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하철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할머니가 앉아있는 2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남자 앞에 털썩 주저앉아서
구걸하듯 한참을 뭐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앞에 서 있었지만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호기심이 생겨 노이즈캔슬링을 끄고 뭐라는지 들어봤는데
다리가 아프니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자의 반응이 의외였다. 한참을 들은 척도 안 하더니 할머니가 다리를 붙들고 흔들자 결국 한마디를 했다.
“노약자석으로 가세요”
만원 지하철은 아니었지만 서있는 사람도 꽤 있었는데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용기라고 해야 하나…
상식적으로는 그냥 비켜주고 말았을 텐데, 나라면 웃으며 바로 일어났을 것 같다.
보통은 그렇게 말하고는 계속 앉아서 갈 만큼 얼굴이 두껍지 않다. 지하철 자리가 무슨 아파트 입주권도 아니고 이동하면서 길어야 30분 정도 이용하는 공간일 뿐 아닌가. 나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결국 그 할머니는 대각선에 있는 다른 젊은 여자 앞으로 갔고 그 여자는 일어나서 다른 데로 가버렸다. 앉긴 앉으셨다.
나도 나이를 먹어보니 불편한 것들이 하나씩 생기고 있다.
올해는 특히 시력이 안 좋아졌는데 눈곱이 낀 것 같은 불편함이 계속되고 시리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것도 멀리 있는 것도 흐릿하게 보인다. 흔히 말하는 노안이 온 것이다. 이물감이 계속되는 것은 백내장의 증상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살이 찌고 있다. 작년까지 75kg 내외를 유지하더니 올해는 82kg를 기준으로 왔다 갔다 한다.
허리도 좋지 않고 머리도 부쩍 많이 빠지는 느낌이다.
젊음은 나이 듦을 혐오하고 늙음은 젊음을 회상한다.
누구도 본인이 노인이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다.
현재의 나는 나이에 상관없이 주관적이다. 나에 비해 어린 사람과 늙은 사람이 존재할 뿐,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사회에서는 ‘기준’을 만들었다. 좋든 싫든 소년의 나이, 청년의 나이, 중년의 나이, 노인의 나이가 있고 그에 해당하면 인정해야 한다. 보통 노인의 기준은 65세이다. 내가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건강관리를 잘했다 해도 65세가 넘으면 사회에서는 노인의 자격을 얻는다. 사회적 기준은 개인 간의 편차를 중화시켜서 쓸데없는 분쟁을 없애준다.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살지 않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면
이런 사회적 기준을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
사회적 기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통념, 관습, 문화, 전통, 상식으로 관념화된다.
300만 년쯤 전에 인류가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그렇게 나이 든 나약한 인간이 사회에서 도륙되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이 지금의 사회적 제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저 나약한 노인의 시간이 다가올 테고, 내가 젊어서 노인을 공경했듯이 나의 후배들도 나를 공경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