻해졌다.
화가 부모님이 춥다며 방에 장작불을 피우셨다.
그제야 알았다.
방 하나는 불을 때는 아궁이방이었다.
불길 덕에 방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여자 넷은 마치 찜질방처럼 땀을 흘리며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방 안은 정말 찜질방 같았다.
온몸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문을 열고 이불만 덮고 잤던 탓이었다.
7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근처 산책을 나섰다.
산 너머에 있는 절이라 주변엔 민가가 없고, 논과 밭만 드문드문 있었다.
여자 넷이 함께 걸으니 수다는 끝이 없었지만, 그조차 힐링이 되었다.
8시가 되자 아침상이 차려졌다.
나물 반찬이 중심인 진수성찬, 내 입맛에 꼭 맞는 식단이었다.
점심에는 근처에 사는 몇 분이 찾아왔고, 오후에도 술자리가 이어졌다.
저녁이 지나자 은정과 화가는 돌아갔고,
남은 건 본부장과 나뿐이었다.
화가 부모님도 “같이 자겠다” 하며 남았다.
밤이 깊어지자, 본부장과 나 사이에 진솔한 대화가 흘러나왔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본부장님, 제가 스카우트하고 싶습니다.
계약금 10억에, 연봉 2억을 드리겠습니다.”
본부장은 눈이 커지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 둘을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그녀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제안은 그녀에게 너무나 현실적인 무게로 다가올 터였다.
그녀가 말했다.
“솔직히… 너무 솔깃한 제안입니다.
지난 20여 년간 의리도 있고… 고민이 되네요.”
“돈 앞에서 괜히 고민 마세요. 이런 기회, 두 번은 오지 않습니다.”
내가 말을했다.
“저도 아이가 7살일 때, 월급 200만 원에 반지하에 살았어요. 유치원비, 식비 다 내고 나면 남는 게 3만 원도 안 됐죠.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돈많은 영감이라도 좋으니 첩이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본부장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내일 아침 출근해서 결정하세요. 선택하시면 10억 바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다시 놀라며 말했다.
“…정말 바로 10억을요?”
“네.”
본부장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내일 출근해서 사표 쓰고 오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술잔을 부딪히며 미소를 나눴다.
그리고 또다시 장작불 피워진 뜨거운 방에서 함께 잠들었다.
그날 밤, 꿈에 보현스님이 나타났다. 백발 노인도 보였다.
“고맙습니다, 보살님.”
그 옆에 있던 여인도 환하게 웃으며 보현사 문밖을 나갔다.
놀라 눈을 뜨니 새벽 4시였다.
밖으로 나가니 차 시동 소리가 들렸다.
본부장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대문 밖에서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본부장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떠났다.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절을 지은 건, 정말 잘한 일 같다.’
다시 찜질방 같은 방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마당 청소하는 소리에 눈을 뜨고,
샤워를 마친 뒤 나오니 아침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셋이 간단히 아침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니 막 8시.
오전 미팅에서 본부장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저녁 6시에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하자고 약속하고는 각자 일터로 흩어졌다.
사무실에서 잠깐 졸았다.
그런데 꿈속에서 보현스님이 나타났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라.”
스님은 분명히 K항공 마크를 가리키셨다.
눈을 번쩍 뜬 나는 은정을 불러 서울 왕복 비행기 표를 예매하게 했다.
시계를 보니 10시.
제주 출발은 11시 30분, 김포 출발은 오후 2시 30분이었다.
급히 공항으로 향해 10시 40분에 도착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탑승한 좌석은 조종석 바로 뒤였다.
‘스님이 왜 나를 서울로 보내신 걸까….’
창밖 구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승무원이 다가와 벨트를 매달라 권했다.
눈이 마주쳤다.
사슴 같은 맑은 눈. 키는 170이 훌쩍 넘어 보였다.
그녀가 나를 알아본 듯 환하게 말했다.
“최상희 사장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나도 반가워요.”
승무원은 네 명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중 그녀만이 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멍하니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방금 전 그 승무원이 다시 나타났다.
인사를 건네길래, 내가 커피를 대접했다.
“저는 업무 보고 다시 제주로 돌아갑니다.”
“저도 다시 제주행이에요.”
시간표를 확인하니, 같은 비행기였다. 그제야 감이 왔다.
‘아… 이 여자를 만나라는 뜻이었구나.’
숙박지가 어디냐고 묻자,
그녀는 내가 아는 호텔 이름을 말했다.
바로 본부장이 근무하는 호텔이었다.
“저녁에 제 펜션에서 식사할래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일은 언제쯤 끝나요?”
“5시 정도면 다 마무리됩니다.”
“좋습니다. 5시에 호텔 입구에서 만나요.”
다시 제주로 돌아온 비행기 시각은 3시 30분.
나는 잠시 왈츠 학원에 들러 남매와 춤을 추다 호텔 주차장에 4시 40분쯤 도착했다.
멀리서 그녀가 걸어왔다. 긴 생머리에 분홍빛 민소매, 흰색 스커트와 구두. 활기찬 모습이었다.
내 차를 보더니 그녀가 놀란 듯 말했다.
“와… 이거 엄청 비싼 차네요.”
“아, 별거 아냐. 3억 조금 넘는 정도지.”
“정말요?”
둘은 그렇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장님, 유튜브 재미있게 잘 보고 있어요. 인간극장 출연도 감명 깊게 봤습니다.”
“고마워요. 근데 몇 살이에요?”
“스물여덟이에요. 대학 졸업하고 벌써 5년 차네요.”
“난 대학 중퇴인데… ?”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5시 40분쯤 펜션에 도착하니 모두 카페에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부장이 와 있었고, 내가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우리, 잘해봅시다.”
모슬포항의 횟집으로 향해 소주잔을 기울였다.
“본부장을 위하여! 건배!”
그때, 승무원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사실 내일이 마지막 비행이에요. 이미 사표를 냈거든요.”
“그래요?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요?”
“아직 구체적인 건 없는데…
이상하게 꿈속에서 자꾸 제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퇴사하면 나와 함께해요. 같이 일해봅시다.”
“내일까지 생각해보고 말씀드릴게요.”
본부장은 서귀포에 살고 있었고, 승무원의 집은 서울에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보현스님이 나에게 이 승무원을 만나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모레 아침 8시 30분, 커피숍에서 만납시다.
오늘은… 그냥 마음껏 즐기자.”
그날 우리는 노래방과 7080 콘서트장에서 자정까지 흥겹게 놀았다.
모두를 택시에 태워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와 소주 한 병을 더 마시고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본부장에게 10억을 송금했다.
비가 내렸다.
30층 건물이 뼈대는 완공되었다.
수영장과 골프연습장은 형태를 갖췄고,
식당가들도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10월이면 모든 게 마무리될 듯했다.
바닷가 백사장 산책로를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걸까,
아니면 놀기 위해 하는 걸까….’
둘 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멍하니 인생을 흘려보낼 수 없기에 발버둥치는 것임은 분명했다.
파도 넘실대는 푸른 바다가 가슴속 깊이 들어왔다.
대자연 앞에 서면 욕심도, 근심도 사라진다.
그러나 세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전투적인 사람이 된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야생의 짐승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살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은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