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발견한 사유
* 일부러 다른 평론 등에서 많이 언급된 개념이나 해석들은 배제하고 적어봤습니다.
* 당연히 스포일러있습니다.
아득히 먼 우주의 얼어붙은 구석을 떠올려본다. 한때 누군가의 꿈이자 미래였을 그곳이, 이제는 생과 죽음이 기묘하게 뒤엉킨 개척지로 변해 있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은 바로 그 황량한 설원 위에 조용히 누워 있는 한 남자의 얼굴에서 시작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죽음조차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짊어진,이름도 ‘미키’라는 평범한 청년이. 그를 지켜보는 우리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죽음이 이렇게 가벼운 것이라면, 삶은 얼마나 하찮아질까?”라는 물음이 뼛속 깊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우주 한복판에서 외롭게 흔들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득한 미래라는 설정이지만, 정작 미키에게 투영된 감정과 생각은 지극히 오늘날의 현실과 닮아 있다. 죽어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설정이 얼핏 장밋빛처럼 보이지만, 그 그림자엔 “인간이 과연 어느 선까지 소모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어두운 질문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상상의 영역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지배하는 권력 구조, ‘진짜 나’가 무엇인지조차 헷갈리게 만드는 기술 시대의 혼란, 우리가 몸담은 자본주의의 잔인함이 이 영화에 스며들어 있다.
영화가 열리면, 우리는 식민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위험한 임무에 내몰리는 미키를 본다. 죽으면 곧바로 새 육체가 프린트되는 그 과정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되기에 오히려 더 섬뜩하다. ‘누군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지만,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이나 죄책감은 지워져 버리는’ 기묘한 세계. 여기서 미키는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이다.
아감벤이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라 불렀던 개념은, 바로 이런 상황을 떠올리게 만든다. 법과 권력의 보호 밖에서, 오직 맥박 뛰는 생물학적 존재로만 남게 된 인간. 그들은 죽여도 살려도 어떤 법적·윤리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말하자면 시스템이 맘껏 관리하고 처분해도 괜찮은 생명이 된다. 니플하임의 설원 위에서 죽어가는 미키, 그리고 어떤 죄책감도 없이 새 미키를 출력해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연스레 “인간이란 어디까지 권력에 노출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미키가 잃어가는 것은 단순한 ‘목숨’이 아니다. 그가 잃는 건 이 세계에서 자신의 존엄, 그리고 “죽음은 내 것이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자기 권리다. 아감벤의 말처럼, 법(혹은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생명은 파괴당해도 누구도 죄로 여기지 않는다. 미키가 어떤 표정을 짓든, 그 감정은 시스템에선 중요치 않다. 매번 새로 태어나는 ‘몸’과 ‘기억’은 오직 목적 달성을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그 순간, 관객은 한 인물에게 “죽음”마저 개인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인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니플하임에 닿은 개척단은 미키와 같은 익스펜더블을 앞장세워 위험을 무마한다. 자원이 제한된 항해선 안에서, 각 인물의 권리는 최적화·효율화라는 이름으로 재단된다. 미셸 푸코는 “현대 권력은 사람들의 삶을 거시적 차원에서 관리하고 통제한다”고 말했는데, <미키17>은 이 생명정치(biopolitics)의 극단을 보여준다. 시스템이 주도권을 쥐고, 개인의 생사마저 ‘통계’처럼 취급되면서,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관리자 입맛대로 조절된다.
가령 미키가 극한 임무를 수행하다 사망하면, 항해선의 주체들은 이를 큰 문제 삼지 않는다. “죽으면 다시 복제하면 되잖아”라는 식의 태도가 훨씬 우세하다. 이때 미키에게 남는 건 ‘나는 생명이 아니라 도구’라는 씁쓸함뿐이다.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는 국민 국가의 틀 안에서 개인을 규율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틀이 우주선과 행성으로 확장되었을 뿐, 논리 구조는 똑같다. ‘누가,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조차 조직이 결정할 수 있고, 그 결정은 시스템의 효율에만 복무한다.
그렇게 한 인간의 목숨은 “데이터” 혹은 “자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미키는 그 데이터 속에서 끊임없이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는 이름표 정도로 전락한다. 보는 우리는 낯설면서도, 왠지 모르게 이 모습이 지금의 현실사회와 맞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끊임없이 효율을 외치는 기업이나 정부가, 우리 삶의 사소한 영역까지 관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우리가 매일 스스로를 얼마나 기계적인 규율에 얽어매고 살아가고 있는가? <미키17>은 먼 미래 이야기를 빌려, 생명정치가 몸을 파고드는 우리 시대를 시퍼렇게 비추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지 권력과 생명정치의 이야기로만 볼 수 없다. 미키가 여러 번 죽고 되살아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나?”라는 정체성의 흔들림이다. 미키가 자신을 복제한 또 다른 미키(예컨대 ‘미키17’과 ‘미키18’)를 마주칠 때, 둘 중 누가 진짜인가 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하지만 사실, 여기엔 더 깊은 함정이 숨어 있다. 어쩌면 ‘진짜 미키’라는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크 데리다는 모든 의미가 차이와 지연 속에서 끝없이 미끄러진다고 했다. 원본을 찾으려 해도, 이미 그것은 존재하기 이전부터 무수한 차이 속에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미키가 가진 기억과 성격은 ‘원래’ 한 미키에게서 파생된 것 같지만, 그 원본이 정말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각각의 미키가 살아온 시간과 조건이 다르고, 복제가 반복되면서 사소한 변수들이 더해질 테니까.
