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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어 Dec 27. 2024

12. 30년 직장을 그만두고 전쟁을 맞이하다

제2의 인생 준비중…

30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건 누구의 압력도 아닌, 오롯이 내 의지였다.


매일 아침 6시에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한 뒤, 늘 같은 노선의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정해진 시간에 점심을 먹고 퇴근하는 하루가 반복됐다. 한 달에 한 번, 마약처럼 기다려지는 월급이 들어왔고, 회사에서는 싫지도 좋지도 않은 일들이 주어졌다. 하나의 일을 마치면 또 다른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내가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착각에 우쭐하기도 했고, 때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허무한 일에 매달리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엔 나는 ‘좋은 아빠’이자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남편’이었다.


정년이 65세로 늘어났다는 소식에 가족들은 기뻐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누구 맘대로 정년을 늘린 거야?’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의 나이에 회사에 입사한 뒤, 내 청춘의 30년을 한 회사에 바쳤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볼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는데, 5년을 더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꽉 막혔다.


결국, 내가 퇴사를 선언했을 때 가장 반긴 건 회사였다.


회사 입장에서 나는 앞으로 5년 동안 비용만 발생시키는 ‘부담’이었을 테니까. 퇴직 조건으로 받은 돈은 퇴직금을 제외하고 3억. 마치 드라마 속 재벌가 사모님이 돈 봉투를 내밀며 포기하라고 협박하듯, 회사는 당당했다. 뭐, 이 정도 금액이면 그럴 만도 하다. 정년 연장의 덕을 본 덕에 위로금까지 챙길 수 있었으니, 이를 만든 검사 출신 대통령이 잠시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족들은 내 퇴직 소식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나 회사 그만두고 버스 운전할 거야.”


“정말? 그럼 우리 아빠 버스 타고 놀러 다녀도 돼?”


서른이 넘은 딸과 아내는 나를 지지해 주었다.


“당분간은 일할 생각 말고, 좀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봐. 양평에 좀 가 있어도 좋고, 나 신경 쓰지 말고 당신하고 싶은 대로 해. 30년 동안 고생 많았잖아.”


그들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를 이해하고 위로해 주려는 마음만큼은 고마웠다.


양평에 땅을 산 건 아내의 뜻이었다. 땅을 산다는 게 낯설었지만, 거의 매주 땅을 보러 다녔다. 가평, 파주, 남양주, 포천, 양평 등 1시간 이내 거리의 땅을 돌아보던 중, 예산과 조건에 딱 맞는 땅이 양평에 있었다.


땅을 사고 난 뒤로,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했다. 농막을 짓고, 담장을 세우고, 지하수를 끌어오며 하나씩 추가되는 아이템에 농장을 키워가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딸도 취직해 큰돈 들어갈 일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자본주의 정원’은 점점 업그레이드되었다.


퇴직 후, 한 달 가까이 나는 양평에 머물렀다.


그곳에서는 마음이 편안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소음이 없다는 점이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잔디밭에 책상과 의자를 놓고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사진을 찍고, 잡초를 뽑고 가지치기를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3주간 양평에서 혼자 지내며, 나는 30년의 회사 생활을 마음속에 묻었다.


서울로 돌아오자 두 여인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 식사 중 딸이 물었다.


“근데 아빠, 버스 운전한다고 하지 않았어?”


“이 양반이 원래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걸 싫어했어. 이번에 3주 동안 양평에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니까. 당신, 양평에 진짜 있었던 거 맞지? 두 집 살림한 거 아니지?”


“엄마가 가라고 해놓고는 별소리를 다하시네요.”


“암튼, 이분은 운전이 잘 맞을 것 같긴 해. 돌아다니는 걸 워낙 좋아하니까.”


그들은 나를 빼고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순간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맞아. 30년 동안 똑같은 곳만 오가느라 지루했거든. 이제는 어디든 갈 수 있어.”


내 농담에 두 사람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아마 내 말이 그들에게는 조금 뼈아프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날로 대형버스 면허 시험을 준비했고 한 번에 붙었다. 고3 겨울방학 때 2종보통 면허증을 딴 후로 오랜만에 면허시험장을 갔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대형면허는 그냥 돈만 내면 되는 것 같다. 필기시험도 따로 없고 학원에 등록해서 80만 원을 내고 학과교육 3시간, 기능교육 10시간을 받았다. 그리고 주행시험 없이 장내시험만으로 1주일 만에 대형면허증을 땄다. 한 번의 낙오 없이 한 번에 합격하자, 자신감이 붙었다. 만약 시험에서 떨어졌다면 집사람과 딸에게도 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자율주행이니 뭐니 기술이 발전했다지만 운전기사를 뽑는 곳은 꽤 많았다. 회사 통근 버스나 아이들 등하교 버스부터 버스는 아니지만 장애인택시기사를 뽑기도 했고 마을버스에서도 사람을 뽑았다. 마을버스로 경력을 쌓은 후 시내버스나 고속버스로 간다고들 한다. 이도저도 마음에 안 들면 내 돈으로 버스를 사서 프리랜서처럼 뛰어도 됐다. 산악회나 야유회, MT, 동호회 등 버스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았다. 세상에 이런 삶의 방식도 있는데 30년을 하나만 알고 살아온 게 아쉬웠다.


“여보, 근데 당신 회사 그만둔 지 이제 두 달도 안 됐는데 바로 일 시작할 거야? 최소한 1년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 사표가 수리되고 남은 휴가까지 모두 몰아서 쓴 후, 이제 더 이상 회사원이 아닌 시점부터 지금까지 가만히 있질 않았다. 내 몸은 노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무언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며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는 목표가 없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


그날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등산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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