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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Dec 14. 2023

역사와 풍광의 콜라보레이션, "서천(舒川)" 주유기

Chapter 2. 영원한 청년,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

# 첫째 마당: 월남 이상재, 그는 누구인가?



오랜 역사를 지닌 고장 서천은 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낳았다. 그러나 서천이 낳은 최고의 인물을 꼽자면 그 첫머리는 역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큰 어르신으로서의 역할을 다 해내신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1850~1927) 선생의 몫이 되어야 마땅하다. 서천의 중심가인 서천 오거리 한 복판에 이상재 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을 보면, 이 점에 관한 한 사람들의 생각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서 서천이야기, 그 제1막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지'로 열어젖힐까 한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당신의 일생을 통하여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그 다양성을 선생의 연표를 기준으로 한번 되짚어 볼까 한다.


1. 행정가/외교관로서의 이상재


1881년, 이상재는 일본의 개화발전상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이끌고 일본으로 향하는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시찰단에 합류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이상재 선생의 이름이 공식문서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건일 것이다. 아, 조사시찰단이란 용어에 관하여는 조금 이야기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조사시찰단이 일본으로 떠나던 1881년 당시에는 '시찰'이라는 말이 일본 정부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일이 될까 봐 '신사유람단(神士遊覽團)'이란 용어를 썼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차대한 나랏일에 '유람'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언젠가부터 유람 대신 '시찰'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신사'라는 말은 gentle하다는 의미가 있을 뿐, 국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조선(朝)의 선비(士)'라는 의미를 담아 '조사'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단어가 바로 '조사시찰단'이다.     

한편 이상재 선생이 본격적으로 행정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은 우정총국(郵征總局)의 인천 분국(分局) 분국장이 되어 분국업무를 총괄하기 시작한 1884년의 일이다. 그런데 모두들 알고 있듯이 1884년 우정총국의 개업을 알리기 위한 축하연에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고, 덕분에 근대적 우편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던 선생의 노력 또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월남 이상재 선생 전시관(후술 참조) 안에 정 4품 이상의 벼슬을 임명하는 교지(敎旨)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때부터 이상재 선생은 이런저런 나랏일을 맡게 된 것 같은데, 많은 교지들 가운데 하나만 사진을 찍어가지고 나왔다.

위 사진 속 교지의 내용은 대충 이런 뜻이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로 미국에 부임하게 되는데, 이상재 선생은 이때 박정양의 추천으로 1등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이때부터 당분간 외교관 이상재의 길을 걷게 된다.

미국까지 가는 길은 당시의 교통사정상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해서 박정양을 필두로 하는 조선의 주미공사 일행은 해를 넘겨 1888년 1월에서야 비로소 백악관으로 클리블랜드(Cleveland) 대통령을 찾아가게 되는데, 아래 사진 하단이 그때의 기념사진이다. 재미있는 것은 저 사진 속의 인물들의 행보가 모두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이상재 선생처럼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완용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섰던 인간도 있으니 말이다.

조선 주미공사 일행이 백악관을 찾았던 당시의 모습은 이렇게 그림으로만 남아 있다.

한편 최초의 주미 조선 공사관의 모습은 아래 사진들 속의 공사관 엽서에 서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공사관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아래의 사진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다만 최초의 주미 조선 공사관이었던 피셔하우스는 헐려서 그 자취가 사라졌고, 현재 그 자리에는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있다. 다세대 주택의 모습(아래 사진 왼쪽 위)과 원래 피셔하우스의 공사도면인 청사진이다.

공사관 현관 포치(Porch)의 금속판에 태극기문양도 새겨 넣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이 남아 있다.

