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일을 하며 빚을 모두 갚았다. 가족들에게 손 벌리기 싫었다. 집에서 완전히 독립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었다.
공부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때, 내 상태를 이야기하자면 한마디로 아침에 눈 뜨기가 싫었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니 누군가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다. 힘들다고 이야기해도 나와 같은 상황이 아니고, 임용을 준비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깜깜한 거리를 걸어 집으로 갈 때면 음식점마다 불이 환했었다. 유리 넘어 보이는 가게에는 일을 끝내고 하루의 회포를 풀러 온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다른 누군가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사람들은 오늘 자신의 몫을 하고 살았나 보다. 부럽다.
'다른 곳에 취업하면 되는 것 아냐?'
'그럼 공부를 그만하고 일을 해봐.'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해보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하나쯤은 내가 원하는 것으로 바꿔보고 싶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선천적인 병, 가정환경, 출생순위, 부모등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의지로 선택하고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곳에서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지만 내게 주어진 어려운 운명, 불리한 조건을 내 힘으로 조금은 극복해 보고 싶었다. 맞다. 열등감.
어쩌면 내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를 내 힘으로 처음 선택한 것이었다. 책임 지고 결과로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가진 조건과 운명 중 하나만은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시험이라는 것에 지기 싫었다.
그렇게 결과로 증명하고 싶은데 할 수 없으니 욕심은 점점 많아지고 현실은 점점 우울해져 갔다. 정신이 버티기 힘들었다. 그래서 살기 위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마음을 비우고 긍정적인 회로를 돌리는 것.
욕심을 버리는 연습을 했다. 합격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합격하면... 합격하면... 합격하면이란 말로 잡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창한 것이 아닌 눈앞의 작은 행복들을 찾기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 기분이 좋아지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시계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누구의 시계는 시간이 좀 빠르구나, 내 시계는 남들보다 약간 늦는구나. 내 시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단지 각자의 시간이 다르다. 그러니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내 속도에 맞춰서 지금 내가 해야 될 것들을 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열심히 성실히 하면 언젠가는 예쁜 꽃이 해사하게 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나에게 떳떳할 것.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미련하다.'
'약간만 요령 피우면 더 쉬운 길이 있어.'
이런 것에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그저 묵묵히 내가 하는 것을 계속하기로 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나중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성실하고 열심히 하니까 반드시 기회는 올 거라고. 신을 믿지는 않지만, 내가 사람에게 어떤 운을 주는 신이라면 무조건 선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줄 것 같았다.
세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눈치 보지 말고 해 볼 것.
흘러간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20대 후반이 되어서 느꼈다. 그전까지는 20대가 영원할 줄 알았다. 사실 시간에 대한 개념이 크게 없었다. 30대를 바라보고 있는 나이가 되니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을 시험을 생각하며 참기에는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수준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보기 시작했다. 취미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좋은 결과도 내면 좋겠지만 결과가 나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과정을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내가 처한 현실과 고민이 생각나지 않았다.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될 때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어떤 것에 몰입해서 생각의 고리를 강재적으로 끊어 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때 취미가 너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미술관 가는 걸 좋아한다. TMI를 말하자면 나는 그림을 진짜 더럽게 못 그린다. 그림을 못 그리니 전에는 사람들이 미술관에 가는 이유를 몰랐다.
그랬던 내가 미술관 가는 것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좀 웃긴데, 세상이 너무 밉고 모든 것이 다 싫을 그 시기에 지역 내 조금 떨어진 곳에 큰 미술관이 생겼다.
스트레스와 걱정에 심장은 터질 것 같이 뛰어서 심장소리에 잠도 못 자고, 바람은 쐬고 싶은데 친구들은 일을 하느라 바쁘니 부를 수가 없었다.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돈을 써서 무언가를 해도 마냥 즐겁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미술관이 개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오천 원이면 유명한 작품을 볼 수 있단다.
그렇게 미술관을 처음 가게 되었다.
'저 그림은 어떻게 그렸을까?'
'저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저 그림은 에너지가 넘친다.'
미술 작품을 보는 동안 내 머리는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 걱정할 틈이 없었다. 미술관을 나오니 2시간이 흘러있었다. 2시간 동안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자극을 받은 것이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분 전환이 된 것이다.
그렇게 미술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요즘도 생각이 많거나 감정적으로 복잡할 때 무언가를 비우기 위해 미술관을 간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 고립된 시간은 분명 고통이었지만 그 시간 덕분에 나라는 사람에 대해 고민하고 힘들 때 버틸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쟁여놓게 되었다. 낮은 베개, 포근한 이불, 맛있는 커피, 기분에 따라 듣는 좋은 음악, 멋있는 춤, 조용하고 넓은 도서관, 숲의 향기, 예쁜 꽃, 글쓰기, 독서, 노래방, 콘서트, 덕질 등등.
요즘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준다.
'세상을 살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한다. 작은 것이면 좋고, 하찮으면 좋고, 많을수록 좋다. 그게 나중에 네가 숨 쉴 공간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공부해서 무언가를 더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할 수 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불공평한 인생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미친 세상에 나를 잘 다스리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