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취준생으로 사회에 던져진 나의 재정 상태는 마이너스를 안고 시작했다. 학자금 대출이 약 2000만 원쯤 되었었다. 2000만 원 내가 졸업 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낸 수업료였다.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드는 돈이 딱 2000만 원이면 좋았겠지만 택도 없었다.
개인의 스펙이 넘치는 상황이었다. 어디를 취업하려면 토익이 몇 점에 토플이 몇 점을 받아야 한단다. 그게 요즘 기본이라더라. 이런 이야기들은 더욱 사람을 작고 조급하게 만들었다.
2000만 원의 빛이 있는 임고생. 이게 나의 20대였다. 물론 용돈을 벌기 위해 알바를 했다. 그러나 빚을 갚기 위해 모든 시간을 일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가 가진 학력으로 취업할 수 있는 회사는 적었고 내 경력으로는 더욱 없었다.
학교에서 강사를 하거나 학원 알바를 하며 공부를 했다. 체력적으로 힘이 들고 시간도 뺏겼지만 돈에 대한 부담은 확실히 줄었었다.
경제적인 것은 급하게 수습해 놓으니, 이제는 나에 대한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했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박살 난 상태라 무엇을 해도 안될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니 끝없이 우울해져 갔다.
자신감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은 조금 더 성적이 높은 대학교의 대학원을 진학했다. 어느 곳에 소속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너 요즘 뭐 하니?'
이런 질문을 받으면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는 소속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곳의 학생들은 어떻게 공부를 하며 나와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 입학은 모아둔 돈으로 다녔고 그 이후 학기부터는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담당교수님께는 '저는 임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학부 수업을 청강하고 싶습니다.'라고 허락을 구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참 당돌했다. 지금도 당돌하지만....) 다행히도 교수님께서는 사범대를 졸업했으면 임용합격해야지 라는 말씀과 함께 학부 수업 청강을 허락해 주셨다.
학부수업과 대학원 수업을 모두 들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교수님과의 대화도 재미있었다.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주변의 현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었다.
그렇게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며 내가 느꼈던 건 그 학생들과 나는 학습 지식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청강한 학부 시험을 A 받았었기에...) 그렇다면 나도 포기하지 않고 시험을 준비해 볼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 아이들 별 것 아니네? 나도 해볼 만 한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럼 저 학생들과 나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차이는 있었다. 그 학생들은 그날 해야 할 것이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왔다. 학생들을 보면 시험기간에 3일 밤을 새우는 경우는 허다했다. 논문을 쓰지 않으며 똥 배짱으로 버티는 고집불통 대학원생이었지만 자신감을 얻었고 생각의 변화를 가지게 된 시기였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지만 나는 아직도 빛을 가진 임고생이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빛도 있는 임고생. 점차 주변의 시선은 묘하게 바뀌어 갔다. 열심히 하면 교사가 될 거야!라고 생각해 주었던 사람들이 '교사가 될 수 있니? 그 정도 했으면 되었다'로 바뀌었다. 그 시선 또한 견디기 힘들었다. 가족들의 믿음은 사라져 갔고 나도 내게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이것이 가장 불안했다. 미래의 내가 잘 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후에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 정도 힘든 시간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나를 더 가라앉게 만들었다. 도전만 하다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번째 시험. 그전 연도의 성적이 좋았기에 기대가 되는 해였다. 성적을 올리려 더 열심히 했고 자신감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시험 전날 저녁쯤 배탈이 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감기기운까지 있었다. 평소 신경성으로 예민했던 장이 버티다 버티다 탈이 난 것이다. 배탈이 나니 오롯이 시험에 신경을 쓰기 힘들었다. 너무 억울했다. 급히 늦게까지 여는 병원에서 약을 타먹었지만 효과는 미비했다.
그렇게 다음날 고사실로 들어갔다. 아침까지 배탈이 낫지 않았다. 예민한 고시생은 정말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1교시 교육학이 시작되었다. 시험지를 받은 후 종이 울리고 문제를 폈다.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온통 검은색이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안 쉬어졌다. 심장부근을 잡고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했지만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다. 겨우 마음을 다독이며 천천히 정신을 차린 후 남은 시간 열심히 시험 문제를 풀었다.
그해의 결과는 또 낙방.
처음 느끼는 공황이었다. 그렇게 공황을 경험하고 나니 더욱 무서웠다. 이 시험 자체가. '내가 이 시험을 계속 칠 수 있을까? 또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면? 내가 이 시험과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은 평소에도 긴장도가 높은 사람인데 임용을 치는 날 최대치의 긴장을 하니.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공황은 다음 해의 시험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공부를 할 때에도 종종 찾아왔다. 극복해 보려 했지만 심한 공황이 올 정도의 긴장은 시험 치는 날 하는 것이니, 긴장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긴장도를 낮추는 연습을 하기도 어려웠다.
정신과 몸이 모두 지쳐 갔다. 불면증과 공황이 생겼다는 사실이 사람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자 슬슬 임용이라는 시험에, 사회에 삐딱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따위 시험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까지 힘들게 만드나. 이런 생각에 오기가 생겼고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는 악바리 근성이 나왔다. 내 고집과 승부욕이 임용시험에 꽂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20대 후반이 되었다.
20대 후반의 2000만 원 빛이 있는 임고생 여자.
정말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