전시관에는 건물 옥상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이런 사진이 있던데, 위의 사진을 토대로 조금 작업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아래 사진에서 내 관심을 끈 것은 공사관 건물이 아니라, 사진 오른쪽의 태극기였다. 왜냐하면 1893이란 숫자와 헌팅턴 도서관 소장이란 글씨를 볼 때, 이것은 틀림없이 당시에 사용했던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구한 말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던 대표적 인물로는 호레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을 들 수 있는데, 아래 사진은 이 사람이 주미 조선공사관에서 일할 당시에 사용하던 명함이다. 그는 1901년부터는 주한 미국 공사관 전권공사로도 활약했는데, 이는 조선과 미국 양국 모두 이 사람의 능력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관에는 당시의 주미 조선 공사관에 관한 각종 사료(史料)들 또한 전시되어 있는데, 이상재  선생이 1887년 8월에 주미공사관 1등 서기관으로 임명된 때로부터 1889년 1월까지 작성한 38통의 편지를 묶어 놓은 미국서간(美國書簡)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미국서간에 관하여는 아래 사진 속의 설명을 참조하기를...

이것은 미국공사왕복수록(美國公使往復隨錄)인데, 보다시피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다.

미국공사왕복수록이 어떤 성격의 사료이며, 그것이 갖는 사료로서의 가치에 대하여는 아래의 사진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공사왕복수록의 표지와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작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진인데,  

아래 사진이 조금 더 자세하게 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2. 교육자로서의  이상재 선생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이끄셨던 다른 선각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상재 선생 역시 교육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그러나 이상재 선생은 우리 민족의 교육을 전국단위로 체계적으로 조직화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분들과는 약간 차원을 달리하는 면이 있고, 이 때문에 이상재 선생을 이야기할 때면 늘 교육자로서의 이상재를 강조하게 된다.


전시관 안에 많은 자료가 있었고, 나름 사진을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쓰려고 보니 교육자로서의 이상재 선생에 대한 자료사진은 아래 보여주는 3장의 사진이 전부이다. 한편 사진 자체에 모든 설명이 다 되어 있으니, 사진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


3.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상재 선생


이상재 선생을 이야기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빼놓을 수는 없는데, 전시관 안 선생의 흉상 뒤편으로 당신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다들 잘 알고 있어 지루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간단하게나마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상재 선생을 이야기해보기로 하겠다.


(1) 독립협회 조직/독립문건설

이상재 선생은 1896년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11월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는다. 그리고 1898년 10월에는 입헌군주제 실시를 핵심으로 하는 국정개혁안인 ‘헌의 6조’를 제출해 황제의 동의를 얻었지만, 보수관료들의 모함으로 11월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2) 만민공동회

그리고 다음 해인 1899년 1월에 이상재 선생은 의정부 총무국장 자리를 끝으로 잠시 관직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오히려 만민공동회의 명사회자이자 연사로서 더 활발하게 국권수호운동을 계속한다. 그러던 1902년 이른바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또 한 번 한성감옥소에 수감되었다가 1904년 2월에 석방된다. 한편 이때의 수감기간 중에 선생은 기독교와 접하게 되고, 이로 인해 출옥 후에는 황성기독교 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3) 3.1 운동의 정신적 지주

이상재 선생은 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간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혹자는 이상재 선생이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하던데, 그에 대해서는 당시에 그나마 일본과의 협상 창구가 될 수 있는 인물이어서 민족진영에서 일부러 이상재 선생을 제외시켰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3.1 운동을 누가 시작했냐는 일본 경찰의 심문에 "이천만 민족이 다 같이 시작했다"라고 답하며 일본 경찰에게 한수 가르쳐 주는 기개... 이런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4) 신간회 초대회장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있어 가장 문제였던 것 중의 하나는 독립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좌우 양진영으로 갈려져 있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이 때문에 독립운동을 위한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지 못하였다. 그런 면에서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新幹會)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데, 그건 신간회가 좌우갈등을 지양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단일의 전선을 형성할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치를 내건 신간회를 이끌고 나갈 사람은 이상재 선생이 거의 유일했고, 당연히 신간회의 초대회장으로 선생이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후인 3월, 이상재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지켜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보았던 것처럼 이상재 선생은 행정가/외교관으로서, 또 교육자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갔던 우리 민족의 선각자였다. 때문에 당신이 세상을 등지게 됐을 때 실로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하여 아직 일본애들의 지배가 행해지고 있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전시관 안에는 선생의 장례 행렬 사진도 있던데, 이것은  (신세계 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한국은행 앞을 지나가는 모습이고,

이것은  종로 YMCA 건물 앞을 지나가는 모습이다.