영화 속에서 미키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은, 결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내가 둘이라면, 어느 쪽이 나인가?’ 혹은 둘 다가 ‘나’라고 해야 옳은가? 그 갈등은 결국 우리가 믿어온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다.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이 이 세계의 구조를 헤집는다. 미키17과 미키18은 서로를 “복제품”이라 부르며 무시할 수도, 동시에 서로를 “또 다른 나”라 여기며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는 사이, 원본성은 사라지고 복제 사이의 차이만 남는다.
이는 곧, “진짜 나란 어디에도 없으며, 다만 매 순간 재조합되는 ‘나’들만이 있을 뿐”이라는 인식에 다다르게 한다. 관객으로서는 괴이하고도 서글픈 결론이지만, 우리는 본디 완결된 자아를 소유한 적이 없었다는 데리다의 가르침을 이만큼 극적으로 시각화한 예시도 드물다.
그러나 〈미키17〉을 보다 보면, 이 정체성 위기가 의외의 해방감을 안기기도 한다. 미키가 어느 순간 죽음과 죽음 사이를 부유하며, 더 이상 “나는 이래야 한다”는 인식을 고집하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그는 이제 하나의 고정된 인간상이 아니다. 매번 새롭게 출력될 때마다, 그 자체로 지금 ‘여기’의 몸이 된다.
질 들뢰즈의 사유로 돌아보면, 이는 “되기(becoming)”의 과정이다. 완성된 정체성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며 탈영토화하는 존재. 미키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사건에 맞춰 끝없이 변주되면서 살아간다. 행성의 독특한 생태, 동료들과의 관계, 심지어 자기 복제체와의 대면—이 모든 것이 미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그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장담할 수 없는 상태로, 그저 흐름 안에 뛰어들어 자아를 매 순간 재발견한다.
이는 통상적인 인간 경험과는 매우 다르다. 우리는 대부분 “내가 누구인지”를 확립해야 안정감을 느끼지만, 미키에게 정체성은 오히려 족쇄가 될 뿐이다. 되기의 여정 안에서, 미키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유동하는 형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의 나는 이전 죽음을 겪기 전과 같지 않으며, 앞으로도 몇 번 더 달라질 것이다. 그 불확실성이 바로 자유가 된다. 수십 번의 육체 교체 속에서 미키는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미키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가 수행하는 “임무”들은 어떠한 보람이나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위험에 처해 죽거나, 살신성인을 해야만 다른 사람과 시스템이 안정을 누린다. 그런데 죽으면 새 몸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그것이 ‘미키’라는 인간을 결코 구원해주지는 않는다. 매번 죽음을 반복해 얻는 건 오직 더 무거워진 상실감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노동 소외”를 떠올린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성과와 분리될 때, 더 나아가 스스로가 상품처럼 취급될 때, 인간다움이 훼손된다는 이론이다. 미키는 말 그대로 생명 자체가 노동력으로 투입된다. 죽음을 통해 개척단은 한 발 더 안전해지고, 개척에 따른 이익을 챙길 수 있다. 그러나 미키 본인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른 채 거듭 소모된다. 죽어갈 때 그의 고통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성과는 이 시스템의 상위층이나 동료 모두가 나눠 가지겠지만, 정작 미키에게 남는 건 매번의 죽음이 남긴 트라우마뿐이다.
어찌 보면 미키는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극단적으로 소외된 노동자의 환영처럼 보인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위험을 싼값에 외주화함으로써 풍요를 누리는 경우가 많다. 시스템은 그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면, 인간을 복제해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을지 모른다. 설령 기술적으로 아직 불가능해도, 정신적인 차원에서 이미 우리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소모하는 중’이 아닐까? 영화가 보여주는 미키의 눈물은, 이런 “목숨을 갈아 넣는”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미키17>은 얼어붙은 우주설원 위에 선 한 남자의 고독한 뒷모습을 비출 때, 묘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교차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한 번쯤은 모든 감정이 마비될 법도 한데, 미키는 여전히 무언가를 느끼고 애도하고 사랑한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감동적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감벤이 말한 “벌거벗은 생명”이라 해도, 그 안에는 여전히 인간의 감정과 윤리가 피어오른다. 푸코적 생명정치의 그물에 갇힌다고 해도, 틈새를 비집고 나오려는 자아의 열망이 있다. 데리다의 차연으로 원본 없는 정체성이 드러나도, 우리는 그 부유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마주하고 연대할 수 있다. 들뢰즈가 말한 되기의 흐름 속에서도,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스스로를 발명하며 의외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노동 소외가 깊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의 소중함이 더욱 선명해진다.
결국 <미키17>은 한 남자의 삶과 죽음을 무수히 복제해 보여주며,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생생히 드러낸다. 이 작품이 익숙한 SF 공식을 뛰어넘는 건, 최첨단 기술과 행성 개척이라는 장치 뒤에 숨어 있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들, 요컨대 인간의 존엄, 권력, 자유, 그리고 사랑 따위를 다시금 끄집어낸다는 점이다. 어느 날 문득, 지구가 아닌 니플하임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내 목숨조차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듯한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가 ‘인간’이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미키처럼 다시 한 번 눈을 뜨고 이 세계와 맞서는 용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니플하임의 밤하늘을 수놓는 별빛은 차갑지만, 그 아래에서 미키가 숨을 고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죽었으나 다시 살아난, 온전치 않으나 여전히 스스로를 찾아가는 그 존재가 문득 우리의 마음 한구석을 환히 비춘다. 봉준호 감독은 그렇게, 우주라는 광막한 무대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날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남아, 우리를 곤란하고도 아름다운 사색의 길로 안내한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미키가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지켜낸, 인간의 유일무이한 빛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