## 둘째 마당: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



1.  개 관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이하 생가지라고 한다)는 한산면 종지리 263 외 15필지에 생가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짓는 등의 성역화(?) 사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보다시피 주차장과 문화해설사의 집을 필두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주차장 한쪽 구석에 종지리(種芝里) 마을에 관한 설명이 있는데, 관심 있으면 확대해서 읽어 보기를...

생가지에 관한 개략적 내용이 담겨있는 안내판인데, 그에 의하면 서천군이 조성하고 홍보에 힘쓰고 있는 '천년솔바람길'은 이곳을 지나치도록 되어 있다.

선생의 생가지는 따로 휴관일이 정하여져 있지가 않아서 언제든 방문이 가능하다. 입장료도 없고.

월남 이상재 선생 전시관(이하 전시관이라 한다)으로 가는 길목 오른쪽에 '월남 이상재 선생 추모비'가 있는데, 기념비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에 건립되었고, 국가 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보호받고 있다.

당신의 일생과 업적을 적은 글이 기념비 후면과 우측면에 가득한데, 글은 독립운동가이자 문필가로 유명한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1893-1950) 선생이 지으셨다.

추모비에 관한 설명은 아래 안내판을 참조하기를..


2.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


전시관으로 가는 길 왼편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가 있는데, 전체 모습은 이런 형상을 띠고 있다. 비록 크고 높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대문은 주변의 담보다 높은 솟을대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생가 입구 왼편에 있는 안내판에 따르면 선생의 생가는 사랑채와 안채 모두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축조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생가 건물은 19세기 초에 지어졌으나, 그 후 완전히 허물어진 것을 1972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했고, 현재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고 있다.

이상재 선생 생가 안채의 모습인데,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이 없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래서 안채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개방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왼쪽이 사랑채이고, 오른쪽은 창고나 외양간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훗날 우리나라의 거목으로 우뚝 선 이상재 선생이 태어나신 생가 전체의 모습인데, 전시관 안에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3. 월남 이상재 선생 전시관


이상재 선생께서 세상을 뜬 지 아직 100년도 안되어 그런지 당신과 관련된 자료며, 당신이 남기신 유품이 많이 남아 있는데,  월남 이상재 선생 전시관은 그 가운데 서적이나 임명장 유물 등 244점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아래 사진이 전시관 전경이다.

전시관 입구 왼편에 의자에 단정히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계시는 모습의 당신 동상이 있다. 음... 앉아 계셔 그런가? 동상만으로 추단하면 키는 그리 크지 않으셨던 것 같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데,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들어가면서 찍은 사진은 없고, 나오면서 찍은 사진만 한 장 남아 있다. 어쨌거나 우리네 전통 창호인 장지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정겹고 반갑다.

전시관 안에는 이상재 선생의 출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여정, 그리고 당신의 유품 등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다. 다만 이들 전시물 가운데 상당수는 "월남 이상재, 그는 누구인가?"에서 보여 준 관계로 여기서는 그곳에서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만 하도록 하겠다.


먼저 이것은 이상재 선생의 출생에 관한 전시물인데,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상재 선생이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서 우뚝 서게 될 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러나 필부 이상재를 우리가 흠모하는 이상재 선생으로 만든 것은 역시 죽천 박정양(竹泉 朴定陽, 1841~1904)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상재 선생은 박정양의 집에서 식객으로 무려 13년이나 있었는데, 이는 박정양에 대한 그야말로 무한한 존경과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훗날 이 두 사람은 정신적 동지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는데, 박정양은 그 정도를 넘어서 이상재 선생의 인생 굽이굽이에서 이상재 선생을 인도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너무도 완벽하게 해내었다. 이런 까닭에 전시관에는 박정양을 소개하는 전시물이 상당히 많다.

박정양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사진을 참조하기를...   

특이한 전시물로는 박정양이 자신의 선친인 경암 박제근(敬菴 朴齊近, 1819~1885)의 시문집을 편집하여 간행한 경암유고(敬菴遺稿)가 있는데, 1895년에 간행되었다고 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상재 선생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은 물론 박정양이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생애 속에는 많든 적든 또 좋든 싫든 여러 사람과의 만남이 이어지기 마련인데, 전시관에는 그런 점에 착안하여 이상재 선생이 살아가며 만났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젊은 날의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모습도 보이고, 서재필 박사도 보인다.

잘들 알겠지만 이상재 선생이 갖고 있던 커다란 매력으로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유머감을 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신이 갖고 있던 촌철살인의 해학과 유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인들에게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그만의 커다란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 이 말이 다른 위인들은 유머감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고, 단지 이상재 선생의 유머감이 워낙 출중하다 보니 기록에 남은 것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전시관에는 선생이 남기신 유머 가운데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단번에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는 미학,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그대로 전달되는 미학이 잘 드러난다.

전시관에는 선생의 유품 몇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생이 쓰셨던 붓과 벼루이다. 아래에서 보는 선생의 유묵들이 바로 이것으로 쓰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밖에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망원경과 조전철(弔電綴)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고,

말년에 선생이 늘 손에 쥐었던 지팡이와 당신의 업적을 기리어 만들어진 기념주화도 전시되어 있다.

태극기... 언제 보아도 가슴 뛰게 만드는 것인데, 전시관에 태극기가 세로로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이상재 선생의 삶을 돌이켜보면 당신의 전시관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막상 이렇게 선생의 전시관에 턱 하니 걸려 있으니, 이 태극기가 당신의 삶의 어떤 중요한 시점에서 사용되었던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시관에서 이 태극기에 대한 별다른 설명은 발견하지 못했다.  

전시관 안에는 당신의 친필유묵이 가득한데, 그 가운데 특히 마음에 들었던 몇 개를 사진기에 담아 나왔다. 이상재 선생. 글씨도 참 잘 쓰셨는데, 악필에 난필까지 겹친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당신의 유묵 몇 점을 소개하자면..

이것은 일심상조불언중(一心相照不言中) : 같은 마음으로 보면 말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것은

여사하방한묵연(餘事何妨翰墨緣): 나머지 일들이 어찌 나의 글 쓰는 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병인년(1926) 10월에 쓰셨으니, 돌아가시기 한 해전의 글씨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평생자유단표락(平生自由單瓢樂): 대밥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표주박의 물을 먹어도 평생 자유로웠다. 다다르고 싶은 경지이기는 한데, 천민 속성으로 가득 찬 나로서는 솔직히 접근 불가의 영역이다.

이상재란 인물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떠한 업적을 남기고 어떠한 삶을 살다 갔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몰랐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당신이 실로 대단한 분이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아마 그 누구라도 이곳을 찾는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될 터인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담아 글을 쓰는 것은 전적으로 어린아이들의 몫이다. 나이를 먹어가면 잠깐의 시간을 들여 글을 쓰는 것도 귀찮아지는 것인지...  

교육자로서, 또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신 이상재 선생. 대한민국은 1962년에 당신의 높은 뜻에 고마움을 표하고, 그를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당신께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셋째 마당: 에필로그...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는 그를 행하는 사람들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종교, 신분, 이념, 재력 등에 따라서 말이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의 삶에 대한 평가에 관한 한 이론(異論)이 없었던 듯하다. 종교나 신념, 신분을 넘어 우리 민중 모두의 이름으로 장례절차가 진행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이었다고 한다.

사회장 이후에 선생의 시신은 서천(정확히는 한산) 선영에 안장되었는데, 어쩐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1957년에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비문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 1897~1961) 선생이 지으셨고.

그리고 이것은 당신의 신도비(神道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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